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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각한 축복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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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동규 목사

2004년은 서남아시아를 강타하여 15만 명의 사망자와 180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쓰나미(지진 해일)에 대한 기사로 마무리 되었습니다(12월 26일). 갑작스런 재앙으로 수많은 사람이 애통했습니다. 지난 1월 8일 칠곡에 있는 면장갑 제조공장에 불이 나서 장애인 근로자 4명이 사망한 소식도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특히 칠곡이 우리의 인근 지역이며 사망자가 장애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도 그러한데 유가족들이야 오죽 애통하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외에도 애통한 일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여러 모양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무도 그들을 보면서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애통’은 지난주에 배웠던 ‘심령의 가난’과 연관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은 영적인 파산 상태에 있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무능에 대한 절망을 실감하고 있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님을 알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갈구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영적 파산 상태를 너무나 잘 인식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애통’이라는 정서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심령의 가난이 복 있는 사람의 ‘인식’적 측면과 관련있다면, 애통은 복 있는 사람의 ‘정서’적 측면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구나 ‘애통’이라는 정서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애통해 합니다만, 4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 애통은 ‘한 맺힌 탄식’과는 구별되어야 하고, 만족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천박한 ‘자기 연민’과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만이 가지는 정서적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은 무엇을 애통해 합니까?

첫째는 복 있는 사람은 자기의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맏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게 생각하거나, 하나님 백성답지 않게 행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고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처럼 자기 죄로 인해 애통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신자는 죄에 대한 진지한 절망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거듭나면 죽었던 영적 감각이 살아나서 이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을 죄로 감지합니다. 성숙해질수록 죄에 대한 감각이 더욱 예민해져서 점차 더 죄인 된 자신을 인식하게 됩니다. 바울도 성숙해갈 수록 죄인 됨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8),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엡 3:8), 라고 소개하다가, 그의 신앙이 가장 원숙했던 시점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그는 성장해갈 수록 더욱 작아지고 더욱 죄인 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 심각한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 그런 고백은 오늘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해줍니다. 그러나 현재적으로 내가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성숙도는 이처럼 현재적인 죄인으로서의 자기 고백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숙하든 성숙하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기 죄에 대해서 ‘애통’ 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미숙한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을 심각하게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거듭난 순간에 이미 성화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그 순간에 온전한 의인으로 변화된 것처럼 오해합니다. 비로소 출발선에 선 것일 뿐인데도 마치 종착점에 도착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마냥 기쁘고 즐거운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줄로 알고 애통함 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죄인임을 발견하면, 깜짝 놀라면서 신속하게 자기 절망과 연민과 자학으로 빠져들고 구원을 의심합니다. 애통하기는 하는데 좀 요란스럽습니다. 기쁨과 애통의 극단 사이를 하루에도 여러 번 오르내립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께 값없이 의인이라 칭함 받았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의식으로 인한 잔잔한 기쁨과 감사가 항상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죄인으로서의 애통함도 가지고 삽니다.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사도 바울처럼 헌신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시인하고 자기는 한낱 죄인일 뿐임을 심각하게 인식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도무지 바르게 설 수 없는 자임을 진지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항상 응시하며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부터 멀어져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애통함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천박한 생각들과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언행들로 인한 마음 깊은 탄식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쁨과 감사는 미성숙한 사람처럼 피상적이지 않고 요란하지도 않습니다. 심각한 기쁨과 진지한 감사가 그의 삶의 특징이 됩니다.

둘째로 복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죄로 인한 애통해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서도 애통해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알지 못하고 자기 고집대로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통함을 가집니다. 죄로 인해 고통 받는 그들의 상황을 보면서 심령으로 함께 신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을 통한 소식으로 인해 세상을 혐오합니다. 비난하고 정죄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혐오감을 느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원인이 궁극적으로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애통해합니다.

한 사람의 불행을 특정한 죄와 연결해서 설명하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욥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게 닥치는 불행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며,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행한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죄 자체의 성격 때문에 애통해 하며, 죄가 세상에 일으켜 놓은 결과를 보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도 미숙한 사람은 세상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힘이 약합니다. 자기 죄로 인한 애통에 온 마음이 빼앗겨 있고, 그 애통으로 인한 하나님의 위로에 만족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은 좀처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애통과 위로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이 함께 위로 받기를 갈망합니다. 다른 지체들을 돌아봅니다. 그 자신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위로 받기를 갈망합니다. 만물이 위로받기까지 그의 애통은 끝나지 않습니다. 계시록 21:4에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애통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은 후로 더 이상 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면 바르게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죄악 된 이 땅에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분별력을 상실하고 죄에 동화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언제나 바르게 배우기에 힘써야 하고, 또한 바르게 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 일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 도와가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절박하게 의존해야 합니다. 열심히 그렇게 하고서도 돌아보면 늘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구석들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고 따르려 할 때, 필연적으로 애통도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서 애통함이 실종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안주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보려는 의지가 상실되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는 진지한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진지하고 심각한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행의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고민, 사람이 왜 사는 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지, 무엇이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삶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을 ‘청승맞음’으로 치부합니다. 생각해봐야 해결되지 않는 심각한 죄 문제를 들추어내기보다 그저 시트콤처럼 가볍게 웃으며 살아가는 것을 선호합니다. 가볍게 생각하고, 가볍게 말하고, 가볍게 행동합니다.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애통에 대한 가르침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의식 없이 대충 시간을 때우며 살고 있는 삶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한 자기 성찰 없이, 그저 세상 사람들이 사는 풍조에 발맞추어서 취직하고 결혼하고 자식 키우는 삶이라면 어떻게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맛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세상 사람들 보기에 남부럽지 않게 되었다 할지라도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애통함이 없는 기독교는 참 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마냥 즐겁기만 한 기독교는 왜곡된 기독교입니다. 애통함이 실종된 신앙은 바르게 성장하지 못하고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실종된 ‘애통함’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단지 주여 삼창과 함께 분위기에 편승해서 부르짖는 피상적인 애통함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격과 삶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생각과 언행인지를 살피는 진지한 애통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러한 애통함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위로가 임하겠지만, 그 날에 받을 위로를 애통한 오늘에 맛보게 하십니다. 죄를 토설하는 사람은 죄 사함의 위로가 임할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울며 씨를 뿌린 사람은 기쁨으로 거두는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각기 제 갈 길로 가는 양떼들을 위해 애통한 목자의 심정으로 기도한 사람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은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삶으로 인해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애통했던 세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숙한 백성다운 생각과 삶을 성찰하는데서 오는 애통과, 이로 인한 심각하고 진지한 축복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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