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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기쁨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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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나는 하나님의 손에 잡힌 몽당연필이다.”라고 하신 테레사 수녀를 만난 웨스트몬트 대학의 데이비드 스워프 학장이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화내는 일이 전혀 없으십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사랑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화낼 틈도 찾기가 어렵군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바쁜 사람은 도둑질 할 틈도 없다는 말이 있지만, 사랑할 일을 찾는 사람은 미워할 틈이 없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아들이 여러분과 저를 살리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기 걸려 있는 십자가가 바로 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아주 큰 죄를 지은 죄인을 사형시키는 형틀입니다. 그 방법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던지, 당시에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용하지도 않았던 사형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먼저 벌거벗긴 채로 40에서 하나 모자라는 매를 맞으셨습니다. 그 매는 긴 채찍에다가 짐승의 뼛조각이나 쇳조각을 주렁주렁 매단 그런 매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은 매 맞는 것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십자가로 된 나무에 팔을 벌려 그 손에다 못을 박았습니다. 발을 포개고 그 위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세우는 겁니다. 손과 발이 몸무게로 인해 찢어질 정도니 그 아픔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아프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십자가는 자랑스러운 십자가였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지는 십자가라면 수치스러운 겁니다. 그러나 죄 없이 지는 십자가라면 수치스러울 것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그래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입니다. 결코 수치스러운 것 아닙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이기에 그것은 자랑스러운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만약 고통을 이야기 한다면, 손과 발을 통해 들어오는 그 육신의 찢어지는 아픔보다는, 그 마음, 그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더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의도와 그 뜻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은 더 아파하시고 더 슬퍼하신 겁니다.

어느 날, 십자가를 지기 위해 비장한 각오와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은 누가 더 높아질 거냐고 논쟁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마 20:28)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속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슬프셨겠습니까?
예수님, 당신은 섬기러 왔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제자들은 누가 높은 자리에서 섬김 받을 거냐로 싸우고 있었으니……. 예수님, 당신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고 하시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제자들은 오히려 영광 받기를 원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찬송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여기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런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런 찬송입니다.

얼마나 멋진 순간입니까? “이제야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를 알았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고 예수님은 멋지게 손을 들어 그 환호에 답해 주셨을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프셨을 겁니다. 그들의 환호와 예수님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되셔서, 자기 나라를 독립시키고 그 옛날 다윗과 같이 이스라엘을 온 땅 위에 뛰어난 나라를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보세요. 나면서부터 한번도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켜 걷게 하셨습니다. 눈먼 자 눈 뜨게 하셔서 보게 하셨습니다. 듣지 못한 사람의 귀를 열어 듣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12 광주리 남긴 거 생각하면 보통 신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능력의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왕이 되시기만 하면 이 놀라운 이들은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슬펐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아프셨을 겁니다. 예수님, 당신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기쁘실 리 없고, 성전에서 물건 팔고, 돈 바꾸고, 그래서 성전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이들을 보고 그 마음이 기쁘실 리 없는 겁니다.

예수님, 당신이 잡히시던 날, 3년이나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죽어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하던 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이 기쁘실 리 만무하고, 십자가 위에 달려, 그 고통 중에서도 당신을 조롱하는 사람들,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그 십자가 밑에서, 누가 예수님의 옷을 통째로 가질까 하여 제비뽑는 사람들을 보실 때 얼마나 슬프셨겠습니까?
아마도 십자가의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이 예수님의 마음을 찢어놓았을 겁니다.
이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 십자가 위에서 슬퍼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 십자가 위에서 찢어지는 마음을 끌어안고 아파하십니다.
지금, 예수 믿는다고, 예수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바람이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표현 같지만, 예수님이야 십자가를 지든 말든, 예수님이야 슬퍼하시든 말든, 예수님이야 아파하시든 말든, 예수님이야 죽든 말든, 내 것부터 챙기자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다 이루리라.” 하는 말씀에는 자다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큰 소리로 “아멘” 하면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는 이 앞서 들린 말씀은 못들은 척 눈감아 버리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쳐,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 받고 나면, 더 이상 예수님 따라갈 이유가 없어 돌아서버린 9명의 나병환자 같은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머리 위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고통스러워하시는데도, 그 밑에서 하나라도 내 것을 더 갖자고 서로 눈치를 살피며 제비뽑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달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따라가겠다고 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쓰면 침 뱉듯이 뱉어버리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 되어 가는 걸 보세요. 예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여러분의 삶을 보세요. 예수님이 얼마나 아파하시겠어요?
“어차피 날 위해 죽으신 건데 뭘. 그러니까 내가 복 받고 잘 되면 되는 거지.” 그리 생각하고 복 달라고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얼마나 아프실까, 그래서 눈물만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고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여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는 들어간다고, 그래서 누군가 “구원 받았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손을 번쩍 들다가도, 막상 주님을 위해 시간이든 물질이든 내 것을 내어놓을 때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이들이 누굽니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여러분!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구원받으려고요? 복 받으려고요?
“에이, 목사님. 전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전 구원 받으려고 예수 믿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러분! 그래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불 뱀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사람들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높이 달아서 누구든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뱀에 물려도 그것을 바라보면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래서 이미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또 예수님 보고 십자가 지라는 겁니까? 이미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불 뱀에 물렸지만 모세가 만들어 높이 단 놋뱀을 보고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쳐다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어떻든 그것을 쳐다보고 내가 살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럼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주어야지요.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해야지요. “보세요. 나도 불 뱀에 물려 죽을 뻔 했는데, 그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어요. 여기 상처를 보세요.” 그렇게 말해야지요.
“이 욕심꾸러기 같이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
“요나만도 못한 사람들!”
보세요. 요나는 그래도 억지로라도, 마지못해서라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잖아요. 그래서 니느웨가 구원받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불 뱀에 물렸지만 모세가 높이든 놋뱀을 보고 살아났는데도, 아무에게도 말 안하는 우리들이라면, 세상에 도둑놈치고 이런 도둑놈이 어디 있으면, 세상에 악한 사람치고 이런 악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구원 받았다고 장담해요? 그러면서도 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러니,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보면 얼마나 슬프시겠어요?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그런데 저는 그 십자가 위에서 아파하며 슬퍼하시는 예수님께서 잠시 기뻐하시는 순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평생 강도짓만 일삼아서 십자가의 극형으로 죽어야 하는 사람 둘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 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바로 이 고백을 듣는 순간이 예수님께 기쁨이 되는 순간인 겁니다.
지금 이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짠” 하고 내려가는 기적을 구한 것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기적을 구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그래서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기적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우리에게는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 말고……. 그러니까 오병이어로 5천명이 먹는다든지, 병자가 금방 깨끗하게 낫는다든지, 갑자기 사업이 번창한다든지……. 이런 기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그런 기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가 바라는 것은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나라에 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시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때, 그 아버지의 원,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십자가 위에서 그 아버지의 뜻이 실현되고 있는 겁니다.

