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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것으로 마음을 지켜라 (잠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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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집에서 기르는 소나 돼지나 개와 같은 짐승을 관찰해 보면 참 재미나는 사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흔히, 짐승은 사람보다 못하다고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짐승에게도 사람보다 탁월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짐승은 태어나서 어미의 양육을 받는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예를 들면,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제 발로 걷고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갓난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짐승은 태어난 지 일 년도 되기 전에 제 일은 제가 알아서 다 합니다. 생존을 위한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습니까? 한 살이 되면 겨우 걸음마를 배울 정도입니다. 스스로 생존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특히, 야생 동물들을 보면 생존을 위해서 얼마나 지혜롭게 행동하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혼자서 굴을 파서 보금자리를 만들고, 먹이를 찾아내고, 강한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줄도 압니다. 새끼를 낳을 때에도 의사나 간호사의 도움 없이 저 혼자서 깔끔하게 처리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짐승에게는 사람보다 탁월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좀 더 관찰해 보면, 짐승은 역시 짐승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짐승들은 타고난 본능에 따라서 살 뿐,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짐승들의 생활상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원숭이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무 위에서 살면서 열매를 따먹습니다. 곰은 여전히 굴속에서 살고, 두더지는 땅속에 굴을 파고 삽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습니까? 머리를 써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서 생활에 적용합니다.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짐승과 사람의 차이점은 전자는 이성이 없으나 후자는 이성을 갖고 있는 점입니다. 짐승은 이성이 없이 단지 본능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에게 탁월한 본능을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짐승들에게는 이성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반면에, 사람에게는 본능과 함께 이성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의 욕구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고 이성의 판단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이성은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한 이성은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성에 따라 행동하면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일 뿐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성과 더불어 감성과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위, 지(知), 정(情), 의(意)가 그것입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이나 이성에 의해서만 행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의 판단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단지 이성에 의한 결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정(情)과 자신의 것을 희생하려는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능과 지정의를 다 망라해서 다스리는 기관을 일컬어서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하는 일이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마음의 정체를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의 말과 행동이 생각의 결과이며, 생각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잠언 23장 7절에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마음은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입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몸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몸이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 점에서, 말과 행동은 생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올바로 살아가려면 생각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면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의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시대 사람들의 실상에 관해서 증언하기를 ‘…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 이었다’(5)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는 이르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생각은 마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선한 생각도, 악한 생각도 마음에서 납니다.

우리의 마음이 건강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건강한 마음에서 건강한 생각이 나오며, 그로 인해 그 사람은 온전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병든 마음에서 병든 생각이 나오고, 그 결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추하고 불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마음을 올바르게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말씀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재물을 지키기 위해 무진 애를 씁니다. 은행에 저축도 하고, 부동산에 투자도 합니다. 어느 부인이 돈이 모일 때마다 금덩이를 구입해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헌 구두 속에 넣어 신장에 쳐 박아 두었습니다. 도둑이 와서 헌 구두를 가져갈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루는 그 집 딸이 평소에 하지 않던 신발장 청소를 하면서 헌 구두들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습니다. 다행히 그 부인이 곧바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금덩이를 되찾았지만 하마터면 평생 모아둔 재산을 다 날릴 뻔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재물은 지킬 줄 알면서 마음을 지키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는 명예는 지키려고 애쓰면서 마음을 지키는 데는 무관심합니다. 정치가들은 한번 권력을 잡으면 그것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지키는 데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보다 더 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것은 마음입니다. 재물은 잃어버릴지라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명예나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도둑맞으면 치명적인 결과가 생깁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겼을 때 그만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자기 마음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탐욕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이 무방비 상태인 것을 마귀가 내버려 둘 리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제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마귀가 제 생각을 그 사람의 마음에 넣어줍니다.

그러자 유다는 마귀의 생각을 제 생각인양 여기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먹는 저주받을 행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제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결과 유다는 멸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압살롬은 권력욕이 생겼을 때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압살롬을 따르는 자들과 다윗 왕을 따르는 자들이 전쟁을 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압살롬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온갖 유혹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오늘날처럼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제멋대로인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네 하고픈 대로 하라”는 것이 이 시대의 사조가 되었습니다. 여름철에 털 장화를 신고 다니던 말든, 처녀가 군화를 신고 다니던 말든,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아도 전혀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제 하고픈 대로 하는 것이니까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저도 동감입니다.

그러나 옷 입는 것이나 신 신는 것이 아닌 도덕 윤리나 공공질서마저 저마다 하고픈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제 하고픈 대로 하면 그 자신이 자기 마음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한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온갖 탐욕과 추한 생각이 그 마음을 점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각자의 마음을 지켜서 생명의 근원이 산출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가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불기둥,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행진해 왔더니 홍해가에 다다른 것입니다. 주위는 허허벌판, 광활한 사막입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길을 잘못 든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디서 많은 배를 구해서 장정만 60만이 넘고 여자와 아이들을 합치면 200만이 넘는 거대한 군중을 태워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홍해 위로 다리라도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애굽 왕 바로가 마음이 변해서 특별병거 600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와 마병을 징발해서 추격해 왔습니다. 그들이 일으키는 뽀얀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합니다. 앞은 시퍼런 바다가 가로 놓여 있고, 주위는 끝없는 사막이요, 뒤에는 애굽의 마병들이 추격해 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또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 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절망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왜 그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울부짖은 것입니까? 왜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모세는 두려워 울부짖는 백성에게 말하기를 “13)…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처럼 큽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그리할 때 불신앙과 의심이 성도님들의 마음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현대는 경제위주의 시대입니다. 국가 간에도 군대를 동원한 전쟁보다 경제 전쟁이 더 치열합니다. 이는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돈을 버는 데 온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경제 일변도의 시대 분위기 때문에 시험을 당합니다. 마귀는 우리 귀에다 “돈부터 벌고 나서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편이 좋아”라고 속삭입니다. 마귀의 꾐에 넘어가는 것은 믿음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8)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9)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

