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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 어떻게 할 것인가? (막 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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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어떤 일이 내게 주어졌을 때, 그것은 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중국 북방 국경지대에 한 노인이 살았는데, 어느 날 그가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전화위복이라는 말처럼 오히려 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그 말이 많은 말들을 이끌고 국경을 다시 넘어오자 이웃들은 축하하였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글쎄요. 이것이 화근이 될지 누가 압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그만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노인을 위로하자 그는 “도리어 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1년 후, 적군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자 건강한 청년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절름발이이기에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새옹지마 혹은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겪는 모든 일은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는 셈입니다. 좋은 것이 오히려 나빠질 수 있고, 나쁜 것이 좋아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개구리 가족이 길을 건너다가 그만 새끼 개구리가 트럭 바퀴가 지난 후에 생긴 웅덩이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빠 개구리, 엄마 개구리가 돕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새끼 개구리는 아무리 폴짝거리며 뛰어보았지만 역시 빠져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때, 트럭 한 대가 달려왔습니다. 어미 개구리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힘껏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새끼 개구리가 차에 치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슬픈 마음으로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새끼 개구리는 어미 개구리보다 더 멀리 도망쳐 있었습니다. 트럭이 달려온 것은 더 악조건이지만, 그 악조건이 있는 힘을 다해 뛰게 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사람이 형성하는데 큰 작용을 합니다.
그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우는 겁니다.
체면치레의 삶이 강합니다. 속담에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벼룩이 한 마리 전체도 보일까 말까 하는데, 거기에 무슨 재간으로 낯짝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랬습니다. 그 벼룩이에게서도 낯짝을 찾았습니다.
양반은 “비가 와도 뛰지 않는다.” “물만 마시고도 이 쑤신다.”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 등등.
말하자면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위선자의 모습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찬 사람”(마 23:25)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마 23:27)
“자신들은 예언자들을 죽여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을 핍박해서 기념비를 꾸미면서도, ‘내가 우리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마 23:29)
이것이 위선자들의 모습인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들을 의식하지 말고, 자기 멋대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해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보이기 위한 체면치레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 앞에서 내가 해야 할 바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 하나,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여럿이 있을 때는 강하게 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약하게 합니다. 무리를 지어 ‘와, 와’ 할 때는 뭔가 큰일이라도 해낼 것 같은데, 막상 혼자가 되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혼자 있기를 싫어합니다. 혼자 있으면 괜히 불안해 지고, 별의별 쓸 데 없는 생각을 다 합니다. 누구라도 같이 있으면 떠들고 그러면서 굉장히 강한 사람인 척 합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면서, 사람들 앞에서만 서면 큰소리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노아는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조롱했겠지요.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상식 이하의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방주가 다 지어졌을 때 홍수가 났습니다. 모든 것이 다 물 속에 잠겼습니다. 홍수가 지나고 물이 빠진 뒤, 노아의 방주는 터키의 북단 아라랏 산에 멈추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다시 흙냄새를 맡으며 땅 위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살아났다는 것도 노아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첫 농사에서 노아는 많은 포도를 수확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실컷 마셨습니다. 곤드레만드레가 되어서 벌거벗은 채 정신을 잃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 왜 노아는 그토록 감격스러운 첫 농사의 열매를 취하는 데 써버렸을까? 40주야 폭우가 쏟아져서 높은 산까지 물이 가득하게 되어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는 없을 지경에서도 굳굳하게 살아남은 노아가 어째서 그렇게도 쉬운 잠자리 하나 얌전하게 다듬지 못했을까?
그것은 살아남았다고 하는 기쁨 때문이라기보다, 농사를 지어 수확했다고 하는 기쁨 때문이라기보다, 더불어 사는 삶에서 혼자 남았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삶에서 혼자 남아있다고 하는 것은 가혹한 형벌일 수도 있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롯은 산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딸들이 준 술을 먹고 취했습니다. 딸들이 들어와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도록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도 모르고 잠들 정도로 취해있었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는 그 몸서리치는 현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롯이 어떻게 술에 취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노아와 같은 모습으로 보는 겁니다. 이웃과 동족, 심지어 아내까지 다 죽어버린 그 가운데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그 사실이 롯으로 하여금 취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멋지게 승리한 엘리야.
