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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이 넘치는 삶의 비결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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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슬픈 일도 만나고 고통스러운 일도 만납니다. 매일같이 혼인 잔칫집처럼 흥겹고 즐거운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우리의 기대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인생을 사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한 평생을 살펴보면 행복한 순간보다 괴로운 순간이 더 많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이 시간 상고할 요한복음 2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초기에 행하신 첫 번째 기적에 관한 내용으로서 인생을 기쁘게 살아가는 비결을 우리에게 시사해 줍니다.

하루는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4킬로쯤 떨어진 가나 마을에 혼인예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받아 참석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팔을 걷어붙이고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애쓴 것을 보면 두 집안이 퍽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혼인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혼인잔치는 보통 한 주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초대한 친척과 친구들이 함께 즐겼습니다. 그런데 가나의 잔칫집에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앞으로도 잔치를 여러 날 계속해야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포도주가 동이 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었습니다. 신랑도, 하객들도, 연회장도 몰랐고, 마리아와 몇 몇 하인들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와서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더러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일을 예견하시고 이번 기회에 메시야의 표적을 나타내시기로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신 것은, 마리아의 부탁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서 표적을 나타내기에 합당한 때에 일하시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즉시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하인들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마침 마당에 두 세 동이 드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돌항아리들은 손발을 씻기 위해 물을 담아두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하인들이 물을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셨습니다. 하인들은 시키는 대로 그 물을 떠서 갖다 주었습니다.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칭찬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이리하여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했던 피로연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포도주가 있음으로 해서 잔치가 흥겹게 되듯이,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시련과 역경을 만났을 때라도 우리 속에 기쁨이 있으면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기쁨이 바닥나면 그 때부터 우리 삶은 공허하고 피곤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삶에는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매일 기뻐하며 살아가십니까? 이 시간 저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주님의 표적을 통해서 기쁨이 넘치는 삶의 비결에 관해서 말씀해 드림으로써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 째로, 예수님을 우리 삶 가운데 모실 때 기쁨이 충만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말씀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무슨 수로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만사가 뜻대로 된다면 기뻐하지 말래도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노라면 기뻐할 일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도가 이치에 맞지도 않는 권면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노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자기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슬프고 우울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보고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비록 어둡고 습기 찬 지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서 지내는 죄수의 처지였지만, 사도의 심령 속에는 기쁨이 충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사도의 권면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사도가 정신이상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감옥에 갇혀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 안에서”란 항상,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만일 예수님께서 그 집에 계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야, 돈을 주고 포도주를 사오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와서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집의 살림이 넉넉한 편이 못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를 눈치 챈 손님들이 하나둘 일어나 가버리고 잔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설렁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신랑을 곤란한 처지에서 구해내고 잔치의 흥을 지속하게 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덕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 잔치에 초대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여러분의 삶속에 예수님을 모셨습니까? 그렇다면 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시고 그를 믿는 우리를 가지에 비유하셨습니다.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명예나 권력을 얻으면 행복하게 될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만일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부자들은 다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마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약을 주사하다가 적발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들입니다. 밤새워 술 마시고 미친 듯이 춤추는 사람들 역시 부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술을 마시고 발광하듯 몸을 흔들어대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그런 방법으로 누릴 수 없습니다.

