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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일라를 구원하라 (삼상 23: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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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남아시아 일대의 지진과 해일로 인하여 무려 25만 여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가족과 민족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손길이 분주한 이 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일라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위로가 절실한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놉땅에서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던 수많은 제사장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주의 종을 해치는 일에 에돔사람 도엑이 앞장을 선것도 우리는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에게 사단의 종들이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피신하고 있는 다윗에게 혹이 말하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침략하여 그들의 타작마당을 탈취해 간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다윗은 그런 보고를 받고나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서 블레셋 사람을 물리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윗과 함께 했던 공동체들의 집단적인 반대 의견이 문제였습니다.

3절에 보면,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는 내용은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울 군대를 피해다니기도 무서워 떨고 있는데, 어떻게 그일라에 가서 그들을 구원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훈련된 블레셋 군사들과 싸워야 하는데 오합지졸인 지금의 형편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우리 코가 석자인데 남 걱정할 여유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고민에 빠질 때가 바로 이런 때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한데 여론은 그렇지 못할 때입니다.

지금 다윗은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블레셋을 쳐서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하시고, 함께 한 공동체는 지금 우리가 유다에서 숨어 살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블레셋 사람을 치는 일이 가능하느냐며 다윗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기도의 내용은 처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가야 합니까? 아니면 말아야 합니까?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해서 안주해야 합니까?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동족의 고통에 참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약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누구 누구를 네 손에 붙이리라....." 이제 블레셋을 붙이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다윗과 공동체는 더 이상 의견이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슴에 모두가 순응하는 놀라운 단결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둘람굴에 있을 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환란을 당한 사람들이거나 빚을 진 사람들,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상처받은 사람들이기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다윗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인가 다윗에게 도움을 얻을까 하여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400명이나 되었다고 22장에 기록하였는데, 오늘 23장14절에 보니까 600명으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군식구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옛날 자식들이 많았던 시절에 생산적인 사람보다는 밥 먹는 입만 많아 하던 소리입니다. 지금 다윗의 공동체는 군식구들이 자꾸 늘어나는 중이었습니다. 혼자서도 처신하기 어려운 마당인데 자꾸 사람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굴로, 광야로 피난을 다니면서 조금씩 그들을 다듬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왕국의 없어서는 않될 일군들로 키운 줄 믿습니다. 우리가 속회에서나 선교회에서 내년을 위하여 또 다른 일군들을 양육하여 좋은 지도자로 재생산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속 양육이 일어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계속 번식이 일어나는 소 그룹이 살아있는 소 그룹이 아니겠습니까? 과거같이 단순한 관리자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양육과 재생산이 일어나는 소 그룹이 될 때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성장할 줄 믿습니다.

다윗은 모여든 이들에게 단순히 먹여주고 입혀주고 보호해 주는 것만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그들을 필요로 하실 때 쓰임받을 수 있는 재목들로 다듬어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지도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으로 그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고 하는 것이 그일라를 구원키 위해 블레셋과 전쟁을 벌였을 때 이미 드러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라고 하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에 그들이 기꺼이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헌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공동체는 분명히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을 내 손에 붙이리라고 약속해 주셨던 것처럼 다윗과 그들의 사람들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줄 믿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제 승리했느냐? 안했느냐?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블레셋을 그들의 손에 붙여 주시겠다고 하는 선포는, 결론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약속의 선포에 얼마나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협력하고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들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 찾아 주었습니다. 흔히 전쟁을 하면 돕는 자는 나중에는 침략자가 되기 쉽습니다.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군이 그랬고, 남한을 점령했던 미군이 그랬습니다. 어쨌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지 아니하면 도와주지 않습니다.

과거에 삼국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세계역사에서 이웃을 돕는 국가간에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의 공동체는 그일라를 구원해 놓고 나서 그일라사람들이 놀랍게도 다윗을 배반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다윗의 공동체가 그일라에 와 있습니다. 두 번씩이나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고발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 사람들이 정말 나를 사울에게 고발하겠습니까? 정말 이 사람들이 나를 배반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그들이 너를 사울의 손에 붙이리라. 배반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저는 그일라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정말 다윗의 은혜를 몰랐을까? 정말 그들이 다윗을 미워하거나 시기해서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우리는 22장 앞으로 가 보면서 그일라 사람들의 현실적 고민과 어려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을 도왔던 놉 땅의 제사장은 그와 그의 모든 동료들이 한 꺼번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려 85명의 제사장들이 도엑이라고 하는 에돔사람의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엑을 통해서 죽었지만, 실상은 사울왕이 죽인거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의 가족들, 생명이 있는 모든 짐승까지 모두 놉 땅에 있는 생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 이웃동네의 소식을 알고 있는 그일라 사람들로써는 지금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현실적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사울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우리 동네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군대를 동원해서 그일라를 향해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12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구합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붙일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윗과 그의 사람 6백여명은 그일라를 조용히 떠납니다. 떠나면서 은혜를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은혜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그러한 형편없는 민족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그일라를 떠나 주었습니다.

