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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 (행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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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

세상에 있는 많은 교회들 가운데 좋은 소문이 나서 크게 부흥되는 교회와 좋지 못한 소문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올해 우리교회가 참 좋은 소문이 있을 뿐 아니라 좋은 소문으로 인하여 크게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보면 2차전도 여행을 나선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바울 일행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그 거리는 160Km나 됩니다. 400리입니다. 하루에 100리씩 걸어도 나흘이나 걸립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을 때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사역할 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행17:2-3)증거 했습니다. 그 전도의 영향으로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들과 도시의 몇몇 사람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바울의 일행을 찾아 다녔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야손의 집에 있다는 정보를 받고 그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야손과 그 형제를 끌고 읍장 앞에서 소리 질렀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여기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당시에 붙여진 악명이었지만 우리에게 주는 도전적인 상징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이런 영향을 주었는데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들은 신앙의 고백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자 응답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고백이 분명했습니다. 복음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능력은 어떤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3절의 말씀을 함께 봅니다. “뜻을 풀어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의 메시지는 분명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선언을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시며 우리의 지금부터 영원까지 인도 하시는 분 . . . . .

바울이 가는 곳에는 그들의 선언과 고백이 분명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2절을 보면“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 . .”
그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 복음을 순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확신은 무서운 것입니다. 사단이 두려워 할 정도입니다. 사단도 압니다. 막아야 할 신앙과 내 버려둬도 될 신앙을 압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신앙은 타오르는 불과같았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온 시내가 복음화 될 만한 열기였습니다.
신앙은 기본이 중요합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기는 바로 신앙의 고백입니다.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힘은 놀라운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베드로는 신앙의 고백 때문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16:16절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칭찬을 받는 것입니까? 무슨 일을 잘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재주가 많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것을 좋아 하십니다.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회색주의자는 위험합니다. 남북전쟁 당시 한 남자가 남과 북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충정심도 둘로 나뉘어져 남군과 북군 모두를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한참을 고심한 끝에 전쟁에서 살아남을 기발한 생각을 해 냈습니다. “그래, 아래는 남부 연합군의 회색 바지를 입고 위에는 북군의 푸른색 윗도리를 입어야지.” 그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북군의 병사들은 그가 입고 있는 회색 바지를 향해 총을 쏘아대고 남군 병사는 윗도리를 향해 사격을 가해 오는 것입니다. 그를 돕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날 마귀가 성도를 무너뜨리는 무기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믿음의 생활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적당주의는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위험입니다.
이 적당주의는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하여 있습니다. 커닝해서라도 성적을 얻으려 하고 적당하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성공 할려는 생각들이 가득합니다.
신앙도 적당히 하려합니다. 적당하게 믿음의 생활을 하면 되는 것이지 깊이 빠지면 절대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일도 적당하게 지키고, 기도도 적당하게, 헌금생활도 적당하게만 해서 체면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봉사도, 헌신도 적당히 . . .이것이 마귀가 성도들을 향하여 내미는 협상카드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그럴듯하게 유혹합니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적당하게 하면 되는 것이지 언제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사단은 신앙의 모양만 가지고 있으면 되지 열광주의자가 되지는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창조적 소수의 힘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입니다. 두 사람에 의해서 시작합니다. 진리는 수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더 좋고 작은 것보다 큰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크고 작은 것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수가 많아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오늘도 일하십니다. 수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창조적 소수에 해당합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80/20의 원리가 적용되는 세상입니다. 이 말은 즉, 소수의 집단이 한 사회나 조직의 실질적인 부와 권리를 독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법칙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100년전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였습니다. 그는 벌써 100년 전에 부의 80%를 전체 인구 20%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이 법칙은 오래 전 부처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백화점 매출의 80%는 20%의 고객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학교 시험 문제의 80%는 전체 시험 범위의 20%에서 출제된다고 합니다. 전체 이혼자의 20%가 전체 이혼의 80%을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번 이혼한 사람이 2번, 3번의 이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또 20%의 사람들이 80%의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20%의 사람들이 80%의 사람들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20%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새 바람을 일으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의 소수인 그리스도인들이 효과적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질적인 수준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작은 누룩이 되어라’ 이 작은 누룩 한움큼의 누룩이 가루서말 전체를 부풀리게 하는 것처럼 가루 서말 속의 한 움큼의 누룩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전국민의 1/4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적어도 4명중의 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4명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인라고 한다면 적어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주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건만 사회나 일터에 그리고 지역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오히려 교회가 사회에 동화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며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지도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부끄러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도시가 그 마을이 바뀌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3. 복음의 능력

살전1: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은 찾는 듯한 심정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의 기본이 잘되어 있는 사람들은 환란의 때에도 든든한 믿음위에 살았습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환란 중에도 기쁨으로 도를 받았습니다. 그 환란이, 환란의 환경이 성도들의 마음을, 신앙의 자세를 변질 시키지 못했습니다. 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때 단순한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파되었다고 말합니다.