평생 강도짓만 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극형에 처해서 죽어야 하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 그렇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계시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스스로 죄 없다고 여겼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의원에게 가야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려는 예수님께 가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 중에 달리셨는데, 그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은 예수님의 뜻에는 아랑곳없이 자기들의 욕심과 만족에 빠져 있는 겁니다.
바로 그때, 정말 죄인 중에 죄인인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호소한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고통 가운데서 간직한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그랬구나! 바로 이것이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그래서 예수님은 강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극형에 처한 강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 강도가 예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도가 그렇게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구원받았다면, 우리도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겁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며 믿을 때, 너무너무 기뻐하셨을 겁니다.
우린 잃어버린 양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헤매다가 결국 죽음이라는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떠난 탕자들이었습니다. 아들의 본분을 잃어버린 채, 죄의 종노릇 하다가 결국 죽음이라는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지옥이라는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우리 안에 있는 양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신 예수님.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바로 그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을 찾아오신 예수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가 당신을 믿으므로 구원 받았을 때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맞질 않고 있습니다.
한번 우리의 신앙을 돌아다보십시다.
예수 믿는다는 이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예수 믿는 그 자체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기 보다는 예수 믿으므로 주어지는 그 무엇이 있어야 감사하고 기뻐하고 헌신도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가지는 소망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그런 소망보다는, 내가 바라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런 소망 아닙니까?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늘 입버릇처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그 사랑은 또 어떠합니까?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이만큼 하면 주님께서도 이만큼 주실 거라는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하는 사랑입니까?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을 슬프게 하고 있는 겁니다.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정말, 예수님의 기쁨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십자가 위, 그 엄청난 고통 중에도 잠시 기뻐하신 예수님의 기쁨이 뭡니까?

그래요.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므로 그와 그의 집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도가 구원 받을 때, 비록 십자가의 고통 중이었지만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될 때 역시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셨거든요. 그래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거든요.
보세요. 예수님이 왜 심자가를 지셨습니까?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하늘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나로서 마지막입니까?

만약 처음 교인들이 여러분과 저와 같으면 우린 구원받지 못했을 겁니다. 아직도 복음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처음 교인들은 곳곳마다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생명까지 내어놓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받은 것도 예수님의 기쁨이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받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쁨인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기쁨보다 예수님의 기쁨을 위해 뭔가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쁨이 곧 자기들의 기쁨인 것을 경험한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대단하구나!” 그렇게 칭찬하시며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생각하고 매일 울고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철길에서 놀던 아이를 밀쳐서 살려내고 미처 피하지 못한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 따라 달려오는 기차에 들어가 죽으면 그 죽은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매일 철길에 앉아 울고만 있으면 죽은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습니까?
왜 아버지가 나를 살리셨을까? 그것도 당신의 생명을 버리면서 말입니다. 그것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평생 자기를 살리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십시다.

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 죄인인 사람들,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 잃어버려진 사람들,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 하나님을 떠나 있는 탕자 같은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어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 받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가 세워진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것도,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내게 육신을 주신 것도, 많든 적든 물질을 주신 것도,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인 것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불 뱀에 물려 죽을 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이 매달린 놋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 줍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산다고 이야기 해 줍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원 아닙니까?
우리가 만들어낸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애써 수고해서 이루어 놓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주어진 은혜가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을 우리 역시 모든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입 다물고 있으면 우리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약삭빠르게 놋뱀을 만들어 팔아서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은 더더욱 나쁜 사람입니다. 이들이 바로 강도들입니다.
주님을 이용하려 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이용하려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이용당하십시오. 교회로부터 이용당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곧 여러분의 복이요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십자가 위에서, 그 고통 중에서도 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주일 아침, 혹 때마다 우리가 이 예배당에 들어서면 예수님은 저 십자가 위에서 빙긋이 웃고 계십니다. 새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소개 할 때마다 예수님은 저 십자가 위에서 그 슬픔과 고통을 잊으신 채 환하게 웃으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 기쁨을 드립시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기쁨에 우리도 동참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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