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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한 이인자의 삶 (요 1: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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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빅춘수 목사

새해가 되어 요즘 시중에 인기리에 상영되는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알렉산더라고 하는 영화입니다.얼마전에 저는 청년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였습니다.다소 길다싶은 감은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였다 싶습니다.왜냐하면 한 지도자의 삶을 통해서 지도자의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갖게 해준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알렉산더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개국을 정복한 왕입니다. 그는 20세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서 33세의 나이에 결국 영화에 의하면 독살당하게 됩니다.왜 그가 젊은 나이에 돌연사를 당하게 되었을까요? 권력의 최고의 자리를 탐내는 그의 신하들의 야심때문이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스 왕도 졸지에 왕위에 욕심많은 신하들의 세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2인자가 없을때 1인자도 없습니다. 역사의 많은 인물들의 경우 좋은 이인자가 있을때 훌륭한 1인자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인자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운동을 해도 1등을 해서 금메달을 따야 합니다. 공부를 해도 1등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앞장서서 해서 자기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일인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들은 이인자 조연의 역할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일인자가 되어 주연이 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저마다 일인자가 되고자 할때 분쟁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를 보면 우리는 더욱 그것을 보게 됩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지 이인자로서 역할보다는 저마다 일인자가 되려고 하면서 얼마나 내분이 심하고 분쟁이 심합니까? 여러분 심지어는 교회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인자로서의 위치는 인기가 별로 없고 언제나 일인자가 되어야 만족하고 그래서 저마다 일인자로 살려고 제일 전방에 선 사람들을 공격할때가 있습니다. 종종 처음에는 이인자로서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다다고 어느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초심을 잃고 잘못되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리에게 1인자가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1등만이 최고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그 자리가 비록 남이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자리일지라도 조연의 자리일지라도 그 자리를 지키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조연들이 많이 소개되고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철저하게 조연자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이인자로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오직 예수님이 일인자 주연이고 자신은 이인자 조연이었습니다.
사실 세례요한은 그 당시에 나름대로 많은 인기와 관심을 끌었던 사람입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은 위대한 종교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권위는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구약에 오실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독특한 옷차림과 생활에다 권세있는 말씀과 물세례가 그를 오해하게 만든 것입니다.그래서 많은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심지어는 유대의 분봉왕까지도 그를 두려워하여 그 존재에 대해서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들의 박수소리 때문에 자기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하여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이인자의 자리에서 살다가 결국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사실 세례요한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위해 조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속에서도 우리가 함께 사역을 하다보면 이인자가 되어야할때가 많습니다. 그때 거룩한 팀웍을 이루어야 하고 거룩한 조연자가 되어야 합니다.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이인자로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인자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인자로서 성공한 세례요한의 삶을 함게 나누겠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소명이 있었습니다.

