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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와 신앙③ : 삶을 드리는 예배 (사 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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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목사님의 체험담입니다. 타 교회로 부흥회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새벽예배를 인도하는데 한 할머니가 앞자리에 앉아서 찬송도 열심히 하고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는지 중간 중간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예배를 마친 후 개인기도 시간에는 얼마나 오래 기도하는지 맨 마지막에 나갑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크게 감동을 받고 자신의 교회에도 그런 분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이 다 가고 조용한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밖에 나가보니까 바로 그 할머니가 동네 사람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연을 알고 보니 남의 집 담장에 열린 호박을 따다 들켜서 싸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본 겁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과연 참 신앙이란 무엇일까? 과연 참 예배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반문해 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켜 흔히 하나님의 편재성(遍在性, Omnipresence)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 어디서나 일관성이 있는 모습을 하는 겁니다. 참 예배는 예배당에서 한 시간 순서를 따라 그럴싸하게 연출하는 게 아니라, 순서마다 진실한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일생 생활 중에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의 모습을 가지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물론 우리가 100% 완전할 수야 없지만, 적어도 기본자세만은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참 신앙은 신앙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신앙입니다. 마찬가지 참 예배는 예배와 행동이 일치하는 예행일치(禮行一致)의 신앙입니다. 만일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나의 모습과 가정이나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요 잘못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배에 관한 세 번째 메시지로 「삶을 드리는 예배」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예배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 예배인가 진단해 보고, 우리의 예배를 참 예배로 가꾸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마음껏 부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B.C. 8세기에서 7세기경에 활동하던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남쪽 유다 왕국의 실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유다 민족은 풍전등화 같은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쪽의 바벨론 제국이 점점 강성해지는 가운데 침략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신앙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모습을 가리켜 ‘예배의 실패’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실패한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서지 못한 채 끝내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B.C. 586년에 있었던 바벨론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의 멸망 사건입니다.

[1] 하나님에게 거절당한 예배 : 삶의 열매가 없는 예배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배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이사야 1장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봉독해 드린 말씀 중 10절~15절을 보면 당시의 신앙과 예배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눈에 선합니다. 우리가 봐도 한심한 지경인데 언제 어디서나 편재하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했을까 짐작이 됩니다.

10절 보면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는 잘 아시는 대로 죄악이 극에 달했던 도시가 아닙니까? 창세기 19장 보면 소돔은 음란하고 잔혹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소위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유다 민족이 그런 지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관원들도 백성들도 온통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15절 보면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것은 그들의 범죄가 심각한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폭행, 살인, 부정, 부패, 거짓, 사기, 음란, ...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죄악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성전에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겁니다. ‘손을 편다’는 것은 유대인의 기도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받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다른 구절들도 보면 구구절절 하나님이 그들의 제사를 거절하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가져와도 이제는 지겹다는 것입니다. 12절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죄악을 품은 채 하나님 앞에 나와 봤자 소용없다는 겁니다. 괜히 성전 마당만 밟다가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13절~14절 보면 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대중 집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죄악을 행하면서 그럴 듯한 모습으로 제사를 드리고 성회로 모인다고 해도 가증스럽고 피곤하니까 그만 두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빤히 보고 계시는데, 공적인 예배 현장에서의 모습과 일상생활에서의 모습이 불일치합니다. 한쪽에서는 거룩해 보이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엉망입니다. 양쪽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실지 짐작됩니다. 그런 예배라면 하나님께서 열 번 백 번 거절하실 수밖에 없는 겁니다.

[2]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 삶의 열매를 드리는 예배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모든 예배 순서, 예배 요소와 더불어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인고로 늘 부족합니다. 실수가 많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절대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족하면, 실수하고 범죄했으면 회개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잘하라는 겁니다. 다음 번에 혹시 잘못했더라도 또 회개하고 오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잘하면 된다는 겁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의 모습이 조금씩조금씩 거룩해지고 좋아집니다. 그걸 가리켜 ‘성화’(聖化)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그런 진지한 모습을 원하십니다.

