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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끗한 양선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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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우리 나라 식품을 만드는 기업가운데 ‘풀무원’이란 회사가 있습니다. ‘원경선’ 이란 분이 창설한 기업입니다. 이 사람은 신실한 크리스천으로서 한평생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지내는 농부입니다. 그는 1955년에 경기도 부천에 풀무원 농장을 만들고 전쟁고아와 오갈 데 없는 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76년 경기도 양주로 터전을 옮긴 뒤에는 ‘일용할 양식’만 남기고 나머지를 어려운 이웃에 나눠주는 일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풀무원을 방문하여 주님사랑, 자연사랑의 아름다움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우리 나라에 유기농법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입니다. 유기농법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볏짚이나 콩짚, 분뇨 등을 썩힌 유기질 비료로 토양을 재배하는 방법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공법입니다. 이런 환경사랑, 자연사랑을 인정하여 유엔환경계획은 1995년에 그에게 ‘글로벌 500’이란 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오늘날 큰 기업으로 발전한 풀무원이 최근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모 방송국에서 이 회사 제품의 녹즙이 유기농법이 아닌 농약과 비료로 만들었다고 보도한 것입니다. 풀무원 측은 진실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방송국을 상대로 법적 대응까지 불사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겠지만, 이번 일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공해, 자연산, 깨끗한 것을 끊임없이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운데 ‘양선’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 신앙에 깨끗하고 맑고 순수한 것입니다. 신앙의 열매를 생각하는 이 계절에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양선의 열매’입니다. ‘양선’이란 한문에서 보는 것처럼 ‘어질 양, 그리고 착할 선’을 가리킵니다. 어질고, 착한 마음, 선하고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사람의 대표적인 모델이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바나바’라는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24절에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성경에서 어떤 사람에게 이런 소개를 한 사람이 아마 처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바나바는 어질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선천적인지, 아니면 후천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앙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가 예수 믿고 달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어질고 착하니까 그에게 어떤 은혜와 축복이 임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중요한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착한 그의 인격과 성품으로 적어도 3가지의 결과가 임한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24절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분명치 않지만, 24절의 원문 성경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암시해 줍니다. 다시 말해 바나바가 착한 사람인 것을 시작으로 해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큰 무리가 주께 더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그의 인격에서부터 모든 것이 파생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착한 마음, 착한 사람이었던 바나바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질 때, 순수하고 선한 심정으로 설 때, 어질고 착한 사람의 모습을 가질 때, 바로 이런 사람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믿음의 충만한 영적 은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과 심령에 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그 분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염되지 않고, 더럽지 않고, 언제나 선하고 깨끗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시편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노래할 때,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선하고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노래에 이 말이 나옵니다. 시편의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가진 어떤 성품보다 선하고 인자하심이 귀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선하심이요, 그의 성품이 인자하심입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선하고, 착하고, 깨끗할 때, 하나님은 그런 자의 예배를 기뻐하시고, 그런 자에게 성령과 믿음을 충만케 채워주십니다. 그 영적인 충만한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근심과 걱정을 물리치고, 아픔과 괴로움을 극복하고,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으로 우뚝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잘 소개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상시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좋으신 하나님’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의 영어 가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God is so good, God is so good, God is so good, is so good to me”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인자하고 선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나에게 더욱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날마다 사모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견고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어질고 착한 마음을 품을 때입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심정으로 주 앞에 나갈 때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어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의 사람으로 우뚝 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사람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어질고 착하니까 자신에게만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25절과 26절에서 이것을 잘 설명합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자마자 ‘다소’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에 바울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사역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본격적으로 복음전선의 전면에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큰 영예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을 시작으로 바울은 선교역사에 가장 놀라운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 위대한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처음부터 이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바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고, 한때 좌절을 느끼며 살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감격을 경험한 뒤, 곧 바로 사람들에게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더 경계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6절에 보면, 은혜를 체험한 뒤 그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을 간증하고,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과 교제를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꿈을 품고 올라갔는데 아무도 바울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맥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혈기를 부릴 상황도 아닙니다. 이제 고개를 떨구며 쓸쓸히 예루살렘을 떠나야 하는 때, 그에게 힘과 용기를 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 힘과 용기를 얻고 다소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울은 다소에서 쓸쓸히 지내야 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뭔가 일을 해야 하고, 시간이 아까운 상황인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 시기가 바울의 생애가운데 무척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많이 울기도 하고, 많이 지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바나바가 그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같이 일하자, 함께 동역하자’하며 그를 끌고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역사의 큰 인물이 되어 간 것입니다. 바나바 없이 바울은 바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가장 지치고, 힘들 때, 가장 어렵고, 가장 낙심할 때, 바나바의 도움이 컸습니다. 바나바는 바울만 이렇게 세워 준 것이 아닙니다. 마가에게도 똑같은 힘을 주었고,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 바나바는 이처럼 사람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바나바의 선한 성품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그는 삭막한 세상에 어떻게 살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1994년 미국에서 만들어 아카데미상을 거의 휩쓴 영화가운데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도 상영되어 많은 분들이 본 것으로 압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얼마나 큰 인기가 있었는지 미국사람들이 평생 기억할 영화,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또한 보통 사람들이 영화를 한번이상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본 영화로도 유명합니다.