주님께서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뒤로 미루고 재물을 추구하는 자들을 보시고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댄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에게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막 5:34)고 하셨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가나안 여자는 주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시며 거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감동하셔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혈루증 앓던 여자나 가나안 여자의 형편은 하나같이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절망이 믿음으로 무장한 그들의 마음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항상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지키심으로 어떠한 시험도 물리치고 주님의 칭찬을 듣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평강을 받아 누릴 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 염려 근심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부어 주신 결과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 26장 3절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심지가 견고하다 함은 마음이 변함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평강을 부어주셔서 그 어떤 위기 앞에서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도 이르시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평강을 받기 위해서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하였고, 또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고 하였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평강은 믿음으로 맡기고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면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이 누리는 평안의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난관을 만나서 당연히 낙심하고 기가 죽어서 다녀야 할 텐데 그렇지 않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평강은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이르기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때마다 일마다 성도님들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셔서 그 어떠한 시험 앞에서도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골 3:15).

세 번째로,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질 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망이 있을 때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수술 환자가 속히 치유되게 하려면 그에게 소망을 불어넣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하루가 다르게 치료되고 있으며,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하면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가질 때, 치료가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의사로부터 이 병은 치료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거나, 또는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해도 아무도 반겨줄 사람이 없거나, 고생스러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경우, 환자의 몸은 치료가 더디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미래에 대한 절망감을 안고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헨리. J.M. 나웬이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일 아무도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에서 자살을 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나이에 상관없이 자살자가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질병, 실직, 이혼, 파산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요약하면 희망의 상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빅터 플랭클이라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이차대전 당시에 나치 수용소에 갇혔으나 살아남았습니다. 매일 수십 명, 수백 명씩 가스 실로 보내지는 절박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끝까지 희망을 붙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이같은 일화를 들려줍니다.

그가 있었던 수용소의 죄수 대표로서 제법 알려진 작곡가 겸 희극 작가가 있었는데, 하루는 빅터 플랭클에게 조용히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저, 의사 선생, 난 당신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최근 나는 기묘한 꿈을 꾸었어요. 꿈에 어떤 음성이 들려오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무엇이나 희망이 있으면 말하라는 것이예요. …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묻는 대로 대답을 해 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무엇을 물었는지 아시오? 나는 나에게 있어 전쟁이 언제 끝나는가가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이오. 의사 선생님, 나에게 있어서 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즉 우리가 언제 수용소에서 해방될 것인가, 따라서 언제 우리는 고뇌에 찬 생활을 그만둘 것인가를 알고 싶었던 거예요.”

빅터 플랭클이 그 사람에게 “꿈을 언제 꾸었느냐”고 물었습니다. “1945년 2월이었어요”라고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꿈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조그만 목소리로 “5월 30일…”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그 사람은 희망에 넘쳐 있었습니다.

한편, 그의 꿈속의 목소리에 의해서 예언된 날짜가 자꾸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용소에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5월 중에 해방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5월 29일에 그 사람이 갑자기 고열이 나서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월 30일 즉 예언에 의하면 전쟁과 고뇌가 그에게 있어 끝나는 날에 그는 중태에 빠지기 시작해서 드디어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 사람은 5월 31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병명은 발진티푸스였습니다.

빅터 플랭클은 말하기를 “용기와 낙담, 희망과 실망, 그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에 있어 참으로 중요하다. 나의 동료는 기대하였던 해방의 시기가 맞지 않았다는 데 대한 심각한 실망이 가뜩이나 발진티푸스로 고생하던 그를 죽음에로 이끌었던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한국인들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절망 가운데 허덕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소망을 찾으려고 하면 결국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24절로 25절에는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5)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희망은 비유컨대 신기루와 같습니다. 희망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지탱시켜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은 시시각각으로 환경이나 형편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소망입니다. 세상적인 소망은 죽은 소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디도서 1장 2절에는 “영생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소망이요,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는 소망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갈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6장 19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붙잡으십시오. 그것이 성도님들의 영혼의 닻이 되어 어떠한 시련의 풍랑이 밀어닥쳐도 끄떡없이 견디게 해 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 쓰기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고 했습니다. 사도의 이 축복과 같이, 하나님의 소망이 성도님들의 마음에 충만해서 온갖 절망케 하고 낙심케 하는 세력으로부터 성도님들의 마음을 굳게 지켜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잠언 4장 23절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이 충만한 삶을 사는 비법을 일러 줍니다. 우리의 마음은 총칼로 지킬 수 없으며, 우리의 의지로 지킬 수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성도님들의 마음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강을 받아 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산 소망을 끝까지 붙드십시오. 그리할 때 믿음과 그리스도의 평강과 산 소망이 모든 불신앙과 의심, 불안과 두려움, 낙심과 절망으로부터 성도님들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님 마다 날마다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산출되는 은혜로운 삶을 영위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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