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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직의 함정(1) (에 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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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지난주에 ‘바른 교회 아카데미’ 이사회를 하였습니다. 이사 중의 한 분이신 목사님이 당신이 쓰신 책 한권을 주셨습니다. 잠깐 시간이 있기에 머리말을 읽어 보았습니다. 충격적인 글이 있었습니다.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어떤 기자 하나가 ‘한국 교회는 불량품 같다’는 발언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느 목사나 교인 하나 그 말에 변명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는 불량품 같다’는 말에 참으로 부끄럽고 죄스럽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소리를 들을만한 일들이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 안에 있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쩌다 우리 한국 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식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과 류의 설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 잘못된 것이 없고, 또 그것이 사실 예수 믿는 중요한 이유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과연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적인 복인가를 이야기 해 주었어야 했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연보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잘 가르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주일 날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헌금과 봉사를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식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삶보다 말이 앞선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우리 한국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량품’이라는 치욕적인 말까지 듣는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저는 이름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교회의 이름은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 교회 이름이 참 좋습니다. ‘높은 뜻’이라는 표현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중히 여기며 높이겠다는 뜻과 의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그 동안 ‘높은 뜻’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식’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와 표현을 설교 중에 참 많이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정직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지지난주에도 ‘나의 방패는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다윗의 시편을 가지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설교에서 정직에 대한 이야기를 최근에 자주 하였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정직은 하나님의 식이어서 결국은 정직한 자가 형통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실제로 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교인들의 반응이 많았습니다.

불법은 물론이고 그 동안 생각 없이 행하던 작은 편법까지도 가급적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교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우리 교인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설교를 들으시는 많은 분으로부터 그에 대한 메일을 제법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고 당황스러운 일은, 물론 처음이기 때문에 그러리라 생각하지만, 그 때문에 형통하게 된 사람보다 어렵게 되고, 손해를 보고, 심지어는 망한 사람까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에 도전을 받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았습니다. 불법이라기보다는 편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거절하여 앉은 자리에서 수천 만 원을 손해 보았다는 교인으로부터,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끝까지 고집 피우고 거절하다가 결국 망하여 회사 문을 닫게 되었다는 젊은 집사님까지 참 여러 교인들이 정직에 대한 설교에 은혜를 받고 손해를 보았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한국 교회에도 아직 희망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참 마음이 답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형통’을 말씀하시고 나는 그것을 그대로 설교하였는데, 그 설교에 은혜를 받고 그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손해를 보고 심지어는 회사 문을 닫고 망하기까지 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참으로 심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생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순교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귀신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 온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하여 예수님은 뜻밖에 냉담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예수님께 조르자 예수님은 참으로 매정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줌이 마땅치 아니하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 취급하듯 하였는데 예수님이 그 옳지 않은 유대인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가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예수님을 변호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잘못된 유대인들과 똑같이 모욕하셨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예수님의 진심이 아니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 연극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주 속된 말로 쇼를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예수님은 진심에도 없는 모욕을 그 여인에게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 해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시하고 모욕을 해도 나에게 매어 달리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그와 같은 예수님의 테스트에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여 합격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여인의 딸은 즉시로 온전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때때로 정직한 자를 손해 보게 하시고, 손해 정도가 아니라 망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 망하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테스트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래도 나를 믿겠느냐? 이래도 하나님의 식대로 살겠느냐? 이래도 정직을 고집하겠느냐는 것을 알아보시려는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그 테스트에 합격하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들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칭찬하시고 우리에게 형통한 삶을 축복으로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에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테스트를 잘 통과하여 정말 말씀대로 형통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앞으로 그래서 정직을 고집하다가 회사 문을 닫은 우리 교회 그 집사님을 계속 지켜보고 그의 삶을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살다가 손해보고 어려움을 격고 회사 문을 닫고 망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축복하시는가를 두고 볼 작정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어느 정도 문제가 풀립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다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을 고집했던 사람들의 결과가 언제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되는가?’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문제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식을 고집하다가 일단 망했지만 결국에는 형통케 된 사람들도 있지만 개중에는 회복하지 못하고 끝까지 죽고 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순교자들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식을 고집하다가 목 베임을 당하고, 불태움을 당하고,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먹힘을 당하였습니다.

