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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심전력으로 주의 뜻을 이루는 삶 (느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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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종천 목사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계획과 행함이 하나님의 뜻에 합일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내가 비록 하나님의 합당한 뜻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거나 혹은 순조로이 잘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는 필연적인 어려움도 있고 간혹 우리마음에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아심이 들만큼 우리에게 큰 어려운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뜻을 이룬다는 것은 결국 이러저러한 고개와 고개를 넘어서 의의 뜻을 성취하는 극복의 역사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극복의 역사이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웬만큼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을 부여합니다. 꼭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합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별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누리게 되는 것 입니다. 저는 2005년 올 한해에 우리 민족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대로 어려움을 극복하여 더 큰 은혜와 기쁨과 진보의 지경으로 나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특별히 우리 분당중앙교회 성도들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시기적인 정황 속에서 어렵기 때문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고 어려운 지경 때문에 오히려 우뚝 서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예루살렘성벽 재건에 역사 중에 있었던 한 장면을 보고자 합니다. 갖은 어려움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들은 전심전력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느헤미야 총독과 예루살렘백성의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서 우리도 역시 올 한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전심전력하여 주의 뜻을 이루는 해로 삼고자 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을 잠시 설명해 드리면 아닥사스다 왕의 궁에서 관원으로 일하고 있던 느헤미야는 그의 조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의 성이 황폐해지고 훼파되는 이와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성문은 불타서 다 없어지고 예루살렘 도성을 황폐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됩니다. 그는 이와 같은 비보를 듣고 가슴 아파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던 차에 왕의 측근에서 누리는 영화를 마다하고 자청하여 당시에는 한직으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총독의 직책을 자원하여 떠납니다. 도착하여 신중한 연구와 결단 끝에 민족의 구군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온 백성들이 힘을 모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는 중에 그것을 결코 그냥 두지 않는 방해하는 산발랏과 암몬사람 도비야 일당의 방해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힘을 얻어가는 것을 보고 그들은 분노하며 조롱하고 비난하며 각종방해를 통해 중단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백성들과 느헤미야는 이게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두려움을 쫓아내고 지속적으로 그 일을 진행합니다. 성벽전체가 잇닿게 되고 고가 절반에 미치는 이와 같은 상태까지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장면입니다. 그 외에도 더 많은 모략과 중상과 괴계와 방해가 있었지만 꿋꿋이 이겨냅니다. 그리고 성벽이 다 완성된 후 예루살렘 수문에 앞에 모여 학사 에스라를 모셔 율법을 듣고 온 민족이 회개하여 영적인 대 부흥의 역사를 이루는 장면이 있게 됩니다.

이제 오늘은 예루살렘 성벽 건축의 과정 중 진행이 활발히 이루어 질 때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의 방해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그 일을 진행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성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모습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가 오늘 본문 속에서 첫 번째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필연적인 사단의 방해와 갖은 어려움이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불 시험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늘 4장 1절 이하를 보면 산발랏과 도비아 일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서 느헤미야의 지도를 받아 그 일을 이루는 것을 분노하고 비웃으며 조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자신의 계략대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분노하며 광포히 행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단의 분노는 곧 하나님 앞에 무너질 때를 앞당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분노하여 포효할 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근본적으로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 관한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 입니다. 나의 호흡과 나의 생사와 그리고 나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주관하는 것이기에 우리 인간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사단의 세력이 우리 마음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단의 횡포를 두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분노함 자체가 사단의 정체성을 드러낼 뿐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일이 잘되는 것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그것이 잘못되어 망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믿음대로 살면 사단은 분노합니다. 그리고 비웃고 조롱하며 광포해 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이 잘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뚝 세워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하는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일이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손끝하나 댈 수 없는 이와 같은 은총의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뻐하며 감사하며 으르렁거리는 사단의 포효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우리를 손끝하나 대지 못하는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그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비웃습니다. 자신의 하나님의 일을 망가뜨리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때 사단은 비웃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낙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웃는다는 것은 원래 자신이 없을 때 조소한다는 것은 자신이 없을 때 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있으면 절대 상대방을 절대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줘서 상대방이 세워져도 자신이 자신 있으면 오히려 격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은 어떡해서든지 상대방을 무너뜨리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적으로 위축되는 것을 외적으로 그와 같은 투사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비웃는 경우를 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주시고 사단의 세력이 오히려 초조해하고 있음을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수록 우리에게 조롱을 받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서광이 우리에게 비취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을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원래 어려움이 우리들에게 반복되어 가는 과정 속에 마침내 우리들에게 완성의 때가 다가오는 것을 봅니다. 