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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복자 온유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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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동규 목사

팔복은 각각의 독립된 복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구슬목걸이처럼 한 덩어리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무능을 절감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지체의 도움이 필요함을 절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과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의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기 때문에 그는 필연적으로 ‘애통한 자’가 됩니다.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온전하게 될 그날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애통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온유한 자’로 드러납니다. 오늘은 온유에 대해서 배우겠습니다.

먼저 온유가 아닌 것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 첫째로 온유는 천성적인 온화함이 아닙니다. ‘온유’(溫柔)는 일반적으로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의미로 쓰이며, 천성적으로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팔복은 구원을 얻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하나님 백성들만의 성품을 언급한 것입니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오염되고 부패한 자신과 세상의 실상을 바로 알고 회복을 위해 애통하는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을 천성적으로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로 온유는 물렁하고 나약한 성품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이미지를 연상시킬지라도 5절에서 말하는 온유는 연약함이나 비굴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다투기 싫고 평화가 좋기 때문에, 진리를 수호하려는 정신도 없이 무조건 중용을 취하는 타협적인 자세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온유하신 분이었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으셨습니다(마 11:9). 그분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신 적도 있었습니다(요 2:25).

온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우스’는 허세를 부리지 않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며, 자제심이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온유를 길들여진 야생마의 성품에 비유했습니다. 로데오 경기를 보면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 작은 자극에도 펄쩍펄쩍 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납던 말이 잘 길들여지면 주인의 뜻에 절대 복종하여 움직입니다. 이처럼 온유는 성령님에 의해 잘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제력 있게 순종하여 움직이는 성품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온유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는 것과 나약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유용합니다. 온유는 강인함과 동시에 절제된 온화함이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선천적으로 하나님께 고분고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실 때에 버티는 그 완고함과 날뛰는 혈기는 보통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유’라는 성품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면 실생활에서 어떻게 표현되는 것이 온유한 것일까요?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타인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첫째로 온유한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는 죽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으며, 자기를 정당화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민감합니다. 자기의 권리와 자기 몫은 철저하게 챙겨야만 직성이 풀리고, 자기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오해가 있으면 어찌하든지 풀어야만 잠이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절망과 연민에 잘 빠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그들도 스스로는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이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죄인취급하거나 허물을 들추어내면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느낍니다. 스스로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지만 다른 사람이 못난 사람 취급하고 얕잡아보면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에 독기가 서립니다. 서열의식이 강해서 서열을 무시할 때 굴욕감을 느껴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자기에 대해서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자신을 함께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자기에 대해 민감한 것은 아직 온유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방어하거나 정당화하는 일에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의 관심이 자기 영광에 있지 않고 주님의 영광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리와 대의명분과 장래 전체를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부당하게 고통당했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도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따지고 덤볐다가는 더 큰 손해를 볼 것이라는 계산에서 참고 지내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말해봤자 나만 더러운 놈이 되기 때문에 잊어버리는 것도 온유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온유한 마음으로 대한다는 것은 모든 악의와 보복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보복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까지 생겼겠습니까? 온순한 사람도 계속 당하고만 살다보면 자기가 얼마나 성깔 있는 사람인지 한 번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집니다. 힘 있는 사람만 보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힘이 없어도 보복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들의 꾸중에 ‘버티기’ ‘말 안듣기’ 등을 통해 보복합니다. 부모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비행청소년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비인격적인 교사의 폭력으로 그 과목을 성실히 하지 않는 경우도 보복입니다. 은근히 비난하고 폄하하기와 불평하기도 힘없는 사람이 보복하는 방법 중하나입니다. 드러내고 보복하지는 않지만, 상대방보다 실력적으로 우위에 섬으로서 굴욕감을 주려는 것도 복수입니다. 한 동안 ‘복수’에 대한 영화가 유행했었습니다. 이 또한 부당한 대우를 받고서도 힘이 없어 복수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준 것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상대방의 죄질을 분석하고 형량도 매기고 적절한 형벌도 가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만이 복수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그러므로 모든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 37:7)고 말합니다. 죄를 간과하는 것은 공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사회악과 부당한 횡포에 대해서 눈감고 있는 것이 정당한 태도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 스스로 정의의 사도가 되어 심판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에 대한 심판을 온전히 맡기라는 것입니다.

맡긴 후에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 12:20)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의 괴롭힘을 적게 받기 위해서 뇌물성의 아양을 떨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원수가 핍절한 상태가 되더라도 고소하다고 생각하며 못 본 척하지 말고 도와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비록 다른 사람이 그의 허물과 약점을 부당하게 드러내거나 과장해도 스스로 원수 갚지 않습니다. 마음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며, 불의한 것을 알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어떤 반격도 가하지 않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거나 불의한 자를 투기하지 않습니다(시 37:1). 오히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평가한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때 백성들로부터 수많은 불평과 원망을 들었고 리더십과 인격에 대한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괴로움을 내려놓았을 뿐 스스로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심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참고 있으면, 주위 사람들은 존경하기보다 정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대항도 못하는 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반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격과 이권에 심각한 공격을 받았을 때 보여 준 모세의 절제된 태도는 온유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양도했습니다. 다윗 역시 피난시절 사울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엄청나게 많이 받았지만 스스로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모세도 화낸 적이 있고, 아브라함은 양보 후에 손해의식에 빠졌으며, 다윗도 피난 길에 저주했던 시므이를 처벌하도록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다는 점에서 완전한 온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눈앞의 작은 유익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인 상급이 되시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받고 누명을 쓰고 모욕을 당해도 보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이시며 복수자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평온한 심령을 유지하면서 손해를 묵묵히 감수합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역사는 강한 자, 공격적인 자, 거친 자가 땅을 차지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혈기를 부리는 사람은 계속해서 사람을 잃고 설자리를 잃을 뿐이며, 결국 온유한 사람이 사람을 얻고 활동 영역도 점점 넓어집니다. 땅을 많이 정복했던 영웅들을 보십시오. 알렉산더는 30세의 나이에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 죽었습니다. 징기스칸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중에 몽골 초원의 어딘가에 묻혔습니다. 나폴레옹도 유배지 세인트 헬라나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는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이 세상은 성깔 있는 사람들, 악바리 같고 독종 같은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온유한 자들이 다 차지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게 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언제나 강포한 자를 심판하시고 땅에서 쓸어버리셨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 같은  현상을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도가 성취될 것입니다. 온유가 참 정복자인 셈입니다.

우리 시대는 빼앗더라도 성취하고 성공하는 것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온유한 자이지만 참으로 온유한 자답게 성경의 가치관을 따라 성숙한 자세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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