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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행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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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성령 충만’ - 정말 기독신자들이 많이 듣고 자주 쓰는 말입니다. 부흥회 주제나 교회 표어 등에서 제일 흔하게 쓰이는 말을 꼽으라면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등 자리를 차지할 용어입니다. 하지만 또 어쩌면 기독교 용어들 가운데 이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오용되는 것도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실제로는 정말 은혜롭고 뜻 깊은 말이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날 기독신자들 사이에서 이 ‘성령 충만’이란 말은 점점 더 그 참된 의미가 상실되어지고 오히려 더 가볍고 더 값싼 뜻으로만 사용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즉 무언가 신기하고 야단스럽고 흥청대는 분위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지는 뜻으로 바뀌어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증거하는 성령 충만은 결코 그와 같이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히 역사하셔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것은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서도 너무나도 명백하게 증거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의 첫 대표적 사건, 바로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는 일입니다. 첫째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가 체험했던 그 특별한 사건은, 성자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을 끝내시고 승천하신 후, 이제 성령 하나님께서 신약 성도들 가운데 친히 내재하시며 역사하시는 새 시대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오순절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체험했던 첫 ‘성령 충만’은 과연 어떤 것이었으며, 오늘날도 변함없이 택자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 충만’의 은혜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1. 성령 충만함을 받은 상태란 자신의 심령 속에 하나님을 모시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의 말씀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오순절이라는 것은 유월절 이후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지키던 유대인의 명절로서 맥추절, 칠칠절 등으로도 불리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유월절이었고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으니, 이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 승천 후 약 일주일 남짓 지난 때가 될 것입니다. 이 날 사도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고 했는데, 그 장소는 그동안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다락방일 수도 있고 혹은 성전 뜰일 수도 있습니다만 전자가 더욱 유력합니다.

  그날의 성령 강림은 우선 두 가지 전조가 있었습니다. 먼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그 집에 가득하게 찼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구약에서 성령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입니다. ‘성령’이란 히브리어 자체가 ‘바람’이란 뜻을 동반하고 있으며, 사람이 창조될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 코에 불어 넣으신 ‘생기’ 역시 이 단어가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사람들 위에 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것처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나타냅니다. 즉 이 바람과 불의 징조들은 지금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성경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는 진짜 성령, 예수님의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실제로 임하게 됨을 보여 준 증거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표징과 함께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충만함을 받다’라는 말은 ‘채워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성령이 그들의 심령 속에 가득 차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바로 이제부터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에 친히 내재하셔서 역사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생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시대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충만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그 바람이나 불 그 자체가 곧 성령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재했음을 명백하게 알려 주는 표징이요 증거일 뿐이었으며, 진짜 성령은 오직 그들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했던 하나님의 영일뿐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것을 무슨 환각적 상태에 몰입하고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뒤로 자빠지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하는 것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하여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 왔던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이지 성령을 무슨 ‘잡신’처럼 취급하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것을 거의 무당 신들린 경우와 별반 다름없이 여긴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영적 만행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 충만은 원래 가지고 있던 ‘내 영’을 무슨 도를 닦거나 큰 깨달음을 얻어서 발전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영’이 새롭게 우리의 심령 속에 자리 잡고 역사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새 영, 전혀 다른 차원의 영이 우리의 미련하고 교만하고 어두웠던 영을 완전히 압도해 버리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첫 성령 강림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각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내재하심으로써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바람과 불은 오직 그런 성령 충만함의 시대가 구약 성경과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대로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음을 증거해 주기 위하여 오직 그 날만 ‘단 일회적’으로 동반된 표징들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좌정하시고, 우리의 심령이 성령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 - 바로 이 진짜 성령 충만의 상태를 늘 유지하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의 반응은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장 5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에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 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처럼 사도들의 심령에 성령이 충만케 되었을 때 제일 처음으로 나타난 역사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아까 4절 하반절에서 말씀한대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도들로 하여금 「말하게」 만드셨으며, 그 때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바로 「다른 방언」이라고 했습니다.

