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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자답게 강건하라 (고전 16: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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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관지 목사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를 끝맺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권면, 추천, 문안, 교훈, 축복, 이와 같은 내용으로 고린도전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 편지 내용을 불러주고 다른 사람이 받아쓰는 일이 많았습니다.
눈이 나빴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자기가 직접 썼습니다.
21절을 보세요.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고 여겨져서 그렇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부분을 시작하는 13절과 14절은 짧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네 가지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깨어라,
둘째, 믿음에 굳게 서라,
셋째, 남자답게 강건하라,
넷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입니다.

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남자답게 강건하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교훈은 고린도전서 전체의 결론입니다.
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남자답게 강건하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은  영적ㆍ도덕적ㆍ사상적으로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교훈이었습니다.
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남자답게 강건하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은 세속주의의 물결에 흔들리며 영적인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한 교훈입니다.

깨어라, 이 말은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긴장하는 말입니다.
일시적으로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긴장하라는 말입니다. 
깨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밥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5장 8절과 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깨어라, 이 말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재림에 대비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재림에 대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24: 42~43)

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든 관심이 재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재림에 대해 너무 민감해서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재림에 대해 너무 민감했던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면 현대교회는 재림에 대해 너무 둔감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향해 바울은 ‘깨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22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주님 오시지 말거나, 오시려면 내가 준비가 다 된 뒤에 오시옵소서.’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오지 않으시거나 더디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 ‘내가 준비가 다 된 뒤에 오시옵소서’ 하는 사람은 영원히 준비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를 아람말로 하면 ‘마라나 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마란 아타’ 이렇게 읽으면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 이런 뜻이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인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오신 것으로 여기고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본문밖에 난외주에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잠자고 있지 않습니까?
깨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굳게 서라, 성도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알기 쉬운 것 같지만 사실은 깊이 헤아려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려고 힘쓸 때 비로소 온전하게 깨달아지는 말입니다.

이번 주일 남자속회 공과의 제목이 ‘믿음 지킨 사람들’인데 결론 부분에서 ‘믿음이 무엇입니까?’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지하고 맡기고 따라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의지하고 맡기고 따라가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라, 이 말은 뿌리를 그리스도 안에, 굳게 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뿌리는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굳게 두었습니까?
나무가 성장이 부진하거나 시들 때 그 원인을 찾아보면 뿌리가 약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를 그리스도 안에, 굳게 두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굳게 서는 성도는 미혹되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랑은 성도들의 삶의 출발이요 완성입니다.
우리는 집에 들어갈 때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집에서 나올 때 열쇠로 문을 잠급니다.
사랑은 이 열쇠입니다.
요즘은 카드 만능시대가 되어서 카드로 문을 열고, 카드로 문을 잠그고, 카드로 다른 일들도 합니다.
사랑은 바로 이 카드입니다.
카드는 때로는 카드 빚과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사랑이라는 카드는 부작용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갈등과 마찰이 많았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사사건건 의견이 달랐습니다.
시장에 나온 고기들이 대부분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인데 이것을 먹어도 좋으냐, 먹지 말아야하느냐,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무엇이냐, 예배 드릴 때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하느냐, 쓰지 말아야 하느냐, 달랐습니다.
성찬식을 하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것인데 성찬에 대한 의견도 달랐습니다.
그러니까 성찬식이 하나가 되는 자리가 아니라 여럿으로 갈라지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 때는 먹고 마실 것을 집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에서 빈부의 격차가 나타나서 성찬식이 끼리끼리 모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찬가를 소리 높여 부르고, 끝에 와서 다시 한 번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새롭게 깨달으면 새롭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찬송가 493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이 찬송은 1절에서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라고 하고 3절에서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사랑,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깨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오늘 본문에는 ‘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남자답게 강건하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네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왜 ‘남자답게 강건하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까?‘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말씀을 정확하게 보는 분입니다.

이제부터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와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안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밖에도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우선 고린도는 대단히 방탕한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방탕한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작년에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고대 에베소에도 사창가, 요즘 말로 하면 집창촌이 있었던 자취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집창촌 앞에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길바닥에 발 모양을 파 놓았습니다.
‘발이 여기 이 발보다 작은 사람은 여기 들어가지 못한다.’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성년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이런 것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고린도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으로 방탕한 도시였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를 멸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번쩍 뜨이는 것, 표적이 있어야 하는데 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지 않느냐? 이것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거리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가 제일인데 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지 않느냐? 이들이 말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과 23절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라는 말은 이런 형편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한 일은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비방했습니다.(행18: 6)
한 걸음 더 나가서 바울을 총독에게 고소했습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행18: 13)는 죄목으로 고소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 소소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총독은 ‘이것은 너희 내부 문제이니 나는 이런 문제는 다루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로마 당국은 처음에는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파인 줄 알고 간섭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고소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습니다. 회당장 소스데네는 그 때는 바울을 고소하는 사람들의 대변자 격이었는데 재판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당신,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는 거야!’ 하면서 때렸던 것 같습니다.
이 소스데네는 나중에 예수를 잘 믿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절을 보면 소스데네라는 이름이 다시 한 번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소스데네가 바로 그 소스데네와 같은 인물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회당장 소스데네는 고린도에서는 바울을 고소하는데 앞장섰으나 뒤에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미련하다, 어리석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는 복음이 가진 힘입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바울은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남자답게 강건한 믿음과 태도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한국교회는 여성화되어 간다는 말을 듣습니다.
여성화되어간다는 것은 여자 성도들이 남자보다 많다는 뜻도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약해 간다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노령화, 여성화 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는 젊어져야 하고 남성적이 되어야 합니다.
강하고 담대해져야 합니다.
미국 교회에서 이런 필요성을 느끼고 프로미스 키퍼스(Promise Keepers)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습니다. 프로미스 키퍼스, ‘약속을 지키는 남자들’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느 축구 코치였던 분이 이 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운동이 한국에도 들어왔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남자답게 강건하라,”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남자답게 강건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약해 보이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잡으러 왔을 때 대항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하게 체포당했습니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남자답게 강건한 분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7절과 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은 ‘선한 사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용감한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님은 더 용감한 분, 남자답게 강건하게 행하신 분이다.’ 이렇게 삼단논법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신앙생활하기가 조금 자유로워졌습니다만 예전에는 중국에서는 예수를 믿으려면 박해 받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조금 자유로워진 것이지 아주 자유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중국의 한 성도에게 누가 ‘예수님의 어떤 점이 당신의 마음을 끌기에 당신은 이렇게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 중국 성도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남자다운 모습 때문입니다. 동족의 비난소리와 종교인들의 증오와 종교지도자들의  핍박과 제자들의 배신과 심지어 가족들의 오해 속에서도 끄덕도 하지 않으시며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혼자서 십자가를 향해 앞만 보고 걸어가시던 남자다운 모습이 저의 마음을 끌기 때문입니다.

