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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립처럼 (행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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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성찬 목사

스데반의 죽음으로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흩어진 성도들은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빌립 집사의 이방인 전도는 복음 전파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부여하신 복음 전파의 사명은 사도들 뿐만 아니라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 복음 증거의 사명이 있음을 교훈하며, 성도에게 복음 증거에 힘쓸 것을 독려해주고 있습니다.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되 빌립 집사처럼 전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에 전도하는 빌립처럼

사마리아는 역사적으로 구약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너무 많은 범죄를 자행하여 앗수르 제국에게 멸망당하여 인종 혼합 정책으로 이스라엘의 정통성과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상실하였습니다. 결국 이후로 사마리아는 남 유다 백성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빌립은 복음의 사각 지대인 사마리아에 전도했습니다.
신약 당시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개 취급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는 버려진 도시였습니다. 정녕 하나님을 떠난 백성, 하나님을 떠난 도시의 처절한 종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복음을 들고 사마리아로 가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사마리아가 땅 끝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빌립이 복음을 들고 사마리아로 찾아간 것입니다. 다른 어떤 전도자도 쉽사리 찾지 않던 복음의 소외지, 복음의 사각 지대인 사마리아를 찾아갔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갔다는 사실은 당시 교회가 이방 선교를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선교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오랫동안 서로 적대시해 왔던 것입니다.
전도자는 오히려 남들이 찾지 않는 소외된 복음의 사각 지대를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빌립은 바로 이런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전도자였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본받아 사마리아에 전도했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사마리아 전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 4:4-6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빌립의 전도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돌아왔습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사마리아 성에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복음을 받은 자는 실로 크나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동시에 인생 문제도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말로 모든 축복 중의 으뜸가는 축복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고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은 너무 많아요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클레이플 교수가 한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친구의 여동생을 보았습니다. 그 소녀는 기형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정서가 발달해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이 소녀가 전혀 어두움이 없고 너무나도 밝고 환한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내가 네 처지였다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밝은 얼굴로 바꾸어 놓았는가?”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너무 많아요. 나는 음악을 듣고 명작을 읽을 수 있는 귀와 눈이 있어요.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도 있구요.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물이 많은데 왜 내가 슬퍼해야 합니까?” 클레이플 교수는 이 소녀의 고백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하신 말씀대로 복음은 자유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이 사실을 누리며 전하는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빌립처럼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던 내용을 전했을 것으로 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내내 전파하신 메시지의 주 내용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를 '천국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3)

'전파하여'(케뤼쏜)는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나냅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원천이시며 더불어 복음의 대상이심을 알게 합니다.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또 이 복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실로 복음은 '좋은 소식' 곧 인류가 들어볼 최고의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곧 그리스도로 인한 죄 사함과 구원 및 영원한 복락을 그 주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단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와 초월적인 주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은 구약 성경에도 풍부하게 나타나 있습니
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출 15:18)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시 29:10)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사 43:15)

하나님의 왕권은 현재적 실재이어서 현재 주권으로 통치하시고, 더불어 종말적 완성적이어서 최후의 날 반대하는 세력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그 현재성과 미래성이 함께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초두에 그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십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
시더라 (막 1:15)

바알세불 논쟁 시에는 그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마 12:28;눅 11:20)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0)
예수님의 활동으로 하나님의 지배가 이 땅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 나라가 여전히 미래적임을 말씀합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1)

그 나라의 임하심이 강조됩니다.
그 나라는 공간적으로 예수 안에서, 시간적으로는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가까이 왔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가까와진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것입니다(Lane).

  하나님 나라의 의미에 대해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왕권, 통치권 혹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주권입니다(마 6:10;눅 17:21).
완전한 구원, 곧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비롯되는 모든 영적이며 물질적인 복입니다(눅 18:30).

교회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사용될 때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거의 동일합니다(마 16:18, 19).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구속받은 우주, 곧 모든 영광으로 가득 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아직 미래의 일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종적인 사역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25:34).
이 나라를 소망하며 증거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피터 마샬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샬 목사님의 임종 시간이 가까와오자 사모님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셨다 합니다.
사모님은 여기서 믿음의 용기를 얻어 “나의 남편은 목사였다”라는 책을 썼다 합니다.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녀는 계속 글을 써서 여러 권의 책을 내어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하게 되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합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늘나라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받은 영감과 감격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피터 마샬 목사님은 죽음에 대해서 그저 “갑니다. 또 만납시다.”하며 잠깐의 이별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이라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하여 영결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갔다가 다시 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요 주께서 하신 약속입니다.(인터넷정보클럽)
유교적인 나라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영생복락의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믿고 증거 합시다.

  그리스도를 전한 빌립

빌립은 우상의 도시요, 혼합 종교의 도시 사마리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메시야요,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것은 곧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3)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4)

온통 우상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도 빌립은 결코 복음을 전하되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사실, 그것이 그의 복음 전도 내용의 핵심이요, 전부였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6)

  이것이 복음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상의 도시 아덴을 갔을 때 이렇게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결코 어떤 다른 복음도 전하지 않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하셨습니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 같이 썩어지는 세상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생명의 구조선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서 뿐만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전도의 기능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움 받은 교회에서 공적 예배와 신앙 고백을 통해 신앙의 성장을 거듭한 성도는 또한 세상에 나아가 뭇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행 4:12)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배 안에서 수영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일컬어 "아르케고스"라고 불렀습니다. 배가 거친 파도를 만나 정박하기 어려울 경우, 아르케고스는 밧줄을 자기 허리에 매고 물로 뛰어들어 거친 물결을 헤치고 헤엄쳐 해변에 도착한 다음 밧줄을 단단한 바위나 나무에 붙들어 맸습니다. 그러면 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 밧줄을 붙잡고 무사히 해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르케고스"이십니다.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굵은 밧줄을 천국 도성에 붙들어 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르케고스"이신 예수께서 매어 놓은 밧줄을 부여잡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나아가기만 하면 천국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아르케고스이신 예수님 -인터넷 정보클럽)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히 12:2)신 줄 믿습니다.

  복음의 초창기에는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에게 여러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기록된 현대에는 말씀의 능력을 주시사 세상 사람들이 복음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히 4:12)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6:7)고 합니다.

  사마리아에 전도하는 빌립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빌립처럼
  그리스도를 전하는 빌립처럼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는 모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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