‘의인이 고난당할 때 도대체 하나님을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저는 지금도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부인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순교의 피가 흘려진 땅이 복을 받고 그 땅의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입니다. 우리 한국에는 수도 없이 많은 순교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로마의 학정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초대교회 교인들을 제외하고 아마 세계에서 몇 번째 안 꼽으리만큼 많은 순교의 피를 낸 것이 우리 한국 교회일 것입니다.

지나친 해석이라고 하실는지 모르나 하나님의 식인 정직을 고집하다가 회사 문을 닫고 망한 것도 일종의 순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순교의 피가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다시 살아나고, 그래야만 우리 민족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름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없듯이 영적인 거름 없이 영적인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정직한 자의 형통’이라는 농사를 짓기 위하여 우리는 ‘정직한 자의 고통’ ‘정직한 자의 억울함’ ‘정직한 자가 바보 됨’ ‘정직한 자의 실패’ ‘정직한 자의 눈물’ ‘정직한 자의 망함’이라고 하는 거름을 이 땅에 뿌려야 할 것입니다.

죽으면 결국 교회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하여도 죽으면 끝이 아니냐며 신사참배를 하고 살아남아 교회를 지키려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를 축복하고 지킨 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아니라 믿음을 위하여 순교한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이 교회의 거름이 되어 교회를 살리고 축복한 것이며 비겁하게 살아남은 우리들이 그 형통과 축복의 열매를 따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모두가 다 죽으면 끝이라 생각하고 일제와 타협하여 신사참배를 하였다면 과연 교회는 지켜 질 수 있었을까요?

정직하게 하나님의 식을 고집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정직에는 너무나 함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두 번 정도 더 ‘정직의 함정’에 대하여 설교를 할 작정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정직한 자의 순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정직의 함정 중 가장 큰 함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큰 뜻과 식은 ‘정직함의 결국은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형통의 열매를 누구나 다 당대에 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나는 그 열매를 따지 못하고 정직의 순교자로 정직의 함정에 빠져 매장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워서, 억울해서 순교를 거부한다면, 모두가 다 살아서 정직의 열매인 형통을 보겠다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영적인 박토가 되어 점점 더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그와 같은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 자손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정직의 고통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직의 고통보다 큰 것은 거짓의 고통입니다. 당장 죽지 않고 연명하기 위하여 거짓을 행하고 불의를 행하고 사는 세상은 얼마나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사망입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아크 발 샌프란시스코행 유나이티드 항공기 93편이 테러범들에게 납치 된 후 펜실베니아 들판에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납치된 비행기들은 펜타곤과 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하였지만 이 비행기는 들판에 추락하여 자신들만 희생을 당하고 다른 무고한 생명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비행기에는 토드 비머라는 승객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행기 좌석용 전화기를 통하여 교환원에게 승객 몇 명이 합세해서 테러범들에게 덤비려 한다는 상황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에게 ‘사랑 한다’는 말을 전해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을 암송한 후 전화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끊겨 지지 않고 매달려 잇는 전화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준비 되었소? 오케이. 갑시다” “Are you ready? OK. Let's Role !!!" 이것이 그들이 이 땅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토트 비머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부인인 리사 비머가 쓴 ‘나는 소망을 믿는다.’홍성사)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토드 비머도 죽었고, 펜타곤과 무역센타에 충돌한 비행기에 타고 있었던 승객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둘의 죽음을 똑같은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왜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죽어갔을까요? 토드 비머처럼 죽을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요? 저들은 죽어서도 그것이 얼마나 후회스럽고 부끄러웠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왕의 부름이 없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나아가면서 하였던 에스더의 유명한 이야기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말씀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은 없는 듯 싶습니다.

정직에는, 하나님의 뜻과 식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 첫째 함정은 ‘용기 없음’ 즉 ‘비겁 함’입니다. 그 함정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용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정직함을 율법주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는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직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식입니다. 정직하면 손해 보는 세상에서도 정직을 고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다 손해를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다닌다고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식대로 사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아무리 교회엘 열심히 다니고 봉사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세상 식대로 산다면 그는 엄밀한 의미의 크리스천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의를 위하여 받아야 할 핍박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 후손들이 복을 받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와 우리들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뜻과 식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습니다. 그 형통의 열매를 대개는 당대에 땁니다. 그러나 당대에는 그 형통의 열매를 따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후손들이 결국은 따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형통의 복을 물려주기 위하여 정직의 좁은 길을 고집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직의 첫째 함정인 ‘용기 없음’을 믿음으로 뛰어 넘어 정직한 자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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