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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출 3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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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성홍모 목사

  오늘 우리 시대는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한 사람, 뜨거운 기도의 사람을 찾아보기에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무엇을 하든지 기도로 시작하였고 기도로 진행하면서 기도의 힘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내 지식이나 경험이나 의지로 살아갈 때가 많은 것을 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기도하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요, 우리의 믿음이 허약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책 가운데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무리 성실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선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여도, 그가 사는 사회 자체가 타락하고 죄악이 관영하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이 결코 선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선하고 바르게 살아가기가 힘드는 것을 봅니다. 

  가수 하덕규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창립기념 행사시에 오셔서 귀한 복음성가를 불러주셨습니다.  그의 목소리와 노랫말에 반하여 여러 번 히트곡 "가시나무"를 들어보았습니다.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가사는 우리의 마음과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에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슬픈 노래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이 쉴 곳 없네"  이 노래 가사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가시나무와 같은 나, 헛된 욕망으로 가득한 나, 내 속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의 세력이 차지하며, 내가 나를 이길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 우리 주님에게 쉴 자리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 24)고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탄식만 하고 있을 사도 바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기에 그런 역전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란 무엇입니까?  우리를 얽어매고 무겁게 하고 속박하는 것이 기도입니까?  부담스럽고 억지와 같고 마지못하여 눈을 감는 것입니까?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요,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라는 채널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우리 주님이 자리잡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상주하고 있으며 영주하고 있으며, 내주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이시며, 나의 주인으로 나를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 이 한마디만 고백하여도 충분한 기도가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런 감격스러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서의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며 확실한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문제나 해결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한 인간이 되는 경험이라고 말씀드립니다.  기도하면서 무엇을 해야 한다, 하라, 하지 말라는 그런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한 인간이 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고 회복하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진실하게 엎드려 기도하는 순간입니다.  진실한 한 인간이 되는 경험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나를 되찾고, 되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되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나의 죄악을 아파할 수 있었고, 연약함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무엇을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느냐 하는 진솔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라는 말은 '우선하여', '무엇보다도 먼저'라는 뜻입니다.  "첫째로"라는 말은 시간적인 우선보다는 중요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말입니다.  기도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먼저 할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선택하시거나 중요한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기도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러 가지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들이 분명한 차이를 가진 다른 기도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비슷한 말을 동의어를 사용하여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이들 기도의 종류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는 기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기도하다보면 이런 모든 기도의 종류가 다 포함되고 혼합되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비슷한 말을 동의어로 사용하여 기도의 여러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말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간구라는 기도입니다.  이 간구는 간청하는 기도요, 탄원의 기도요, 부족하기에 애원하는 기도입니다.  이 단어는 특별히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요청할 때만 사용되는 단어였습니다.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 다급한 소원을 아뢰고 탄원할 때의 기도가 간구입니다.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도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는 기도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아룀을 기도라고 합니다.

  도고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도고는 대담, 면접, 청원, 중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중보기도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감사의 기도가 있습니다.  감사라는 것도 하나의 기도입니다.  감사는 말 그대로 좋은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기도입니다.  감사의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2절입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도고의 기도, 중보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지금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감옥에서 기록하였다고 보는데, 바울은 로마라는 거대한 나라, 하나님을 모르고 교인들을 핍박하는 나라, 기독교를 무참하게 짓밟는 무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 속에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에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가리지 않고 우리의 기도에 포함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요, 안 믿는 사람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인종이나 국적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임금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있어서는 세계 모든 나라의 왕과 대통령, 수상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각 나라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네로 황제라는 지독한 사람이 있어 기독교회가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로마서 13:1에는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 해석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겠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조금 들지 않아도, 지금은 잘 이해할 수 없어도,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이 섭리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나라의 안녕과 사회의 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국가가 무너지고 전쟁이 일어나고 혼란에 빠지면 교회도 나갈 수 없고, 신앙을 유지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예례미야 선지자도 적국인 바벨론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루 속히 이 나라가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29:7)고 했습니다.  우리는 좀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큰 마음의 기도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도한다고 할 때마다 나의, 내 문제, 내 가족, 내 나라, 내 민족, 언제나 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초월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권세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받으실만한 것"이란 말씀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상달되며, 하나님이 흔쾌히 받으실 기도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당장에 내게 유익 되는 일이 아니라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특별히 권세 잡은 자를 위한 기도는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만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감리교회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다투게 되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주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인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원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바라시고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는 기도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5-7절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리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를 상고하면서 파이프 라인을 연상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있으면서 수돗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수돗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수도관이 수원지에서부터 이곳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한 힘과 능력, 은총이 모두다 파리프 라인인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아버지 앞에서 당당히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버릇없고, 잘못한 것도 많고, 책망들을 일도 많지만, 내가 못난 자식이라고 하여도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아버지 앞에 당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흔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너를 인도하는 흔적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믿고 나아갈 때 이루어진 것을 보면 모두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해놓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만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하는 사건들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오직 은혜로만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새벽 기도회에 나가십시오.  멀리 사시는 분들은 가까운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열심히 없이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저녁 시간에는 기도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라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돌아가는 열성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시5:3에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무슨 응답이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주님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응답하시는 귀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으로 말씀하시게 해야 합니다.  나만 외치지 말고, 외쳐 기도하였으면 주님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원하시는 뜻을 파악하려고 자문자답하면서 기도를 정리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해야만 믿음의 용량이 커져갑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해도 부드럽지가 않습니다.  기도 생활에 게을리 하는 이들을 보면 그는 짜증스러운 말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인품이 달라집니다.  좋은 인격의 사람이 됩니다.  기도의 깊이가 믿음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기도의 용량이 인격을 말해줍니다. 
전 세계를 콜라로서 정복한 코카콜라 창업자인 '아사 G. 켄들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값어치를 가진 브랜드가 코카콜라 상표입니다.  그는 원래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합니다. 켄들러씨는 술을 끊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보았지만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 켄들러씨는 마음속에 벼락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바로 그 시간에 남편의 금주를 위하여 무릎을 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켄들러씨는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알코올의 유혹에서 해방되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한 것이라고 합니다.

  정리합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모든 사람이 고요하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증거하려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를 등록하시고 이제 막 신앙 생활하시려는 새 신자들에게 특별히 당부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고, 말씀도 이해가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가정을 사모하고 부모님의 가슴에 안기려고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고향을 다녀오고, 부모님을 만나 뵈므로 큰 힘을 얻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가 그렇다고 생각해봅니다.  기도는 정말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저의 손을 붙들어주시는 순간입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는 순간 우리의 시들었던 심령은 새 힘을 얻고 지쳐버린 영혼이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엎드린 순간 하나님은 여러분을 안아주시고 업어주시고, 무등을 태워주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초월하고, 이해 타산도 초월하고 믿는 성도와 믿지 않는 불신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 공간을 뛰어넘어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용량을 키워야 합니다.  기도의 깊이가 믿음의 깊이입니다.

  기도하실 때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은혜,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이것은 안으로 향하는 기도요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위로 향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밖으로 나아가는 역사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이렇게 밖으로 나가서 열매 맺게 합니다.  이 가을에 기도의 열매가 풍성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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