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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뛰어 넘어 (빌 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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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숭의교회)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매우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이고 둘째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진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창 2:7)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불어넣으신 생기는 하나님의 영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정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가치관과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과 똑같은 마음과 정신과 가치관과 철학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진흙 한 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주어지자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을 잃고 산다면 우리 인간의 존재가치는 진흙 한 덩어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그냥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영과 함께 자유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자유는 하나님의 영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자유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미신은 운명과 팔자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와 같은 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자유와 부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운명과 팔자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는 선택을 의미하며,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어 주셨습니다.

인생을 건축에 비유한다고 할 때 미신은 우리의 집이 신의 마음대로 지어져 주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것을 저들은 운명이라고 말하고 팔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의 집을 당신 마음대로 지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건축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뒤에서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부족하여 실수할 때에도, 인생을 망칠 때에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를 종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구속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까지도 소유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은 소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가 선택한 소유입니다.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한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버림 받는 어처구니없는 아픔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어 당신을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 인간에게서 사랑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주셨고 또한 소중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 외에는 그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영과 자유를 배재한다면, 그가 아무리 부자라고 하여도, 출세하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누려야 할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이 소중한 영과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탄에게 귀 기울여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소중한 하나님의 영을 상실하게 되었고 소중한 자유를 잃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면서부터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전혀 다른 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다른 인생관과 가치관과 철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거꾸로 보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자유를 잃었습니다.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려고 하는 자는 소중한 자유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는 자는 세상의 종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은 세상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얽매여 종처럼 살아갑니다. 세상에 울고 웃으며 좀더 좋은 세상을 꿈꾸며 좀 더 세상과 환경에서 살기 위하여 쓸데없는 지나친 욕심을 부리며 살아갑니다.

좀 더 좋은 것을 먹고, 그것도 많이 먹고,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편하게 살기 위하여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출세를 하려고 합니다. 좋은 것을 먹고, 풍족히 먹고 좋은 환경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의 종이 되어 밤낮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만 염려하여 사는 것은 지나친 것이고 위험한 것입니다. 적절한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을 넘으면 그 선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똑 같게 됩니다. 아니 더 위험하게 됩니다. 그 위험은 보통 위험이 아니라 재앙적인 위험입니다. 지금 우리 지구는 그와 같은 재앙에 직면해 있습니다.

욕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종이 된 인간이 자신의 끝도 없는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과도한 생산 시스템을 가동함으로 지구가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세상에 대하여 자유하지 않으면, 그리하여 세상에 대하여 소박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지구는 우리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집착에 의하며 파괴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세상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공부를 하고 사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합니다. 남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으려고 죽어라고 공부하고 죽어라고 사업하고 죽어라고 직장엘 다닙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지구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파괴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도 함께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 당황스러운 것은 세상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우리 사람들은 공부만 하고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예수까지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함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믿어서 남보다 더 부자가 되고, 예수 믿어서 남보다 더 출세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더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더 출세를 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자유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자유하는 사람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더 먹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더 크고 좋은 환경에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것에 자신의 인생을 걸지 않습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비천하면 비천한대로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천들의 시민권은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빌 3:20) 그런데 저 자신을 포함한 요즘 우리 크리스천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 아니하고 땅에 있는 듯 합니다. 땅에서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하여 (그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닌데) 예수를 믿습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을 무조건 부정하고 부인하는 염세주의자도 아니고, 세상을 무조건 악하게만 보는 영지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크리스천은 땅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땅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땅과 세상을 뛰어넘어 자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이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비천하면 비천한대로 구김 없이 살았습니다. 부한 데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한데도 처할 줄 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자유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 때문이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믿음의 능력은 자신에게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족하며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세상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살아도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과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꽤 많은 책을 썼습니다. 제 책 중에 가장 팔리지 않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재판만 찍고 더 이상 찍지 않는 책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책입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함철훈’이라고 하는 사진작가를 만나 그의 사진과 삶에 매력을 느껴 그와 함께 출판한 책입니다.

그 책 중에 ‘하늘을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오늘 그 글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고려대 기독 학생들의 채플에 갔다가 사진가 함철훈씨를 만났다. 한번 얼굴을 익힌 적이 있어 반갑게 인사할 수 있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찍은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슬라이드의 주제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주제만 듣고도 감동이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상을 창조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수요예배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한 장도 볼 수 없었지만, 본 것 만큼이나 감동을 받았다. 흥분된 어조로 ‘보이지 않는 손’을 설명하는 사진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러나 분주한 일상에 묻혀 나는 그를 잊었다. 그런데 기독 교수들의 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포항에 위치한 한동대학교에 갔다가 거기서 그를 또다시 만났다. 함께 식사를 했 는데 여전히 흥분하며 나의 설교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설명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의 사진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그 사진을 좀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응했고 드디 어 식구들과 함께 거의 세 시간 가까이 그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느꼈 던 감동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평소 늘 만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왔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만났던 것이다.

그는 실력 있는 사진작가다. 큰맘 먹고 일하지 않아도 적당히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을 찍으면서 얼마든지 넉넉하고 편안한 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것을 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찍고 싶어 하시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격어야만 했다. 거의 3년 가까이 한 달에 6만원 하는 창고 같은 방, 아니 창고에서 생식을 하며 버텼다. 모세와 바울 그리고 다윗과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그도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고집을 통하여 그의 사진들이 나왔다. 그의 사진에 메시지가 실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사진에 나타나면서부터 그는 흥분했다. 세상에 없는 부요함으로 부요해지고, 세상에 없는 기쁨으로 들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의 가난함과 인간적인 외로움을 말하기 전 까지는 그것을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그가 찍은 사진 가운데 하늘을 비상하고 있는 신천옹(信天翁, albatross)의 사진이 있 다. 그는 그 사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여 놓았다. 그 글과 사진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다 알아 낼 수 있다.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 게 하찮아졌어.
두 번씩이나 접히는 내 크고 고운 날개도
더 놓이 날아서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지도
그래, 이름 석자를 위해 퍼덕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신천옹, 내 이름만큼이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난 자주 여기서 살아
날개를 접고 부리를 땅에 박고 있을 때조차 난 이곳에 떠 있지
약해진 두 발목을 노리는 올가미로도, 약 먹인 낟알로도
단 한 발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총알로도 날 여기서 끌어내릴 순 없어
난 이미 하늘보다 더 놓은 하늘을 내 안에 넣어 뒀거든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여 있는 굴레를 훌훌 털어버리고 참으로 자유 로운 삶,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바울의 삶을 오늘 그가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는 기쁨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참된 부요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다. 이 땅에서도 천국 즉 하늘을 사는 사람이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예수를 아는 순간, 그 분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간, 하늘을 믿는 신천옹(信天翁)이 되는 순간, 그가 믿는 하늘이 자신 의 것이 되어 땅에서도 하늘을 하는 기막힌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의 삶이 부유할 수도, 가난할 수도 있고,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거의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며 늘 감사하며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을 만나서 기쁘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뛰어넘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 다. 믿음으로 하늘을 품고, 믿음으로 하늘을 살아, 세상의 형편과 처지에 일희일비(一喜 一悲)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유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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