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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삼상 6:1-12, 고전 2:1-5, 요 4: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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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 모세를 당시 애굽의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에게 가서 요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은 모세가 바로에게 자기 동족을 보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당시 바로는 애굽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신이었습니다. 이런 바로에게 “여호와”라는 신의 이름을 가지고 나타난 모세를 볼 때 가소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가 노예들이 믿는 신이라고 하니 바로로서는 분노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도대체 여호와가 누구냐? 내가 무엇 때문에 여호와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모세와 아론에게 “썩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강경책을 폈습니다. “이 백성이 먹고 배가 부르니까 쓸데없는 일을 꾸미는 구나”라고 하면서 더욱 혹독하게 노역을 시켰습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은 애굽에 재앙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자기 나라에 있는 요술사들을 불러 모세와 대결시켰습니다. 어느 단계까지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쳤을 때 애굽의 요술사들이 외친 말이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권능이니이다” 그런데 여기 “여호와의 권능”이란 말은 “여호와의 손”이란 뜻입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로서는 하나님의 손을 대항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재앙이 점점 그 강도가 더하여짐에 따라, 10번째 장자가 죽는 재앙에 이르러서는 애굽의 현인 신이었던 바로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주 다급하게 되니까 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너희 말대로 가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고 제발 나를 위하여 축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유월절과 출애굽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만 상천하지(上天下地)에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급할 때 바로 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했습니다(6절).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라고 하면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손”이 자기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내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은 실제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망각하고 있었지만 이방인인 블레셋이 오히려 그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해 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잘못해서 사명을 망각하고, 그 영광을 가리게 될 때 스스로 그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처음에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전리품으로 취급해서 다곤 신당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의 우상인 다곤이 넘어지고 파괴되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단지 전리품으로만 알았던 여호와의 궤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들이 하나님께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두고서, 비록 그 백성이 타락했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그의 일을 이루어나가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그렇지만, 그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일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세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서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그 거룩한 이름을 높이 들어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난해 말에 있었던 남아시아의 지진과 해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의 교만을 여지없이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아닙니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쌓아올린 바벨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 찬양하며 환영했습니다. 그러자 당국자들이 이런 일을 금하도록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만일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 돌들이 일어나 소리치기 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나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의 영광을 들어내야 합니다. 이 막중한 사명을 깨닫고 이 일에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께서 사역을 하실 때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아는 대로 예수는 정규적인 학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렇다할 권력도 없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시골의 목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그 놀라운 지혜와 능력은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고 물었습니다. 나중에는 마치 저 블레셋 사람들처럼 “이 예수를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결론은 십자가 사형이었습니다.

이방사람들이었던 블레셋은 여호와의 궤를 다시 돌려보내자고 결론짓고, 자기들 나름대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궤를 반환하게 됩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형을 결정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예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수는 과연 누구이십니까? 아니 여러분 각자에게 예수는 과연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 예수를 어떻게 하십니까? 적어도 블레셋은 하나님의 궤를 하나님께 돌려보낼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할 것들을 우리가 차지해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께서 주인이십니까? 주일을 성수하십니까? 주께 속한  십일조를 드리십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본분과 사명을 잘 감당하십니까? 우리가 그렇지 못할 때 사도 바울은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마리아 여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 여자는 예수님을 단순히 한 유대 남자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기들이 조상으로 섬기는 야곱과 비교하게 됩니다. 엄청난 발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진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까지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 신앙이 그 정도에서 멈추는 것을 만족하시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이시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선민이라고 자처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렸으나 사마리아 여인은 그를 메시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도 그 동네 수많은 사람들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했을 때 그들은 전쟁에 패하고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는 수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무시했을 때 하나님은 그 땅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시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 임하는 이 재앙이 단지 천재지변일 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스스로 나타나셔서 그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했으면 이토록 끔찍한 재앙이 임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이방인인 블레셋도 재앙 앞에서 회개했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이런 우리 주변의 현실을 보고도 우리 책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를 이 땅에 세워주신 것은 바로 이럴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서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시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입니까? 지금 이 시간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 앞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여전히 그대로 사시려고 하십니까? 계속 접근해 오시고, 계속 말씀을 걸어오시는 주님과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인정하시고, 그 주님께 여러분을 온전히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그 영광을 들어내시게 됩니다.

3.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면서 한 가지 실험을 합니다. 그것은 젖 먹는 송아지를 떼어 놓은 암소에게 수레를 메워 거기 여호와의 궤를 실려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이 소가 좌우로 지우치지 아니하고 똑바로 가면 자기들이 받은 재앙이 여호와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소는 송아지를 떼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좌우로 지우치지 아니하고 법궤를 똑바로 싣고 갔습니다. 흔히 법궤를 싣고 간 이 소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갑니다.

송아지를 떼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뒤를 돌아보거나 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과감하게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면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복음 성가에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뒤 돌아서지 않겠네”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그 뜻이 우리 목표입니다. 그 목표만 지향하여 전력 질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좌우의 유혹을 물리쳐야합니다.

기독도가 천성을 향하여 갈 때 그 가는 길 좌우에는 유혹하는 세력도 있었고, 위협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도는 거기 미혹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믿음의 뿌리를 그리스도에게, 주의 말씀에 깊이 내려야 합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 말을 듣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위에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환난이나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반석 같은 신앙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앞에 있는 유혹도 물리쳐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으면 반드시 모든 것이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잘되게 해주십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는 우리에게 주시는 결과요 하나님의 선물이지 이것이 우리 목표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오히려 저주일 뿐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를 넘겨주었습니까? 출세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어 한 몫 보려고만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 사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덕이나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위하여서는 손톱만큼의 손해도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자기가 주인이지 예수님이 주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하여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러분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베드로와 함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런 절대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법궤를 반환하도록 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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