살전1:5“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재능, 주장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뢰하고 복음을 전했을 때 말씀을 듣는 사람들 편에서도 사람의 말이나 지식의 가르침으로 듣지 아니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으로 말씀을 받으면서 복음이 전파 될 때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를 뒤집든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머문 기간은 본문에서는 “세 안식일”입니다. 세 안식일이면 3주간입니다. 한 달 이 되지 못합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집회를 한 것은 3주간이지만 실제는 그보다 오래 머물었을 것이라는 추축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어야 1년도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울의 일행은 영향력 있는 역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복음이 그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롬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엄청나게 강한 빛 속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행 9:4-6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사울은 완전히 바뀝니다. 사울(큰자)이 바울(작은자)로 변화됩니다. 이제부터 복음의 사람이 됩니다. 이때부터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 .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복음이 아니고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로마에 들어갔을 때 로마의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로마는 태양신을 섬기고 태양신을 가장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들어가자 로마의 모든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로마가 결국 기독교로 국교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은 자신의 학설을 더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남태평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남양군도에서 미개한 식인종들을 접하고 그들을 보면서 찰스 다윈은 원숭이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인으로 이 원시인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옷도 입지 않고 있었고 집도 짓지 않고 살았고 정말 원숭이와 별 차이가 없을 만큼 아주 형편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4년이 지난 후에 이 찰스 다윈이 다시 남양군도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34년 전에 왔을 때 없었던 집이 지어져 있었고, 그 원시인들이 옷을 입고 있었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그들이 찬송을 하고 있었고, 그들이 글을 읽고 있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사실을 확인해 보니까 ‘패톤’이라는 한 선교사가 그 후에 들어와서 그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남양군도에 원시인들이 옷을 입고 집을 짓고 식생활이 달라지고 삶의 모습이 달라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찰스 다윈이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 패톤선교사를 파송한 선교단체에 엄청난 액수의 기부금을 내어놓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찰스다윈은 그의 말년에 자신이 젊었을 때 빚어내었던 황당무계함을 한스러워했다. 그는 임종을 눈앞에 두고 병으로 시달리면서도 성경을 읽으면서 늘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대었다고 합니다. “성결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비할데 없는 구주여!” 당시에 호프 부인이 증언을 통해 들어 보면 “다윈은 임종이 되어 많은 후회를 했어요. 자신이 주장했던 진화론은 어린 시절 무지할 때의 추측과 공상이었다고 자인했고, 자신의 책이 불길처럼 번져서 세상 사람들이 진화론을 하나의 종교로 여기게 될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어요”

오늘도 복음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복음은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복음은 새롭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가 오늘 우리마음에 여러분들의 가정에 직장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4. 거룩한 소동

복음이 전해 질 때 소동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소동하기를 잘합니다. 조그마한 일만 있으면 큰 일이 일어날까봐 소동합니다. 벌벌 떱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왔다가 유대의 왕으로 으로 오신 그 분이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을 때 소동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의 자리가 뺏길까 봐 입니다.
경제가 안 좋고 물가가 오르고 남북의 관계가 안 좋으면 금방 사재기를 하고 소동이 일어납니다. 라면이 다 떨어집니다. 설탕도 다 떨어지고, 미숫가루도 . . .전쟁이 일어날까봐. . . 21세기에 들어선 것도 얼마 되지 않는데 지구상에도 소란스런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9.11테러사건, 이라크 전쟁, 핵문제, 탄핵문제, 만두소동, 서남아 지진해일 피해 . . .등 소란한 일들이 국내외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은 언제나 조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망난이가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기쁨과 감격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떠들썩하였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 마다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사람을 바꾸지만 사람을 바꾸는 일에는 엄청난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변화라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변화가 일어날려면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과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과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날려면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을 이길 힘이 없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조용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복음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발하는 것이고 그때 어둠은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벌레 같은 곤충들은 빛이 들어오면 도망하기 빠쁩니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그 벌레들은 소동이 일어납니다. 막 --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죽이는 줄 알고 . .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만해도 우리나라는 참 소란 했습니다.
나라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부터 거룩한 소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감동의 진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 자녀들로 말미암아 부모님들에게 거룩한 감동의 사건들이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삶의 변화 없이는 안됩니다. 입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여러분들의 직장에, 여러분들의 사업장에, 성령의 바람에 의한 변화의 역사로 인한 거룩한 소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요즘 신바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신바람 학습방법, 신바람 노래교실, 신바람 전도법(황수관 박사), 신바람 건강 비결, 신바람경영, 신바람 인생, 신바람 성공비결 . . .
우리말에 ‘신바람’이라는 말은 ‘신령’에 지펴서 뜨겁게 달뜬 마음이나 흥분한 감정 같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신바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바람은 성령의 바람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바람은 성령(神)의 바람에 의한 힘입니다.
금년 우리의 신앙은 적당주의를 이기는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우리의 신앙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며 전도하는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우리의 신앙은 분명한 신앙의 고백을 확립하여 강하고 든든한 신앙위에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우리의 신앙으로 가정마다 직장마다 우리의 주변마다 거룩한 소동을 일으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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