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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의 문을 여는 손님대접 (창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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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목사
 
몇 년 전 국립정신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에서 매우 흥미 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160마리 가량의 쥐를 안락하게 수용할 수 있는 공간 안에 2200마리가 될 때까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충분한 양의 물과 먹이 그리고 다른 자원들을 계속 공급해주었습니다. 실험심리학자인 존 칼흔(John Calhoun) 박사는 쥐의 숫자가 절정 상태에 이르면서 쥐들 사이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쥐들에게는 발견할 수 없었던 강한 독립성과 극단적 고립 증후군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쥐 사이에 어떤 구애나 교접행위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년쯤 지나자 특별한 이유 없이 통 안에 있던 쥐들은 다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실험결과를 토대로 볼 때, 실험실의 상황이 인간사회에서도 발생한다고 가정하면 인간이 보일 반응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무엇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의 필수조건인 인간간의 유대관계는 사라지고 서로 돕고 격려하며 섬기고자 하는 욕구는 살아지게 될 것입니다. 칼흔 박사는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자기들의 목표와 이상 그리고 가치기준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섬기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현대의 삶은 점점 비정하고 메말라져 갑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남에게 간섭 받는 것도 싫어합니다. 자기 살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에게까지 관심 가지고 사는 것이 버거울 뿐입니다. 오히려 홀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입니다.

오늘날 바로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손님을 접대하고 맞아들이는 모습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자기 어려움을 극복하고 축복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축복의 통로로 각박한 현대를 살아갈 수 있는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마가복음 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 자녀 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은 아브라함처럼 주위에 나그네들이나 이웃을 초청하여 나누고 섬기는 삶입니다. 이웃을 초대하고 접대하는 것이 왜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첫째,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접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천사들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고대 문학적 표현 속에 ‘신인동형론’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서 활동한다는 문학적 표현양식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아브라함은 이 일행들이 하나님과 천사들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13장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나그네들은 아브라함이 귀하고 존귀하게 모실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나 귀족의 표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들이 나타난 시간인 오전은 오늘날로 말하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를 말하는데, 중동 지방으로서는 가장 더운 시간이기 때문에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던 시간입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가장 귀찮고 힘든 시간에 나그네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그네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단에서 나타난 것도 아니고 너무도 평범하게 아브라함이 생활하는 장막에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예배나 집회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면 하나님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는 상황이 어려운 때, 우리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때일 수 있습니다. 성경도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사람들이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했습니다. 어린 예수는 결국 구유에서 탄생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한 밝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도 바로 눈 앞에 서 있는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를 심판하고 못박았습니다. 메시아가 앞에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접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에 멸망의 메시지를 전하러 간 천사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쾌락의 도구로 삼는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를 잘 대접하여 축복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의 영성과 겸손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세는 본문 2절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와 본문 3절에서 나그네들을 “내 주여”라고 불렀다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태도는 당시 중동 지방에서 사랑과 정성을 다해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임을 나타냅니다. 또 ‘내 주여’라는 호칭은 조금의 인색함이나 주저함 없이 나그네를 ‘나만의 당신, 나의 집에 오신 당신’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님을 정성스럽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브라함의 겸손입니다.

로마서 12장 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신약 시대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요 덕목을 가르치고 있는 디도서 1장 7절과 8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24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사랑을 알고 교제하는 사람은 수직적인 관계만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수평적인 관계의 중요성도 압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섬세하고 자상하게 배려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영성에서 나온 겸손함이 자기를 찾아온 나그네를 쉽게 대하지 않고 귀하게 대하도록 만든 열린 눈이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최후 심판대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심판대에 주님께서 왼편에는 염소를, 오른편에는 양을 나누시고 말씀합니다. 왼편에 있는 신자들은 ‘주님, 주님이 굶주릴 때 먹을 것을 가져다 드렸고, 주님이 감옥에 계실 때 제가 방문했고, 매맞을 때에 주님을 감싸 드렸습니다.’라고 말한 반면, 오른편에 있는 양의 신자들은 ‘제가 주님께 해드린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른편에 있는 신자들에게 ‘너희들이야 말로 내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고 감옥에 있을 때 찾아와 주었고 나를 진정 위로해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에 주님은 별볼일 없는 존재로 찾아오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깨어 있다면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손님 대접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길이 되고 하나님을 삶 속에 깊이 모시는 통로가 되는 것임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둘째, 나그네를 대접하고 영접함이 중요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당시 마음이 상당히 복잡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로부터 자녀가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지 24년이 지났는데도 응답이 없던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을 힘도 없었고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 볼 때 자녀를 낳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첩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라를 통해 난 자녀가 진짜 약속의 자녀이지,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마음이 몹시 초조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번민할 때 남을 돌아 보고 살피기는 어렵습니다. 특별히 문제가 오래 지속돼 왔거나 앞으로 어떤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에는 마음이 축 쳐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자신의 문제가 그토록 중차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문제에 매여있지 않고, 손님을 어떻게 잘 대접할 것인가에 초점을 있었습니다. 손님들에게 손과 발을 씻으라 권하고 아내 사라와 함께 직접 요리합니다. 아브라함이 손수 짐승을 잡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대접하고 손님들에게는 ‘쉬시라(Refresh!)’고 권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기쁘게 하라고 권합니다.