명예로도 행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명예를 가진 사람들은 혹시라도 자기들의 명예에 손상을 입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합니다. 권력자들은 어떻습니까? 언제 누가 자기를 권좌에서 끌어내릴는지 불안해서 마음 편하게 잠을 들지 못합니다. 경호원들의 호위가 없이는 마음 놓고 바깥출입도 하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과 차원이 다릅니다.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은 주 안에서 기쁨을 공급 받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주님과 상관없기 때문에 성도들이 누리는 신령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우리가 처한 형편에 상관이 없지만, 세상이 주는 기쁨은 형편 따라 있다가도 없어지고 맙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거룩한 기쁨이지만, 세상이 주는 기쁨은 속(俗)되고 죄가 섞여 있습니다. 속담에 흥진비래(興盡悲來) 라는 말이 있습니다.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는 뜻으로서 세상이 주는 기쁨의 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변질되는 법이 없습니다. 이 기쁨은 구원 받은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서 12장 2절로 3절에 이르기를 “2)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언제까지나 마르지 않고 시원한 생수를 솟아내는 우물들과 같습니다. 성도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구원의 우물들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어 마실 수 있습니다. 시편 16편 11절에서 다윗은 송축하기를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을 생수의 강에 비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 이하에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몸을 성전 삼아 거하시면서 생수의 강이 되어 주십니다. 비유컨대, 성도들은 생명수 강가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가뭄이 들어 모든 초목이 타들어가도 생명수 강가에 심긴 나무는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고 청청합니다. 성도들이 어떠한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 있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속에 기쁨이 없습니까? 주님을 다시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때로 주님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심령에 기쁨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지체 말고 우리의 신앙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 구원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 째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예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가나의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곤란해 질 뻔했던 신랑을 구한 사람은 마리아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았을 때, 마리아는 즉시로 그 사실을 예수님께 고하고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마당에 놓인 여섯 개의 결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신 다음, 능력으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돌항아리 하나에 물 두 세 동이가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런 돌항아리가 여섯 개나 되는데, 항아리마다 최상품 포도주가 가득 찼습니다. 이제 손님이 얼마든지 와도 다 대접하고도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구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쓰고도 남도록 풍성하게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인색한 분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십시오. 벳세다 해변에 모인 사람들은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합치면 족히 2만 명은 될 것입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사람들은 돌아갈 줄을 모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드리기를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단 말입니까? 때에 안드레가 한 아이를 데리고 주님께로 왔습니다. 그 아이의 손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들려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했더니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 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성도님들이 구할 때 주님께서는 응답하시되 풍성한 응답을 주십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이적을 베풀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히 13:8).

혼인 잔칫집에서 가장 기뻐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신랑일 것입니다. 신랑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객들에게 음식과 포도주를 대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신랑이 알았더라면 결코 기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가오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면 문제가 다가올지라도 슬퍼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해결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으므로 문제가 많을수록 반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지,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특권을 부지런히 활용하십시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약 4:2)이라는 책망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 구하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근심에 잠긴 제자들에게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고 하셨습니다. 성도님들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시거든 주님께 신령한 기쁨을 부어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주 안에서 기뻐하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 째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여자여” 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로 “구나이”인데 실재로는 여왕이나 귀부인에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무시하신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전후를 살펴보면 아들로서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주셨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신 말씀이 이를 말해 줍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사적인 생애를 끝마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직후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메시야로서 사역을 시작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하신 것도 예수님께서 누구의 지시나 부탁을 받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마리아의 청을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자기가 혈육에 속한 아들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민의 구세주로 대하여야 함을 일깨워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즉시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청원을 했을 뿐 나머지는 다 예수님의 처분에 맡겼습니다. 이로써 마리아는 올바른 순종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의 순종도 칭찬할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여섯 개의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즉시 물을 길어다 붓되 아구까지 차도록 채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퍼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을 때에도 일언반구 대꾸 없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실로, 가나의 표적은 마리아와 하인들의 순종을 통해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과 같아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순종해 보자” 하면서 순종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저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기적들이 하나같이 순종의 산물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님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주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 보십시오. 우리는 듣기만 하고 순종하는데 인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으면 시장에 가서 포도주를 사오든지, 이웃에 가서 빌려오든지 하는 것이 상식이지, 결례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주님의 지시에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그리했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표적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주님의 말씀을 판단하지 마시고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삶을 맛나고, 의미 있고, 새롭게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삶 속에 모든 권태와 피로와 걱정과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을 몰아내고 생수의 강이 솟아나듯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 원하시거든, 먼저 예수님을 성도님들의 삶 속에 모셔 들이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지금까지 누려왔던 것보다 더 좋고 더 풍성한 기쁨의 삶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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