  이 영화는 미국의 격변기인 6-7-80년대를 살아온 한 청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극화한 희극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은 남이 자기를 놀리고 핍박해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 모를 뿐더러 '복수'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합니다. 이러한 그가 미식 축구의 영웅이 되고 탁구를 잘 쳐서 중국과의 핑퐁외교에 일조를 합니다. 그는 미국 현대사의 큰 흐름이었던 흑인인권운동, 월남전, 워터게이트, 참전 상이군인들의 애환 등 미국역사의 가장 혼란하고 아픈 현장을 모두 직접 체험합니다. 또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삶을 통해 미국사회에 아동학대, 히피문화, 마약문제, 그리고 에이즈문제까지도 모두 겪어내게 됩니다. 그가 이런 시기를 거치며 많은 훈장과 상과 재산을 얻는데 그는 이것에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그에게 아무런 가치관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이 무수한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인 문제들을 오직 한 여인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과 친구에 대한 약속을 신실히 지키는 것으로 헤쳐 나아갑니다.

  이 영화가 관객을 감동시킨 이유는 한 청년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역사의 격변기에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현명하게 사는 길은 바로 주인공과 같이 모자란다고 생각할 정도로 단순하고 순진하게, 착하게 사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대를 현명하고 올바르게 사는 방법은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순수하고 깨끗하게 사랑하고 신의를 지켜 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한 사람이 판을 칩니다. 그래서 나도 악해지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힘듭니다. 착하게 살면 좀 약해 보이고, 뭔가 모자라게 봅니다. 이런 사람은 종종 이용을 당하기가 일수입니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잘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자동차 사고가 나면 무조건 소리부터 쳐야 이긴다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에게 양선의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세상이 삭막하고, 사람이 악해도 결국 어질고 착함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사람들에게 삶의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더디 가도 바르게 가야 합니다. 양선의 삶으로 주님을 본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공동체가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의 큰 축을 이루고 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이제 안디옥교회로 중심 축이 옮겨가는 배경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예루살렘교회도 물론 중요하지만, 안디옥교회는 더욱 중요합니다. 바로 이 교회에서부터 세계선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이 교회가 어떻게 발전하고 성장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역사가 깔려 있었지만, 신실한 사역자, 바나바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스데반의 핍박이후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 교회는 그곳으로 바나바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큰 사명을 품고 안디옥에 왔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한 일은 사실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질고 착하고 순수한 성품에서 나오는 위로와 격려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권하니’ 라는 말은 위로했다는 말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잘 참자고, 주님이 곧 오시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그들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양선’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나바는 ‘위로 자’였습니다. 처음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위로하는 일을 잘 해서 사도들이 그의 이름을 바나바로 바꾸어 주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라는 뜻은 곧 ‘위로의 아들, 위로 자’ 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24절에 보면,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위로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양선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어질고 착함의 열매입니다. 이것으로 안디옥교회는 내외적으로, 양적으로 질적으로, 공동체가 크게 성장을 했습니다. 결국 13장에 가면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며 어질고 착하게 살면, 내가 속한 공동체에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가정에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가정의 사랑에서 양선이 통하지 않는다면 가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선하면 가정이 달라집니다. 분위기가 바뀝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내가 양선의 열매를 추구해 보십시오. 내가 속한 직장, 일터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성경이 거짓말하고,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 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질고 착한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교회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교회공동체만큼 민감한 곳이 없습니다. 나의 말 한마디, 나의 작은 행동이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런 예민한 곳에서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힘을 주고, 위로하면 좋은 결과에 이릅니다. 안디옥교회처럼 큰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는 자신을 향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유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무익한 사람입니까? 나는 거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통로가 되는 사람입니까? 나는 필요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는 사람입니까?

  저는 언제부터인가 바나바를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 사람처럼 살아야겠다 라고 다짐하면서 저의 영어 이름을 ‘바나바’라고 정했습니다. 여러분, 바나바는 본명이 아니라 새 이름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이름입니다. 우리 모두 바나바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어질고 착한 나의 삶을 통해 내가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해 지고,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힘과 용기를 얻고,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달라지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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