집에서 컴퓨터로 작업 하던 중에 딸이 다가와서 ‘아빠, 뭐하고 있어?’라고 물으면, ‘어, 이런 저런거 해’라고 대답합니다. 대답할 때 그다지 신경 쓰지 못합니다. 딸은 제 주변을 빙빙 돌다 돌아가 버리는데 보내고 나면 꼭 후회합니다. 한번이라도 안아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렇지만 할 수 없습니다. 눈앞에 닥친 일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자기 문제에 집착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갖기 힘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손님을 기쁘게 영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홀로 고군분투하며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말씀하시기를 정한 때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사라가 장막 안에서 웃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웃었다고 하자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가 왜 웃었겠습니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가 막혀 웃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봤을 때는 절대로 있을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그네를 잘 대접할 때 가장 큰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내 문제에만 집중하고 집착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는 자세는 잘못된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총리 대신이 되기 위해, 혹은 형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노력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형편이든지 간에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한 것뿐입니다. 종으로 팔려 갔지만 주인이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에도 죄수들을 돌아보며 위로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던 것입니다.

시편 37편 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문제보다 손님 접대에 최선을 다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정성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홀로 뛰어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찾아 행할 때에 우리의 당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나그네를 대접하고 영접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동역자가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나그네 일행이 하나님과 천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손님을 환송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그네들은 이제 소돔땅을 심판하기 위해 소돔으로 향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성품대로 나그네를 섬기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파트너’요 ‘동역자’ 라고 인정하십니다. 아브라함으로 사람을 섬기는 동역자인 ‘중보자’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두고 아브라함과 상의하십니다. 이 때에 아브라함은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는 위치가 아닙니다. 중보자의 위치에 서서 한 도시를 살리고 죽이는 운명을 거머쥐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보자의 놀라운 특권과 위치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중보자의 특권을 아브라함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도 중보자의 특권과 권리를 주십니다. 한 개인과 민족의 흥망성쇠를 기도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당신과 함께 일하는 파트너로 세워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손님을 대접하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마음의 빈방이 없는 사람은 손님을 대접할 수 없습니다. 자기로 가득한 사람도 다른 사람을 모실 수 없습니다. 섬김은 나를 비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비웠을 때에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주도하고 미국의 부흥을 위해 애썼던 25대 대통령 윌리엄 맥킨니(William Mackinley)가 대통령으로 당선 된 후 각료를 임명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는 유럽과의 관계가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영국 대사로 누구를 임명하느냐 하는 중차대한 선택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영국 대사 후보로 두 사람이 거론되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맥킨니 대통령의 절친하면서도 유능한 친구였습니다. 모두 맥킨니 대통령의 친구가 영국 대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다른 사람이 영국 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맥킨니 대통령에게 이유를 묻자 대통령은 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이 친구와 외국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버스를 탔을 때 노인 두 분이 타시길래 제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갑자기 잠을 자는 척 했습니다. 저는 그때 알게되었습니다. ‘이 친구가 좋은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지만 한가지 부족한 점이 있구나…….’ 바로 섬김의 모습이었습니다. 대사로서 미국을 대표할 만한 결정적인 요소가 빠져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친구를 영국 대사로 임명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하늘 나라 대사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이유도 우리를 섬기려 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우리에게 의미 없이 다가오는 나그네라 하더라도 섬기고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어려운 사람을 시간과 물질로 섬길 수 없는 사람은 마음으로도 섬길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으로도 진정 섬길 수 없습니다.

2001년 2월 7일 미국 남가주 코우스트 힐즈 커뮤니티 교회(Coast Hills Community Church)에 미국 언론들이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었습니다. 3개월 전에 데니&리사 벨레시 목사님 부부는 교인 중 자원하는 100명에게 $100씩 나누어 주고서, 다음과 같은 원칙하에서 쓰고 난 다음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첫째 백 달러는 하나님의 재산임을 잊지 말 것, 둘째 백 달러를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할 것, 셋째 사업의 결과를 시작한 날로부터 구십일이 되는 날 보고할 것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2월 7일, 바로 보고회를 가지는 날 놀랄만한 일들이 미국전역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백 달러는 이미 백 불의 가치를 넘어 수천만 불의 효력과 가치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사랑의 선물로 번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백 달러가 사랑의 연결고리가 되어 지치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나누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 하나 몸 가누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 돌보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해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죽는 길이 됩니다. 힘들지만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소 한번 더 띄워주시지 않겠습니까? 남편과 자녀에게 조그마한 사랑의 표시를 더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안내해주는 사람에게, 까페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비록 모르는 사람일지언정 따뜻한 미소와 함께 인사 한마디 건넨다면 우리의 작은 마음들이 퍼져나가서 세상을 감동시키고 점점 환하게 만들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사랑 받지 못해 갈급해 하는 많은 사람들이 애타게 하나님의 대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 나그네가 하나님을 대표하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나그네가 혹시 내 가족일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일는지 모릅니다. 손님과 나그네에 대한 대접은 사람에 대한 대접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놀라운 영적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사로서 나그네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여유로움과 넉넉함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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