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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안에서 연합합시다 (골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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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성찬 목사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며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교회로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달입니다.

존 노에는 연합의 진리란 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서로 손을 잡고 걸어가도록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릴 때 자신이 친구들과 뜨거운 여름날의 철길 위를 걷던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철길을 걷는 방법은 침목 위로 걷거나 침목을 피해서 걷거나 철길 위로 걷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철길 위로 걸어갈 때에는 중심을 잘 잡고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데, 제대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존과 친구들은 철길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1킬로미터 이상 걸어갈 수 있는 방안을 생각했습니다. 존은 이쪽 철길 위에 서고 친구는 저쪽 철길 위에 섰습니다. 그들은 의지하며 서로의 팔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철길 위를 오래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팀웍을 이룬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분명히 증거 해줍니다.

자신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남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애쓸 때, 연합은 이루어지고 연합을 통해 교만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작은 새의 노래에서 들을 수 있다고들 합니다. 칠면조나 타조나 독수리에게서 아름다운 소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카나리아나 굴뚝새나 종달새가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만약 우리의 목소리를 합하여 하나님께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려면, 우리는 각자의 목소리를 낮추어야 합니다.(연합과 겸손)

이와 같이 연합을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아주 먼 옛날에 아주 머리가 똑똑한 쥐 한마리가 살았습니다. 이 쥐는 너무 똘똘해서 그 쥐의 형제자매들이 "큰 머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큰 머리"는 자기 형제자매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 쥐는 자기가 너무 똑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숨바꼭질 놀이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머리" 쥐와 가족들은 학교 마루바닥 아래에 살았습니다. 이곳은 "큰 머리"쥐에게 아주 안성맞춤의 장소였습니다. 하루 종일 "큰 머리"쥐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큰 머리" 쥐는 큰 말을 많이 배웠습니다. "큰 머리"는 이 큰말들을 가지고 자기형제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식사가 끝난 후 "큰 머리"는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배운 큰 말이 무엇인지 알겠니? 나는 수학, 지리, 경제...등의 말을 배웠어"라고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큰 머리"쥐가 마루에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아래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큰머리"는 자기가 배운 큰 말들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양이의 발톱이 갑자기 그 구멍 아래로 내려와 "큰 머리"쥐를 잡았습니다. 순간적으로 "큰 머리"는 사라졌습니다. "큰 머리는 하늘로 올라갔단다."라고 어미 쥐가 말했습니다. 그 옆에 있던 아빠 쥐가, "여보 헛소리 하지마, 고양이가 잡아가서 먹어 버렸어"라고 했습니다. 다른 모든 쥐들은 "큰 머리"쥐의 처지에 대하여 애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난 후 "큰 머리"쥐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다른 모든 쥐들이 "어찌된 일이니?"라고 물었습니다. "큰 머리"쥐는, "고양이가 나를 거의 다 먹어 버렸어. 그런데 고양이가 나를 막 먹어 버리려고 하는 찰라 나의 큰 말 한마디를 사용했지. 나는 고양이에게 "당신이 나를 먹으면 당신은 소화불량이 될거야" 라고 했단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소화불량?" 소화불량이 무엇인데? 라고 묻잖아! 그래서 나는 그 고양이에게 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지.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고양이는 기겁을 하면서 나를 놔 주었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형제 쥐 가운데 한마리가, "네가 돌아와서 정말 기쁘구나, 정말 기쁘다."라고 했습니다. 큰 머리 쥐도 "나도 기뻐"라고 했습니다. 큰 머리 쥐는, "나는 너희들을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이제 나는 큰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 형제들과 작은 말 `사랑'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큰머리 쥐는 "나하고 숨바꼭질 안할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것)

자신을 낮추고 함께하며 사랑으로 연합하는 모두가 됩시다.

  선한 지혜와 용기를 활용할 때 사랑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라는 영화감독의 명 작품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는 유대인들이 포로수용소에서 겪었던 참혹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잘 묘사한 영화라 합니다. 그 영화에 보면 이러한 장면이 나온다 합니다.

독일군 장교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납니다. 기지개를 켜면서 창가에 가서 창밖을 내다봅니다. 저 멀리 아래쪽에 유대인 여자 한 사람이 짐을 운반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독일군 장교는 돌아가서 장총을 가지고 나오더니 그 여인을 향하여 겨냥합니다. 그리고는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렇게 아무런 이유 없이 심심풀이로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지고 마는 곳이 바로 포로수용소라는 것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숨 막히는 포로수용소 속에서 하루는 작은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독일군이 키우고 있던 닭 한 마리가 갑자기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독일군은 범인을 색출하겠다고 유대인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본보기로 맨 앞에 있는 유대인을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그 유대인은 픽 쓰러졌습니다. 그 때 독일군인은 고함을 칩니다. "닭을 들고 다녔을 터인데, 아무도 못 봤다고? 아무도 못 봤을 리... 없어! 어떤 놈이야?  빨리 불어! 안 그러면 나올 때까지 차례로 한 사람씩 다 죽여...버리겠다!!" 모두는 공포에 질려 고개만 푹 숙이고 있습니다. 적막감만이 감돌았습니다. 그때 다시 독일군 병사가 말합니다. "그래, 아무도 못 봤단 말이지?" 그러면서 독일군 병사는 두 번째 사람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기려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나이 어린 소년 하나가 한 발자국 앞으로 자기 몸을 내밀었습니다. 이 소년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독일군 병사는 이 소년을 보자... "그래, 너냐? 네가 닭을 훔친 놈이냐?" 그때 이 소년은 담대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저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 그렇다면 누가 훔쳤는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가 누구냐?" 또 다시, 잠시 적막감이 돌았습니다. 잠시 후 이 소년은 비록 겁에는 질려 있었지만... 침착하게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바로... 저... 저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소년이 범인으로 가리킨 그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그 사람은.... 이미 총에 맞아 죽어버린....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장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지혜라고 설명들을 하기도합니다.

우리도 선한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사랑으로 연합합시다.

  정성을 쏟아 돌보는 가운데 사랑 안에서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어느 반 편성 이야기입니다. 우열반을 나누고 교장선생님이 담당 선생님에게도 비밀에 붙였습니다. 선생님들에게 모두가 우반으로 알고 열심히 하라는 말만 해주었습니다. 한 선생님이 출석부를 가지고 가서 이름을 부르는데 그 옆에 97, 98 못해야 85의 점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굉장한 수재들이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한 해 동안 열심히 사랑으로 가르쳤더니 정말 모두 90점 이상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출석부에 써 있던 것은 점수가 아니고 아이큐(IQ)였다 합니다.

사람은 그 사람을 인정 하는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의 가치가 나온다고 합니다. 사랑으로 대할 때 위대한 기적이 나온다고 합니다. 정성을 쏟고 사랑을 쏟으며 연합하는 모두가 됩시다.

  오늘 성경은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대한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안에 그 비밀이 있다는 것이고 그 십자가 자체가 비밀입니다. 그 비밀의 본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실 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그 용서를 느끼고 그 사랑을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윤 목사님 앞에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윤 목사님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 아닌 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윤 목사님은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모두 열 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전, 그 아이가 열한 살 때였지요." "......"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얼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 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 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 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 하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 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셋째, 넷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버린 아이,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던 아이,...... 다시 또 먼 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 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 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고 내다 버린 채 한 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아 ..!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애는 내가 여기 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 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 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선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 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교회로서 사랑에서 행하되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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