실패와 실수가 반복할수록 그것을 통해서 승리와 성공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일반적인 모습을 생각을 해봅니다. 더욱이 사단은 동조자 들을 귀합 하여서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으려는 시도를 행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살다보면 정말 왜 우리 모든 일들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막으려고 하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단 말입니다. 왜 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고 내 삶의 성실을 다해서 내가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왜 내 길을 막는 사람들이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단의 세력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우뚝 서고 바로서고 정직하고 올바르고 힘을 얻어 사는 것을 방해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혼자의 힘으로 안 되면 주변 세력과 연합을 하지요. 오늘도 산발랏이 이와 같이 비난하고 조롱하고 나서니 도비아가 또 나서서 거기에 세력을 더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간교한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그들의 세력을 귀합하여 함을 만들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은 사단의 세력에 동조하는 무리가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선과 악의 쟁투의 장면이었음을 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백성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고 때로는 그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낙심을 줄때가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의 상태에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일어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성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실체를 잘 파악하여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밤에 사단이 몰래 와서 가라지를 뿌려놓는 다고 그랬어요. 일정기간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랍니다. 우리가 믿음대로 살면 아무 어려움이 없다라고 우리는 이야기 하지 않고 이제는 믿음대로 살아도 어려움이 있지만 믿음대로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능력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쁘게 지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백성은 믿음대로 살면 아무 어려움도 없어가 아니라 믿음대로 살면 어떤 어려움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만큼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힘과 은혜와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대로 살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충만한 능력과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글쎄 제가 느낌을 가지고 말씀드려서 죄송한데요 “목사는 항상 성령충만한 것 같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기 좀 곤란하시죠. “아 목사가 성령충만 하지 않다”고 어떻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까? 하고 생각하실 수 있겠죠? 그런데 제경우를 보니까 항상 성령충만 하지 못한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성령충만 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또 마음이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성도님들께 늘 기도부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저는 제자신이 영적인 힘이 소진되었을 때 우리 성도님들의 간구로 인해서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언제든지 느끼고 있습니다.

올해도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담임목사님 후원자로 하루에 15분씩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분이 한 2000명이 넘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참 그분들께 너무너무 감사해요. 물론 이제 교구 목사님 전도사님들이 “목사님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 해서 또 마지못해 쓰시는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한 2000명이 넘어서 이렇게 목사님 위해서 매일 15분씩 기도하겠습니다.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정말 목사로서 감사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 보면 제 마음에 이런 때가 느끼는 것 같아요. 제가 이교회에서 천번 넘게 설교를 했거든요. 공식적인 설교만 천 번이 넘게 설교를 했어요. 성경이 1754페이지에요.

그런데 여기서 천 번을 설교를 했으니까 거의 대부분 다 설교를 한 내용이겠죠. 그래서 성령 충만 하지 못할 때는요. 성경을 읽다 보면, 목사는 늘 성경을 읽으니까 뭐 모르는 부분도 더 많이 있지만 대부분 형식 적인 내용으로는 아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 내용을 봐. 도 새로운 깨달음이 없고 또 여기서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 이것도 설교한 거도 이것도 설교한 거고 뭐 설교 할게 없는 것 같아요. 그저 바라는 것이 있으면 성도들이 잊어버려 주기만을 바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성령충만 할 때는 어떠냐면요. 분명히 그 설교 여러 번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새로운 얘기들 또 마음에 은혜가 되고 또 설교하고 싶고 이렇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는 강단에 올라서는 게 “또 올라가야 되나”하는 마음의 부담이 되는데 성령충만 할때는 자꾸자꾸 빨리가서 이마음의 받은 은혜를 전해 주고 싶은 조급함이 생기게 되요. 그게 다른것 같아요.
정말 성경을 봐도 또 보고 또 본 성경이라도 날마다 새로운 은혜가 있어서 아 정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주시는 구나 목사가 먼저 마음의 은혜를 받고 마음에 은혜를 받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가서 그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은 말씀이 생각나는 거죠. 영적인 충전감 속에서 하나님의 힘을 누리고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 성도님들도 영적으로 굴곡이 있다 이 말입니다. 때로는 높은 상승기 때로는 하강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순간순간 때 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다시 인도하여 주셔서 정말 우리가 상승기에 있을 때는 그와 같은 영적인 충만함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이와 같은 하강기에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다시 영적인 충전을 주셔서 새로운 소망가운데 주님 앞에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과 은혜를 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집무실문을 딱 열고 들어갈 때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어떻게 매일 은혜를 끼칠 수 있는가하는 나약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나는 내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 전체에게 주는 것이니, 내 개인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이는 막대기 그 상태로 쓰여 질 뿐이다. 막대기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쓰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이전을 생각하면, 그래 이제까지도 이렇게 지내왔고 어떤 상황이나 장면이있어도 또 해쳐갈 것이고 승리해 갈 것이야 하는 마음이 들면 제 나름대로 어려움을 극복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고 다시 힘을 내서 순간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셨던 순간들 그와 같은 순간들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의 역사를 다시금 시작하는 역사를 체험하고 합니다. 정말 우리들이 살다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요. 어려움 속에서 때로는 우리가 위축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가 새로운 힘을 얻고 위축되는 상황가운데 새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비상하기도 하는 이와 같은 경우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성령의 역사인 것을 봅니다.