공을 세웠으나 생명의 은인이지만, 놉땅의 경우처럼 자신으로 인해서 피해를 받지 않도록 조용히 떠나는 다윗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우리 정부도 개혁을 해보려고 하면, 아마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고 개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정부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늘 고민하고 호소하는 것은 개혁을 하는데 가장 큰 저항세력은 기득권세력이라는 것이지요.

바뀌면 손해 보는 사람, 끊임없이 데모하고 시위하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는 수십년동안 보아왔습니다. 다윗에게도 기득권이 있었습니다. 자기와 자기의 공동체가 생명을 다해서 위협을 다해서,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선한 사역을 위해서 그들은 그일라를 위해서 싸웠습니다. 훈련된 군사들도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음을 다해서 블레셋 군사들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하지만 그일라를 위해서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살아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기득권을 주장하기 시작할 때, 그 공동체는 이미 죽어가기 시작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올해로 2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감사하게도 3월13일이 주일입니다. 3월13일 주일부터 창립22주년 축복성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22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의 씨를 뿌렸습니다. 기도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들의 재산과 정성과 시간을 이 제단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땅을 사고, 건축을 하고 그들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다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이 벽돌 하나 하나를 보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열심히 일합니다. 회장도 되고, 지도자도 됩니다. 먼저 와서 헌신의 땀을 뿌리고, 희생의 눈물을 뿌린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늦게 온 사람들이 설치고 다니네. 누가 다 해 놓은건데... 만약에 그런 마음이 든다면, 그런 마음이 든 순간부터 그는 이미 죽어가는 것입니다.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의 마음에서 움트기 시작하면서 이미 그는 건강한 성도의 자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깊은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세웠는데, 이것을 누가 건축 했는데, 이것을 누가 이루었는데 이런 기득권을 주장하는 우리의 생각들이 교회가 하나 되는 일에서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그일라를 위해서 생명을 다해서 고통 중에서, 위험 중에서도 그들을 위해서 싸웠지만, 자신과 자신의 집단에 이익을 위해서 살지 않고, 평화를 위해서 결단한 다윗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생각해 보면 다윗은 굉장히 그릇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그일라에 얼마의 양떼, 얼마의 땅, 얼마의 기득권, 얼마의 통치에 대한 이런 것들을 차지하는 것보다 그는 더 큰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다윗을 선택한 줄 믿습니다. 화평케 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임이라.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땅을 위해서 화평케 할 사람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지난 주에 조금 마음 상한 뉴스를 들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쓰나미 해일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그런 이야기로 많은 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실망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 죄송하다고 생각을 하고, 그럴 수 없다고 하는 정정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것은 12월26일이고,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성탄절에 휴양지에 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희생자의 1/3은 어린아이들입니다. 그 희생지역의 대부분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기독교를 극한적으로 박해하는 지역이기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도 믿음을 지키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 함께 하시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뜻을 언제나 그들 중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신다고 하는 우주적인 신앙관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들의 가정의 고통과 그들의 나라의 고통을 우리는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 감리교에서도 수 많은 그런 후원비를 보내고, 우리 중부연회 웨슬리사회봉사단이 의료진들과 더불어서 가장 피해가 많은 인도네시아 아체지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헌금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곳에는 우리가 믿음과 불신을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사랑은 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그일라에 있는 사람들도 너희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존재냐고 하는 계산적인 차원에서 다윗의 공동체가 그들을 도우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오히려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서 다윗을 고발했지만,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현실적 선택을 이해하면서 다윗의 공동체는 말없이 그일라를 떠나가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때때로 주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늘 손해만 보는 것 아니냐는 그런 손해의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대라고 할 때에 우리는 늘 예수 믿어서 언제 권리 한 번 주장해 볼 수 있느냐고 그렇게 하소연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줄 믿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누릴 줄로 믿습니다. 손해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크고, 보다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 사울은 오늘 또 군대를 동원해서 매일 다윗을 찾았지만,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이 도우시면 사람이 어찌하겠습니까? 군대가 어찌하겠습니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시편 121: 5- 8절을 저는 오늘 결론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에서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의 뜻을 따라 그일라를 구원하러 가는 주님의 명령에 언제나 순응할 수 있는 믿음의 삶들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으나 선한 사역에 힘쓰기를 기뻐했던 다윗의 공동체를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인도함을 구하는 다윗의 겸손한 모습을 바라봅니다. 사람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에게 충돌할 때에 다시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다윗의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주님,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살게 하옵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하옵소서. 때때로 내게 기득권이 주어지나 겸손히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순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일에 보람을 갖고 생명을 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었으니 이 땅 어떤 것에도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욕심을 내지 않도록 하나님 저희들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넉넉한 마음으로 주의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향해 다가가며 필요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 발길이 되게 하옵소서. 능력전도로 영혼을 구원하며 지역봉사로 주의 손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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