그런데 그가, 자기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대의 브엘세바로 갔고, 그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 들어가,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 죽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갈멜산에서의 늘름하던 그 엘리야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왜 엘리야는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달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홀로 남았다는 겁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이때의 엘리야를 심한 우울증에 걸린 상태라고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 다 죽고 나만 살아남았으면 참으로 신나고 멋진 삶이 될 것 같지만,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고통이요, 불안이요, 두려움이 되는 겁니다.
대체적으로 우리가 맞이하는 위기는 밖에서 즉 환경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환경이 좋아지면서, 사람이 당하는 위기는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나 혼자라는 의식이 지배할 때입니다.
지하철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을 선로 밑으로 밀었습니다. 지하철에 불을 질렀습니다. 괜히 길 가는 사람을 끌고 가서 두들기고 죽입니다.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대부분 혼자라는 의식이 그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겁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자신의 속에서 만들어지는 불안, 두려움, 공포, 우울증 등등이 현대인의 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위기를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약물로도 안 됩니다. 환경을 바꾸어주면 조금 나아질 수 있지만 근본적인 치유는 안 됩니다. 환경에서 오는 위기는 환경을 바꾸어주면 됩니다. 돈이 없어 불안하고 두렵고 우울한 사람은 돈이 생기면 말끔히 나아집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부터 생겨나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우울한 감정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상상외 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이 없는 기도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예수님의 기도가 가당키나 한 겁니까?
예수님은 평소 당신이 죽으면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죽음이 뭐가 두렵습니까? 죽으면 오히려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실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그분이,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는 뭐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는 기도는 다 무언가 말입니다.
“너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으면서 당신은 그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식의 기도는 뭡니까?
그런데 그렇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 중 아브라함은 낮선 땅을 향해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습니다. 뒤늦게 얻은 아들을 번제로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햇습니다. 모세는 궁 안의 권력을 가지고 그냥 살아야 하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이 권세를 버려야 하나? 갈등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5-37절에, 믿음의 사람들은 고문당하고,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에 얻어맞고,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죽고, 톱질 당하거나 칼에 맞아 죽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 다녔고, 가난과 학대와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합니다.
예수님은 찾았던 부자 청년 역시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내가 가진 소유를 그냥 지킬 것인가? 갈등했습니다.
어쩌면 신앙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갈등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신앙이 없어서 그런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들은 이런 갈등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 그들이 그들의 소유 심지어 생명까지 버리고 하나님을 따를 때, 내 뜻이냐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서서, “주여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던 베드로의 말씀도 역시 갈등에서 나온 것입니다.
서로 높아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높아지려면 낮아지라고, 섬김 받기 보다는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역시 그들에게는 갈등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있는 겁니다.
산다고 하는 것 자체가 갈등 입니다.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신앙 전체가 갈등입니다. “주님의 뜻이냐? 내 뜻이냐?”
그런데 이 갈등이 또한 위기라는 겁니다. 이 갈등이 위험한 순간이기도하지만 좋은 기회이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 갈등에서 내가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 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내가 더 큰 위험이 되기도 하고 내게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거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거다.” 물론 그리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생각으로 사는 게 편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론자들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어차피 내 팔자대로 산다.”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자기의 삶을 자기가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적어도 인생의 삶에서 성공하거나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예수님의 고민입니다. 사실 십자가 안 지면 편안 합니다. 고통은 없는 겁니다. 더 오래 살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예수님께서 그것을 택하셨다면, 그분은 정말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되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그 짠맛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빛이 그 빛을 잃어버려 어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입니다. 그것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 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 아들을 과연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가? 하는 이것은 보통 큰 괴로움이 아닙니다. 엄청난 아픔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경우 아들을 죽이지 않기를 원하고 어떻게든 그 아들이 죽지 않았을 때 승리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하여 그 아들을 불태울 나뭇단 위에 올려놓고, 그 아들의 배를 가르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드는 더 큰 아픔을 택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승리했다고 말합니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의 승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민 안에서 더 큰 고민을 짊어지는 것이 신앙의 승리로 나타납니다.