두 번째는 기도함으로 우리의 상황을 극복해 갑니다. 오늘 성경 4장 4절과 5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하나님 앞에 마음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그것을 능력화 하여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그 일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시고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 하였음이니이다.” 어려움이나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한탄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안정을 찾고 대처능력을 발휘해야 됩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때 잠시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저 특별한 생각 없이 이렇게 서있는데 그저 누가 몰래 와서 뒤에서 누가 확 밀었다고 해보세요. 넘어지겠어요? 넘어지지 않겠습니까? 넘어지는 게 당연한 겁니다. 갑자기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았는데 갑자기 누가 와서 악심을 품고 우리를 민다던가 갑자기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 이상해져서 갑자기 우리를 밀면 우리는 넘어 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성도도 충격을 받으면 그 순간 흠짓하고 충격을 흡수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엎드려저서 무릎도 까지고 팔굽고 까지고 코피가 난다 할지라도 다시 거기서 정신을 차리고 내가 일어나야지 하고 그 충격을 흡수한 후에 일어나서 다시 우리의 길을 뚜벅뚜벅 가게 되는 것이 믿음의백성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넘어뜨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왜 그랬어 그래서 마음이 편해? 그려면 안돼” 하고 여유있게 우리게 해량하고 타일러 줄 수 있는 이와 같은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승리할 수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하나님이 그 백성을 통해서 이루실 역사를 보여주실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 내가 넘어지게 됐을까? 왜 하나님의 은혜가 이 가운데 이런 방법으로 임하실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작은 어려움을 통하여 더 큰 어려움을 대비하게 하시는 것인가? 나에게 작은 고통을 통하여 더 큰 어려움을 대비하는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인 고통을 내게 제해주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 가운데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도 행동도 달라질 것입니다.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벌써 바른 방향을 잡은 것이니 그것은 이미 승기를 잡은 것과 같습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 있다면 마음의 승리를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모독과 해를 끼침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손에 맞기는 결연한 심정으로 중도에 포기치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고 그 사역을 완성해 나가고자 지내야 됩니다.

여러분 오늘 눈이 와서 길이 좀 미끄러우셨죠? 오늘 제가 새벽에 여기 오는데 눈이 와서 굉장히 미끄러운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굉장히 조심을 하고 왔어요. 저는 언제든지 뭐가 급하다고 생각 될 때 어렵다고 생각될 때 제가 언제든지 안전벨트 맺나 그다음에 내가 신호를 지키고 있나 하는 것에 대해서 늘 생각해요. 저도, 죄송합니다. 목사지만 급하면 빨리 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꼭 하는 것이 있어요. 기본적인 수칙을 지키고 있는가? 사고 나도 기분수칙은 지키고 사고 나야지. 제가 그런 생각을 늘 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어려울 때 정말 기본적인 수칙을 지켜야만 그 어려움 가운데도 당한 어려움을 최소화 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습관적으로 급하고 어려울 때 기본 수칙을 지키고 있는 가를 확인하고 그다음에 빨리 달려갑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내게 어려움이 있을 때 정말 내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역사 바로 그것이 바로 되어 있는가? 확인하고 정렬하고 어쩔 수 없어요. 어려우면 우리도 급하게 가기도 하고 어려운 가운데 헤매고 다닐 때도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기본적인 수칙과 사실에 확인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우리를 맡기고 그 다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해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에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맡길 뿐이고 우리는 그 가운데 내게 주어진 여건 가운데 묵묵히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내가 그 순간 하나님의 것으로 있어지는 하는 것입니다. 내게 어떤 어려움이 오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반듯하게 서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 이 말입니다. 때때로 우리마음에 심하게 낙심을 시키는 것이 있죠. 사단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면 그럴 수가 없어. 이 순간만은 너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어.’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얘기입니다. 우리를 누구도 하나님 외에 판단 할 수가 없어요. 만약에 우리를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것은 본인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니 그 말은 전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는 싫어 버리지 않으신다 이 말이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는 한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나를 판단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호흡하는 한 기회를 주셨다고 믿고 하나님 앞에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결국 승리라는 것은 영적인 자신감입니다. 단호하고 겸손한 자신감을 소요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동안 방해하는 세력을 만나거나 상황 혹은 마음을 겪게 될 때 때로는 의연히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히 승리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느헤미야는 결연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 하던 일을 중단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심정을 표현해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왜 어려운 일이 없겠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실행해야 되겠습니까? 이들이 재미로 10가지 재앙을 실행한 것이 아니에요. 한번 두번 세 번 네 번 다섯 여석 일곱 여덟 아홉 번 실행되어도 끄떡없어요. 그 나라가 다 망해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다시 일어납니다. 얼마나 질리겠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10번째 재앙까지 보여 줄 때 애굽 백성이 꺾어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할 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가나안에서 계속 앞으로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가운데 끊임없는 많은 전쟁이 이루어 져도 그들은 결국 가나안 정복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성취하고야 맙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축복을 누릴 자격을 갖추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영적인 확신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애쓰다 보면 결국 하나님의 뜻에 도달케 된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영적인 확신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애쓰다 보면.’ 