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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벧후 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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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제신 목사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1절에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라는 질문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앞 10절에서 우리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주의 날이란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의 심판의 날이 도적같이 임할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도적 같이 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의 재림을 맞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도적같이 임할 그 날에 대비하여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냐”고 질문함으로서 우리의 심령에 충격을 주고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어떠하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①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행 13:22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② 모세는 날 때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행 7: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③ 그런데 아합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상 21:20절에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세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이 많이 있지만 본문으로 선택한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한 사람이 될지” 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내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어떤이 들은 주의 약속은 더디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주의 약속이란 재림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2000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주의 재림의 약속에 관한 믿음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포기하고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병폐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심판이 속히 실행되지 않는 것은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오래 참으사 구원받을 자는 모두 구원받아야 하기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저는 이 하나님의 참으심의 시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러브 타임이라고 붙였습니다.

  어제 장례식에 가면서 양정 타임 없앤다고 광고 하고 8:30분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집사님 몇이 1-2분 늦게 와서 아직 출발 안한 줄 알고 장례식 마치고 돌아올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교인들도 너무도 오랜 습관에 젖어있어서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 참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양정타임을 없애야 하겠지요. 그러나 너무 사무적으로 그러다 보면 놓치는 것이 또 많습니다.
  어떤 때는 올 것이라고 한 사람이 안 나와서 10-20분을 기다리는 적이 있습니다.
  왜냐면 그와 꼭 함께 가야할 일이 있을 때 말입니다. 그냥 가면 너무 아쉬운 사람, 꼭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은 조금 기다렸다가 함께 가려고 기다리다 보니 양정 타임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도 “하나님 타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속에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사람,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심판을 연기하시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 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러브 타임에 대하여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주님의 재림을 올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을 오해하지 말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다림으로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앞에 앉았는데 어떤 길손이 그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몹시 더운 날이었는지라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나그네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낀 아브라함이 잠깐 자신의 집에서 쉬어갈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그의 아내 사라에게 부탁하여 시원한 우유와 빵을 대접하였습니다.
  옆에 앉아 길손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브라함이 “손님을 음식을 잡수실 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식사하던 그는 무뚝뚝하게 “나는 페르시아 사람으로 불을 숭배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신앙이 독실한 아브라함은 그에게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섬겨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으나 그 나그네는 반대 이론을 강력하게 폈고 결국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격분하여 “당신 같은 사람은 내 장막에 머물게 할 수 없소. 곧 나가시오” 라고 말했고 길손은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 앞에서 그 길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저 사람을 위해서도 50년이나 참아오셨는데 너는 한 시간도 참지 못하는 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참으심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인내하여야 할 근거입니다.
  조금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인내로서 기다립시다.
 
  눅 8장에 보면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는 네 종류의 밭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 열매를 맺게 하는 좋은 땅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눅 8:15절에 보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도 “인내” 가 없으면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내가 있어야 모든 일에 결실이 있습니다.
  인내로 얻는 결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혼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눅 21:19절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에게 핍박을 당하고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에 인내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한 사람입니다.
 
  2. 경건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인 벧후 3:11-12절을 읽어보겠습닏.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있을 심판의 날을 염두에 둔다면 거룩한 행실을 갖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거룩한 행실이란 구별된 행실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세를 사는 성도는 구별된 행실을 가져야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후에 가장 먼저 요구하시는 것이 구별된 행동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벧전 1:15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행실을 갖고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벧전 1:13-15절에 보면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행실을 위해 마음의 허리를 동입시다.
  여러분이 지금 마음의 허리를 동여매고 힘쓰는 일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행실을 위해 성별된 성도의 모습을 위해 허리를 동이고 있습니까?

  어떤 부인이 믿지 않는 남편을 간신히 이끌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날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는 분은 손을 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 부인이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도 이 순간 손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약속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남편은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슬픈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손을 들고 예수 믿기로 약속하실 줄 알았는데 왜 안들었죠?”
  그러자 남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보. 그동안 당신은 크리스찬으로 살아왔고 나는 불신자로 살아왔소. 그런데 그동안 당신의 생활을 보면 나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소. 내가 화내면 당신도 화내고, 내가 술을 마시면 당신도 마셨고, 내가 걱정하면 당신도 걱정하고, 내가 일요일 바다로 가면 당신도 따라나섰지 않소. ... 이처럼 당신과 나의 생활이 다를 바가 없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특별히 크리스찬이 되어야 하는지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소”

  이렇듯 성도의 구별되지 못한 삶은 자기는 물론 타인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아직도 과거 죄의 습관과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레 11:45절에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거룩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부끄럼 없어야 하겠습니다.

  3. 천국 비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벧후 3:12-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하나님에게 마땅한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계시록 21장에 언급되고 있는 천국의 모습입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라고 했습니다. 이 죄악 된 세계가 지나간 후 우리에게 펼쳐질 하나님이 만드신 영원한 복락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원을 갖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비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빌2:13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죄악을 벗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사는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국에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죄악 된 이 세상의 삶이 지나간 후에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곳입니다.
  성도는 천국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한 프랑스의 병사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 왔습니다.
  총탄을 꺼내기 위하여 가슴을 째고 있을 때 이 병사는 신음 중에 의사에게 말하였습니다.
  “더 깊게 째 보십시오. 그러면 내 가슴깊이 묻혀 있는 조국 프랑스를 꺼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가슴을 헤쳐 본다면 무슨 꿈과 소원이 나올까요?
  “잠시 있다” 가는 이생의 욕심과 이기적인 꿈만이 가득한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어제 저는 아주 애석하고 가슴 아픈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본인은 믿지 않았지만 부인이 우리 교회 교인입니다.
  40대에 교통사로 죽었습니다.
  40세라고 하는 나이도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제 마음을 아프게 한것은 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짧을 생을 살다 갈 것을 일찍 예수님이나 믿지......  그렇게 덧없이 죽어갈 것을 왜 진작 하나님을 믿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시간은 각자 다르겠지만 한번은 그렇게 갑니다. 다만 천국의 소망 없이 사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느 부자가 하나님께 자기 재산을 천국으로 가져가겠다고 졸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하도 졸라대서 마지못해서 허락하셨습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네 재산을 가져오되 가방 하나에만 가져와야 한다" 라고 말입니다.
  부자는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금으로 바꾼 뒤 흐믓해 했습니다.
  이윽고 천국 문에 다다르자 베드로가 소지품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께 허락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베드로는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자고 했습니다. 가방을 열어본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니 도로포장 재료를 무엇하러 이렇게 잔뜩 가져오셨습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안잡히십니까? 계 21:21절을 보십시오. 천국에는 모든 길이 유리 같은 정금이라고 했습니다.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천국에 가면 금은 도로 포장 재료로 쓰여집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는 자는 결코 이 세상것 때문에 죽고 살지 않습니다. 재물의 소망이 끊어져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천국의 가치가 그의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더 높은 이상과 비젼이 있기에 세상 줄 끊어져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땅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인내의 사람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의 사람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천국 비젼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의 사람이 됩시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의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천국 비젼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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