최근 이혼율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것도 젊은이들 사이에 심지어 신혼여행 가방을 든 채로 이혼법정을 찾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사랑해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느냐”는 겁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함은 고민이 시작입니다. 더구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소유 할 수 없는 사랑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 고민은 큽니다. 괴로움은 큽니다. 그래서 갈등도 큽니다. 그래서 “에이 이럴 바에는 그만 두자.” 그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이건 소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야 죽던 말든 (어차피 지들 죄 때문에 죽는 거니까) 내가 왜 대신 죽느냐 그리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류를 살리기 위해 더 큰 고민과 더 큰 아픔을 택하신 겁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그것도 엄청 괴롭고 힘든 기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입니다. 그런데요, 십자가를 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에서 오는 아픔보다 십자가를 지는 더 큰 아픔을 택하셨을 때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에게 있는 것 다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계실 때도 자신이 가진 것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린 예수님이 가지신 것 뭐 있느냐 물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죽은 사람 살려 내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뭔가 가지시려면 이런 능력으로 다 가지셨을 겁니다. 이런 능력으로 돈 벌면 엄청 버셨을 거고 그랬더라면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거저 주셨습니다. 돈 받고 병자 고친 것 아닙니다. 돈 받고 죽은 사람 살린 것도 아닙니다. 그냥 거저 주셨어요.
언제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가 너의 생명을 구원 할 테니 ‘뭐 내놓아라.” 그러시던가요? “내가 너에게 영생을 줄 터이니 너는 돈 얼마 내놓아라.” 그러시던가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도 아니요.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이라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혼자 있을 때든 여럿이 있을 때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한다는 의식이 예수님께서 가지신 하나님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십자가를 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는 갈등에서 십자가를 지는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받아들이는 힘이 되었고,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십자가의 큰 아픔 가운데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혼자라는 상황에서 겪는 위기나,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하는 갈등에서 겪는 위기에서 승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식을 가지는 겁니다. 그것은 그 아픔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그 아픔보다 더 큰 아픔도 짊어지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식을 가지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노아와 롯을 본다면,
노아는 자기가 살기 위해 방주를 타기 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방주에 태우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설사 그 방주에 자기가 들어 갈 자리가 없어 자기는 죽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롯은 자기가 살기 위해 뒤도 안돌아 보고 도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해 소돔과 고모라 성을 외치며 뛰어 다녀야 했습니다. 자기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그 속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내려와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보고 그들을 책망한 뒤 모세는 하나님에게 나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모세는 악한 자를 멸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의로운 자의 자리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악한 자들을 대신하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와 그 백성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러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피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기록이 깨지기는 했습니다만, 미국의 신화적인 홈런 타자는 베이브 루스(Babe Ruth)입니다. 그는 생애 714개의 홈런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삼진 아웃은 몇 개나 되는지 아십니까? 714개의 홈런을 친 그가 1330회나 삼진 아웃을 당했습니다.
만약 타석에 설 때마다 또 삼진아웃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이라면 그는 그런 대타자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삼진 아웃을 경험하지만 그래도 그는 홈런을 친다는 희망과 각오로 타석에 섰던 겁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워 주십니다. 때로 십자가 지는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부활의 영광을 허락해 주십니다.

혼자 남았다고 낙심하며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요청하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그를 만나셔서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울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왕상 19:18)하고 말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시고 십자가의 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고 살리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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