16절~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죄악을 깨끗이 씻고 악행을 버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선행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겁니다. 18절을 또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여기서 ‘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레쿠 나’인데 이 말은 본래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장이 피고에게 일어나라고 지시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재판장의 입장에서 유다 백성에게 일어나 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리고 ‘변론하자’는 말은 역시 법정 용어로 논쟁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명백한 죄인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시려는 게 아니라, 회개시켜 용서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하고 허물이 있지만 회개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면 사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회개치 않고 죄를 그대로 품고 있으면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사59:1~2 보면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편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품고 있으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멀고멀게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기 전에 죄가 있으면 미리 사람 앞에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깨끗이 사함 받은 후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참 예배가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두어 달 전에 한 인터넷 신문에서 본 기사를 소개해 드립니다. KT 대전지사에 한 중년 남자로부터 편지 한 통이 배달됐습니다. 사연인즉슨 이랬습니다. 20년 전 공중전화가 고장나서 동전을 넣지 않아도 통화가 되는 것을 보고 별 생각 없이 여러 통화 전화를 걸었다는 겁니다. 그 후 나이가 들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려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다가 편지를 쓰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는 용서를 구하면서 10만원 짜리 수표를 동봉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정도 일 가지고 소심하기는 ... 하고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같은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귀한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작은 죄라도 영적으로 방해되는 것을 느끼고 과감하게 용서를 구하고 해결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참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삶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인 것입니다. 본문 19절~20절을 보면, 이런 태도가 예배의 성패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성패조차 좌우함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안타깝게도 유다 백성은 삶을 드리는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3] 오늘 우리가 드릴 예배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

우리는 이사야가 말하는 대로 삶이 드려지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배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과 순서를 정해서 드리는 공식적인 예배를 ‘공예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예배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때 우리 마음을 드리는 게 중요함을 지난 주일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예배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공예배 외에 우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예배 현장에서만 계신 분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생활의 현장에도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하나하나도 역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삶도 역시 넓은 의미의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생활예배’라고 부릅니다.

롬12:1 보면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몸’이란 우리의 육체만 아니라 인격과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공예배 외에 매일의 삶이 예배의 연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실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예배에 와서 “하나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저 왔습니다.” 그리고 예배 마치고 가면서 “하나님, 안녕히 계세요. 다음 주일에 또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웃기는 사람이죠. 그런데 실제 생활을 들여다보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교회당을 빠져나가면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정신없이 제 마음대로 바쁘게 살다가 주일에 성경책 끼고 와서 예배나 드린다면 “하나님, 안녕하세요?” “하나님, 안녕히 계세요” 하는 사람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센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이란 말이 있습니다. 주일만 지키는 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일도 빼먹는 사람이 늘어나 이 말이 큰 흉이 아닌 것 같이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썬데이 크리스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에브리데이 크리스천(Everyday Christian)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일에만, 예배의 현장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 날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순간 순간 때마다 일마다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 예배로 드리기 위해 구체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해 드립니다.

① 말씀에 순종하는 삶 : 우리는 무엇보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목사는 설교한 대로 살고, 성도들은 설교를 들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는 자라면 누구든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혹시 잘못된 길로 가다가도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2:2에 보면 우리 자신의 삶을 산 제사로 드리는 방법을 설명해 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의 죄악된 모습을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라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질 것입니다.

②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삶 : 우리는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일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그 외에 있는 곳곳에서 맡은 일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일만 주의 일이 아닙니다. 죄를 짓는 것 빼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마틴 루터도 이런 말을 했죠. “우유를 짜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의 젖을 짤 수 있다.” 이 말처럼 아무리 사소한 일 같아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골3:22~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만 기쁘게 하다 보면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③ 생활 속에서 선을 행하는 삶 :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작은 선행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기뻐 받으십니다. 히13:16 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일이 곧 주님께 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35~40 참조)

마더 테레사가 거리의 고아를 도와주면서, 목마른 아이 물 한 컵 주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그녀를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주님께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칭찬받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④ 복음을 증거하는 삶 : 벧전2:9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배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무슨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즉 예배자는 공예배 가운데 예배드릴 뿐 아니라 삶 속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가 드릴 생활예배입니다.

여러분! 지난 3주간에 걸쳐 예배에 관한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그 말씀들을 꼭 마음 속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여러분 인생의 중심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예배가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담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가 위선이 되지 않도록 평소의 생활 속에서 모든 삶을 산 제사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고 축복하시는 승리의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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