23절에
세례요한을 향해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세례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을 알기 위해서 예루살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왔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군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세례요한은“네가 누구냐“질문을 받았습니다.여기 세례요한이 누구인가의 질문은 아주 반복적이고 집요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은 세례요한은 두려워하거나 자신을 숨기거나 전혀 위축되지 않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사람들이 물었을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말했습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메시야가 아니다라고 밝힙니다. 다시 묻기를 “네가 엘리아냐” 질문합니다. 구약에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처럼 세례요한은 능력있는 선지자로 오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라고 밝힙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번에는 “네가 선지자냐”라고 질문합니다.세례요한의 말이 너무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선지자는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세례요한의 정체성을 검증하던 사람들은 너무도 단호하게 질문합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야”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누구이십니까? 내가 누구인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누가 여러분이 누구인지 물을때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많은 경우에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는 부모로부터 권위자들로부터 다른 사람들로부터 발견된 나를 나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우리가 나를 소개하는 이력서나 신원진술서 나를 소개하는 명함에는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어떤 학교를 다녔으며 나이는 얼마이고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 하는등으로 나를 말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내가 보는 나,사람들이 보는 나를 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보는 나를 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분명한 소명이 있었습니다.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름의 확신이 있었습니다.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갈때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름 안에서 나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다”“나는 그리스도도 아니다”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존경하고 높였지만 자신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부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름의 확신이 있는 세례요한은 땅의 사람들 앞에서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1인자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군중심리에 빨려들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오직 주를 위하여 광야의 소리로 존재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가지 광야의 소리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많은경우에 교회 속에서 우선적으로 사역에 집중하기가 쉽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사역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평신도들도 우선 사역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역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먼저 일어서 걷고 뛰기보다 먼저 앉아서 있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일을 하기에 앞서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과 일대일의 깊은 관계를 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자존감의 문제입니다.어떤 사람들은 너무 자존심이 세어서 문제가 됩니다. 자존심이 너무 센 사람은 독선적이고 교만하게 사람들에게 비추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자존감이 약하여서 문제가 됩니다. 너무 자신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면서 자기를 멸시합니다.그래서 이런 분들은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이렇게 자존심이 너무 세거나 너무 약하면 교회 속에서 남과 더불어 연합하여 팀웍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여러분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고 어떻게 나를 부르시고 사용하시는지 주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당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를 거룩하게 지켜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정체성을 갖고 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그 길을 우리 함께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2.세례요한은 먼저 광야에서 준비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난 뒤에 먼저 사역을 한 것이 아니고 광야에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법과 광야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준비하고 훈련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살았던 광야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저는 성지순례에서 유대의 광야를 보았습니다. 광야는 환경적으로 불편한 곳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은 모든 고난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세례요한은 가족들과 분리되어서 외로운 광야의 시간을 갖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태복음3장에 보면 세례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합니다.

불편한 식사 불편한 잠자리 외롭고 힘든 광야의 삶은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를 보면서 자아를 내려놓는 훈련의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광야에서 그는 주님위해 이인자로 사는 법들을 훈련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조연자로서 주님을 위해 사는 법을 준비하고 훈련하였습니다.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하면서 자기의 뜻과 자기의 야망을 내려놓기를 배웠습니다. 광야에서 인간으로서 자기의 한계를 보면서 주를 위해 사는 삶을 준비하였습니다.물론 이 광야의 삶은 공적사역이전에도 준비되었던 것이었고 매일의 사역 속에서도 다시 돌아가서 광야의 삶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모든 시끄러운 인간의 소리를 떠나서 비록 고통은 있지만 조용한 그곳에서 세례요한은 깊은 영성의 사람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 광야의 시간이 있습니까? 비록 고통은 있지만 나의 몸을 쳐서 복종하면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나를 점검하고 무장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를 보면 반드시 기한이 되면 점검을 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고 할지라도 일정기간에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점검을 통해서 차의 부품 중에서 잘못된 것은 수리하고 교체하게 합니다. 그래서 차가 정상적인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자신도 갖습니다. 우리 인생길이 아무리 좋은 고속도로라고 해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때로 우리는 상처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눈물흘리면서 살아갑니다. 대부분 우리는 무시당하여 자손심에 금이 가기도 합니다. 이 모든 사람에게 광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시 새롭게 무장되고 훈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거룩한 조연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광야를 새벽기도 시간과 서재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삼습니다.
사실 외적으로 설교하는 시간은 30분 정도이고 양육과 훈련하는 시간은 길어보아야 3시간을 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준비하고 나를 훈련하는 시간은 매일 매일의 시간의 연속이며 평생해야 할 일입니다.
종종 누군가 저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합니다. 저의 경우 목사로서 설교할 때 양육하거나 가르칠때 전도할 때 힘들지 않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내가 나를 가르치고 준비하고 훈련할때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봅니다. 주님을 위한 삶은 의욕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먼저 광야의 시간을 통해서 고난 속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시간을 통해서 자아를 훈련해야 합니다.

