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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 (삼상 6:13-18, 고후 9:6-9, 막 1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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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선민의식이 강한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 투철한 선민의식은 오랜 세월 숱한 역사의 질곡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서 지금 당당히 팔레스틴 땅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역사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성지 순례를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성지에 가서 싫도록 보고 온 것들이 무엇입니까? 다 허물어져버린 유적들입니다. 수많은 돌무더기들일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에서 살아져버린 국가와 민족을 우리에게 증거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때 세상을 지배하던 강대국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앗수르니 바벨론이니 메데 파사니 헬라니 로마니 하는 나라들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지배당하던 한 작은 나라였던 이스라엘은 살아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역대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경제부문 65%, 의학25%, 물리 22%, 화학12%, 문학에 8%가 유대인입니다. 미국에서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하지만 상위권 부호 400가족 가운데 24%, 최상위 40가족 가운데서는 42%를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킨 김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대인을 살펴봅시다. 철학에 스피노자, 베르그송, 마르크스가 있고, 심리학에 프로이트, 아들러, 자연과학에 뉴턴,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음악에 멘델스존, 쇼팽, 말러 발터, 미술에 피사로, 모딜리아니, 샤갈, 문학에 하이네, 프루스트, 카프카, 싱어, 셀린저, 언론 출판에 퓰리처, 로이터, 뉴욕 타임즈, 워싱톤 포스트, 정치에 디즈레일리, 레닌, 키신저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두말할 것 없이 우리 주님도 유대인 이셨습니다.

이런 역사의 기적인 유대인의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교육에 있었고, 그들의 교육은 바로 성경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대인의 신앙과 지혜의 원천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잠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한 이 여호와 신앙이 그들에게 남다른 선민의식을 주었고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역사의 기적이 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해서 결국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들의 그 투철한 정신만은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하는 말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주일 날 교회에 가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형식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이면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바로 삶이요 생명인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사무엘서를 통해서 당시 2가지 잘못된 신앙 행태를 살필 수 있습니다.

(1)하나는 다곤을 섬기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의 우상숭배입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에 있는 말씀대로 피조물을 조물주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 주변에 팽배해 있는 그릇된 신앙행태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청지기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창1:28에 보면 “땅을 정복하라...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왕적인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사람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이런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왕적인 위치를 포기하고 피조물을 신이라고 섬기고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버리고 떠나서 거지가 된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아버지의 아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때 우리는 본래의 아들의 위치, 왕적인 신분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만물 위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제는 자기 형상대로 신을 만들어 놓고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 절대로 어떤 형상이나 모양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거나 절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목숨 걸고 싸우고 지키려고 한 것이 바로 한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 되게 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이스라엘의 타락한 신앙입니다.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은 그 주변에 수많은 이방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그 이방인들은 이미 오랜 세월 그 땅에 정착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아주 높은 문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막에서 살던 이스라엘, 유목생활의 단순 소박하던 그들이 이 색다른 문화에 접할 때 정신이 아뜩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흠모하게 되고 또 그것을 흉내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아예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이방 숭배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혹은 전쟁으로, 아니면, 질병이나, 흉년을 통해서 징계하셨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신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3. 오늘 사무엘서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갔다가 적에게 빼앗긴 일은 일대 오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 신앙 타락상의 노출이요, 그 결과로 그들이 어떻게 처참하게 실패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그 사명을 망각하거나 포기해도 하나님은 스스로 그 일을 진행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빼앗아가서 자기들의 신전에 진열해 놓고 마치 전리품인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던 블레셋에 엄청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여러분, 최근 지구촌에 있었던 대 참사에 대하여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에는 소위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는 미국이 재난을 당했습니다. 소위 9.11테러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연말에는 남아시아에 재난이 임했습니다.  지진과 해일이 그것입니다. 하나는 불로 인한 재난이요 다른 하나는 물로 인한 재난이었습니다. 죄악된 인간  역사에 대한 하나님ㅁ의 심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누가복음서에는 “사람들이 땅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기절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하나님은 스스로 그 일을 이루어나가십니다.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여기서 블레셋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여호와의 궤, 다시 말하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 사람들로부터도 제대로 대접을 받으시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은 우상숭배에 빠져서 그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런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이스라엘의 타락의 와중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입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이야말로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늘 문을 여시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 거리를 다 찾아서라도 이런 사람 하나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이 성을 용서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우리 교회를 위해서도 이런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도 이런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자신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이 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사무엘 본문 13절에 보면 여호수아라는 사람을 위시하여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마중 나가서 영접하면서 환호작약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호산나” 찬송하며 환영한 것과 방불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  제사드릴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저 제사장이 하나님의 궤를 경솔하고 불손하게 전쟁터로 보내서 빼앗기게 한 것과 얼마나 비교가 됩니까?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냥 하나님 그분 때문에 기뻐서 못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박국서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느헤미야는 “이 기쁨이 우리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기쁨 여러분에게도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여기 참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 제물에 쓸 소와 제사에 사용할 화목은 이방 블레셋 사람들이 제공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진실된 신앙을 위하여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는 제물도 준비해 주셨고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섬기는데 내게 무엇이 없다고 걱정하거나 핑계하지 마십시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것이요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이방사람들에게도 부당한 대접을 받으시다가 비로소 여호수아라는 사람을 통해서 합당한 대접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는 그 경건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어떤 여인이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 부어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여인을 책망했으나 우리 주님은 오히려 가룟 유다를 책망하시면서 여인이 한 이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증거하여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우리 주님을 제대로 대접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렇거나 저렇거나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향취가 될 수도 있고 악취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시리라 생각되십니까? 우리 교회에서 우리 뒤를 잇는 사람들이 먼 훗날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평가하리라 생각되십니까?

오늘 18절에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벳세메스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겼는지 그 돌이 두고두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아니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는지를 두고두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 블레셋이 감히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다가 얼마나 무서운 심판을 받았는지 두고두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존재가, 여러분의 삶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 뒤를 이을 후배나 후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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