  이 ‘다른 방언’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다른 언어들(different languages)’이란 뜻입니다. 즉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희한한 지껄임이 결코 아니라 분명한 의미가 통하는 언어, 다시 말해서 여러 종류의 ‘외국어’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5절 이하에 기록된 내용을 볼 때 더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때 오순절이란 큰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 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앗수르의 이민 정책, 바벨론 포로 시대 등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수백 년 전부터 「각 국」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9절로 11절의 말씀은 그야말로 각 나라, 당시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던 수많은 지명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또 그런 유대인의 전도를 받고 개종한 이방인들 즉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날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각 나라 사람들이 그 성령 충만함을 입은 사도들의 입을 통하여 「각각 자기의 방언」 즉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대부분 다 「갈릴리 사람」들이었고 그런 외국어를 다 알 수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 심령에 내재하신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그와 같은 각 나라 방언들로 「말하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사도들을 가리켜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한 것은, 그 사도들이 정신 나간 사람의 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도들이 말한 언어가 자기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그 말한 내용을 알아들었던 사람은 그 사도들이 각 방언으로 증거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이었다고 분명히 증거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엔 회의 같은 데서 한 나라 대표의 연설을 각 나라 말로 동시통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그 날 그런 청중들 앞에서 그런 말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오게 한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가 효과적으로 급속히 전 세계를 향하여 퍼져 나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각 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마침 예루살렘에 많이 모여 있을 때, 성령께서는 사도들의 입을 통하여 동시통역의 역사를 하심으로써 단숨에 땅 끝까지 향하는 선교 활동의 첫 테이프를 끊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날 사도들의 전도를 받았던 유대인들과 개종 이방인들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서 바로 자기 사는 곳에서 초대 교회들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던 로마 같은 곳에도 바울이 방문하기 전에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오순절 날 믿고 세례 받았던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들이 그 교회의 창립 멤버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함에 즉시 따라온 최초의 반응은 이처럼 능력있는 복음 전파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역시 성령 충만함을 입은 성도의 입에서는 이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소리가 담대하게 터져 나오게 됩니다. 자기가 틀림없이 체험한 사실에 근거한 하나님의 이 구원 역사를, 자기 자신이 분명한 정신으로 깨닫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 각 나라 사람을 향하여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되는 것이야말로 바로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작동하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 그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와 선교 사역에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야말로 성령께서 내 마음을 충동시키고 작동시키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 이름을 말하기도 부끄러워했던 내 입에서 전도가 나오기 시작하고, 전에는 기억도 하지 못했던 신학교와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후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것이야말로 성령 충만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 당연한 반응인 것입니다. 자기만 알아듣는, 아니 자기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방언’의 지껄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을 「각 나라 방언」으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복음 선포의 소리로써, 성령 충만의 효력을 발휘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는 증거는 곧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로 21절 말씀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전혀 외국어 공부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파하는 신기한 사건 앞에서 그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이 다 ‘놀라며 의혹’에 싸이게 되자, 사도 베드로가 대표로 일어나 그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선 일부 군중들이 조롱하는 것처럼 사도들이 ‘새 술이 취하여’ 그런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해명했습니다. 「때가 제 삼시니...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삼시’는 오늘날 시간으로 오전 아홉시를 가리키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 당시 대부분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고 따라서 사도들이 벌써 그 시간에 포도주 따위를 많이 마시고 취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베드로의 논리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는 그와 같은 사도들의 방언 이적을 두고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 성취된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요엘서의 말씀은 메시아의 강림을 통하여 이루어질 「말세」에 관한 예언이었습니다. 여기서의 ‘말세’란 꼭 세상 끝을 가리키는 뜻이 아니라, 신약 시대 전체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 실제적인 의미는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고 있는 바로 오늘’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신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는」 사건으로 시작된다고 예언되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바로 그 예언대로 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신약 교회 시대의 출발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성령 강림은 그 받은 자들로 하여금 「예언」을 말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됨을 뜻합니다. 실상 지금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통하여 성령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 그 자체 역시 오로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신약 교회 시대는 「하늘의 기사」와 「땅의 징조」들과 함께 임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심판날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날이 될 것이었습니다. 즉 전 신약 교회 시대를 통하여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게 되는 바로 이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멋있는 예언의 말씀을 사도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을 받았을 때, 그는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성령 강림의 사건을 설명해 주고 또 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됨을 그 많은 구약 성경 말씀 중에서 바로 이 요엘서의 예언을 이처럼 즉석에서 찾아내어 정확하고도 명백하게 그들 앞에서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율법학자도 서기관도 아니었던 베드로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진리의 영」되신 보혜사 성령께서 그 베드로의 심령에 충만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장 일어나게 되었던 실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예외가 없이, 바로 이 신구약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따르게 되는 꼭 같은 심령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역시 바로 예수님께서 예언하시고 약속하셨던 그대로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께서 당신의 하신 모든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던 대로, 이제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이 성경 한 절 한 절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읽고 읽을 때마다 그 말씀 속에서 은혜 받을 줄 아는 성도야말로 진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다가 무슨 이상한 음성을 들었다든지, 금식하다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무슨 밝은 빛을 보았다든지 하는 것이 성령 받은 증거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적도 없고, 오순절 날에 성령 받았던 성도들에게도 그런 현상은 전혀 없었습니다.

첫 성령 강림 때의 사도들과 제자들과 성도들이 체험했던 그대로, 오늘 우리들은 오직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하여 성경 말씀을 바로 깨닫게 되는 새로운 ‘계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실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성도들의 ‘맑은 정신’을 사용하셔서 ‘성경 말씀’을 똑똑히 깨닫게 하시고,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찾고 고백하게 만들고 계시는 이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결코 무슨 신들린 사람들이 광란을 부린 따위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지극히 충만한 가운데 지극히 정상적이고 질서정연한 일련의 사건들을 유발시켰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성령을 마치 무슨 ‘귀신’처럼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이것은 실수 정도가 아니라 실로 중대한 신성 모독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무엇보다도 우선 거룩하신 제3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이름을 제멋대로 정의하고 값싸게 취급하는 것은 바로 십계명의 제3계명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에 정확하게 해당되는 중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성자 하나님은 구원하셨고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바로 ‘오늘날 우리 속에서 친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충만히 내재하셔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성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게 하시며, 세상과 만민을 향하여 전파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역사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란 말을 무슨 오순절 교파의 전용물처럼 여기고 개혁주의 기독신자에게는 무언가 거북스럽거나 괴리감이 생기는 단어처럼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아니 사실상 개혁주의 신자야말로 이 ‘성령 충만’의 진짜 참 뜻을 바로 깨닫는 가운데 남보다 더욱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체험하는 성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심령에 모시는 신전 인격의 신앙생활, 말과 행실을 통하여 오직 복음 전파하는 신앙생활, 오직 성경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깨닫는 신앙생활 -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모든 택함 받은 성도의 육체에 부어 주시는’ 이 참된 성령 충만의 은혜를 늘 넘치도록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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