이런 광야의 시간을 갖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준비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 게으름입니다. 이땅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위하여 삶을 살아가고자 할때 거룩한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우리를 광야로 나가기를 싫어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뒤로 후퇴하게 만듭니다.
제가 요즘 교회 공동체 속에서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과거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그리고 우리 나이 지긋한 믿음의 선배들과 요즘 저같이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중에 하나가 부지런함 성실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집니다. 요즘 사람들은 기능과 지식은 뛰어난데 자세는 과거보다 떨어집니다.
남을 섬기는 거룩한 조연자가 되려면 내가 먼저 충만해져야 합니다. 내가 먼저 새로워져야 합니다. 비록 힘은 들지만 광야의 시간을 충분히 갖고 사역하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힘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깊은 준비는 깊은 섬김을 낳습니다. 고된 훈련을 받은 군인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풍성한 훈련을 체험한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삶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광야의 자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으로서 우리가 아무리 우리가 거창한 여러 가지 계획과 꿈을 세웠어도 우리 자신이 먼저 그릇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큰 그릇의 사람으로 깨끗한 주님의 사람으로 매일 새롭게 준비되기를 바랍니다.

3.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흥하게 사역을 했습니다.

27절을봅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에수님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알게 하고 주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31절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주님만 흥하게 하는 설교 주님만 높이는 세례의 사역을 베풀었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보고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어서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에게 오던 사람들이 이제 주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이것을 본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보고를 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

이 보고를 받은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요한복음3:28-30에서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한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인간적으로 세례요한은 명예욕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시기하지 않았고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세례요한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은 주님의 이인자로서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였습니다.
27절에서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겟노라‘고 합니다.
여기 신들메를 푼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걸어다닐 때에 신었던 신발의 끈입니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 시켜서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였습니다.이 말을 세례요한이 하는 것은 자신은 주님과 비교할 때 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높고 귀한 신분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자기는 감히 신발끈도 풀 수 없을 정도의 낮고 부족한 종이라고 합니다.

사실 세례요한은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인기를 얻었던 상황입니다.그래서 그를 가리켜 사람들이 메시야라고 할 정도였고 선지라고 다같이 인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결코 그는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외적으로 성공하고 있었지만 겸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성공한 다음에 얼마나 겸손하기가 힘이 듭니까?
끝까지 겸손하기가 얼아마 어렵습니까? 처음에 잘 시작하다가 성공한 다음에 교만하여 비참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개인적으로 요즘 사무엘상서를 읽으면서 사울왕을 보면서 좋은 교훈을 얻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울이 처음에 왕이 될 때에 얼마나 겸손하였습니까?그가 이스라엘 왕이 되었을 때 성공하였습니다.

사람이 성공하게 되면 자신을 과대평가할 위험이 많습니다. “내 아니면 안되”“내가 해야만 돼‘라고 자기를 앞세우게 됩니다.그래서 사울은 사무엘 제사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친히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여기 제사 한번 인도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중심을 본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사울을 폐하게 됩니다. 여러분 자기 위치를 바로 지키기를 바랍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장로님들은 장로님들로서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집사는 집사로서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서로 겸손하게 내 할 본본을 다하면 정말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내 할 본본과 책임을 다하지는 못한채 자꾸 나를 드러내려고 오버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교회 속에서 직분자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역하는 사역자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대중들 앞에서 설교하는 목회자가 그리고 악기와 찬양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역하는 분들일수록 나를 드러낼 위험이 많습니다.

주님이 나타나고 덕이 나타나도록 겸손으로 자기를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신앙 생활은 내가 드러내는 영웅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없어지는 조연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속에서 저마다 1인자가 되려고 하면 예수님은 없습니다. 저마다 거룩한 이인자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례요한은 결국 나중에 헤롯왕 때에 결국 목 베임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비록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는 어쩌면 실패한 인생으로 보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인정하십니다. 이렇게 소명의식을 갖고 철저하게 자기를 쳐서 복종하면서 준비된 이인자로서 주님을 흥하게 하였던 세례요한을 두고 우리 주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사람이 없다하고 인정하였습니다.
나를 통해서 주님을 세우고 나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삶이 되어서 주님 앞에 우리 모두 인정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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