이 중국 성도는 예수님을 바로 본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바로 보고, 그 안에서 남자다운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답게 강건하라”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이와 같은 교훈들이 스며 있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어딘지 모르게 약해 보입니다.
여기서 동행한다는 것은 그냥 같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짐을 지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에서 식민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런 법을 만들러 놓았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니체라는 철학자는 기독교는 약자의 종교라고 했고 노예의 도덕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저는 작년 이 맘 때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38: 3) 하신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김인서(金麟瑞: 1894~1964)목사님의 이야기를 한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은 신학교를 나와서 장로로 오래 계시다가 환갑이 넘어서 목사가 된 분입니다. 그래서 이 분을 김인서 장로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김인서 목사님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이 분은 한국교회의 문서선교운동에 많은 공을 쌓은 분입니다.
그 일을 기념해서 지금 연세대학교에서 매년 이 분을 기념하는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김인서 목사님은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삼일운동 뒤에도 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1920년에 체포당해 4년 동안 옥고를 겪었습니다.
같은 감방에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윤병구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김인서 장로님을 보고 이렇게 비난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했는데 그따위로 해 가지고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겠소? 폭력을 쓰는 자에게는 폭력으로, 무력을 쓰는 자에게는 무력으로 맞서야할 것이 아니오?’
김인서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뺨을 치는 자에게 마주 대하여 그의 뺨을 치는 것은 혈기의 용맹이요, 필부의 용기일 뿐입니다. 또 한 사람밖에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거룩한 용기요, 만인을 감복하게 하는 큰 용기요, 영적인 용기입니다

윤병구씨는 이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거룩한 용기, 큰 용기, 영적 용기를 가르칩니다.
여러분 거룩한 용기, 큰 용기, 영적인 용기를 가진 성도, 남자답게 강건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작년에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밀란의 주교였던 암부로시우스 감독(Ambrose of Milan 339~397)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분은 수많은 찬송가를 작곡해서 ‘찬송가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이 분도 남자답게 강건한 지도력을 가진 성직자였습니다.
당시 황후가 밀란에 있는 교회 하나를 자기에게 양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황후의 이름은 유스타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녔다고 정통교리인 양성론을 주장하는 아다나시우스 파와 예수님은 인성을 지녔다고 단성론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 파를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그 세력은 여전히 강했습니다.
유스타나 황후는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 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암부로시우스 주교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교회를 이단에게 넘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당시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Ⅰthe Great 346~395)라는 황제가 있었는데 훌륭한 황제였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좀 과격했던지 데살로니가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7천 명을 살해하였습니다.
이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란에 와서 암부로시우스 주교가 집례하는 성찬식에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암부로시우스는 황제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황제여, 데살로니가 시민들의 무고한 피가  흐르고 있는 손을 가지고 이 곳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면서 회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와 같은 말에 자기의 죄를 뉘우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교다운 주교는 오직 암부로시우스뿐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밀란 주민들이 많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상대방에서는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암부로시우스 주교는 금 성찬기들을 팔아 그 몸값을 지불하고 주민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비난하자 암부로시우스 주교는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피를 흘리고 구원하신 영혼들은 주님의 피를 담는 그릇들보다 훨씬 고귀합니다.’
남자답게 강건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비난받을 것을 알면서도 암부로시우스 주교처럼 확실한 믿음의 소신 위에 따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암부로시우스 주교는 남자답게 강건한 사람,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이런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남자답게 강건하라” 이 말은 특히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 헤브론 왕 호함, 아르못 왕 비람, 라시스 왕 야비아, 에글론 왕 드빌, 이 다섯 왕의 연합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가 외친 말이 있지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수10: 12) 

태양이 떠 있어야 적을 끝까지 무찌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을 정복하고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태양과 달아, 너희도 이 일에 협력해야 한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외친 것입니다.
여러분, ‘태양아 머무르라!’ 할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 남자다운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수10: 25)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다섯 왕을 모두 무찌른 것을 말합니다.

히스기야 왕 때 천하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위기 가운데 위기였지요. 유다 왕 히스기야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 32: 7~8)

하나님은 앗수르 왕 산헤립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운 문제와 싸우고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답게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자신을 향해 ‘나는 과연 남자답게 강건한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다고 여겨지면 남자답게 강건한 성도들이 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외부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남자답게 강건한 모습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포장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이라는 포장지는 화려해 보이지 않더라도 사람을 가장 감동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포장지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다운 강건함을 가지고,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며, 어려운 일이 많은 이 시대를 이기며 앞으로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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