이 세 가지예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영적인 확신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애쓰다 보면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게 됩니다. 기도라는 것은 항상 수세적인 입장에서 고통과 괴로운 가운데 그것을 참고 눈물 흘리고 아파하고 감내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고 또 우리의 어려움을 진실 되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냄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른뺨 때리면 왼 뺨 대라 라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자꾸 우리는 왠지 피해자 적인 이와 같은 마음 속에 피해를 받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오른뺨 때리면 왼 뺨 대라 라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의 상태를 얘기 하지요. 오른 뺨을 때릴 때 왼 뺨까지 대는 사람에게 정말 누가 감히 그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패배적인 삶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크고 여유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느헤미야의 기도는 매우 공격적 이예요. ‘하나님 정말 저 백성 저대로 망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이 마음에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로 막는다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그 일을 가로막는 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공의로 치리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살아있음을 보여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오히려 사단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 근원을 봉쇄하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능력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우리의 삶속에서 내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수세에 빠지고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마음으로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되고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여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용기와 소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징징거리고 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담대한 것 여유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여 한 수준 높이기 위해여 애쓰고 마음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간신히 헤쳐 나가는 성도가 아니라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성도들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서 정말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혀 있고 뒤에는 그들을 내보내고도 또다시 마음이 변하여서 추격하는 애굽의 병거와 군사들이 있어요. 꼼짝 할 수가 없어요. 앞에는 바다요 뒤에는 애굽의 병사들이 병거를 타고 와서 그들을 죽이려고 해요. 백성들은 오도 갈 때가 없어요. 그야말로 진퇴양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지 않습니까?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하시는 일을 보라.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홍해를 가르셨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시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애굽의 모든 군사들을 모두 수장해 버리고 마셨어요. 누구도 예측지 못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이 예측지 못했던 은혜까지 체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전심전력으로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지속해나갈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4장 6절을 보니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전 성경 읽을 때 이 장면을 보면요 특별히 마음에 감동되요. 따라서 합니다.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그 마음을 드렸다 이 말이에요. 정말 마음을 썼고 애를 썼고 전심전력하였고 정말 정성을 들였다는 것입니다. 방해나 조롱정도에 마음이 녹아지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끝까지 진행하여 결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일의 승패는 얼마나 좋은 여건에서 시작하였고 출발이 얼마나 훌륭했냐 만으로는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시작의 단계를 거쳐 어떻게 진행되고 또 어떻게 결과를 이루느냐로 결정됩니다. 출발이 좋으면 힘이 납니다. 그러나 결과는 초반이 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거쳐 마지막 결승선에 도착한 것으로 우승자를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다라는 전제하에 어려움 있다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헤쳐나가야 합니다. 비오면 ‘비오네.’ 눈오면 ‘눈오네.’ 바람불면 ‘바람부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우산을 준비하고 우리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우리는 마음의 각오를 가지며 우리는 추우면 우리는 추위를 가릴 수 있는 이와 같은 옷이나 도구를 마련하게 되면 됩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 오늘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 졌는데 눈이 왔다고 교회 안 오려는 분들 아마 없으시리라 생각해요. 눈이 오면 눈이 오는데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데로 날씨가 맑으면 날씨가 맑은 데로 거기에 대처해서 아마 오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일이라면 중단하지 않고 우리는 뚜벅뚜벅이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가고 가고 그리고 또 가야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는 겁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가고 가고 그리고 또 가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요. 가고 가고 그리고 또 가고 끝까지 가는 거예요. 결코 중도에 포기하고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해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이룬 경우라도 그 과정 중에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는 법입니다. 중단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역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어려움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다 라는 것은 극복하라는 뜻입니다.

언제든지 말씀 드리죠. 한번 따라서 합시다. ‘힘을 더 쏟으라 시간을 더 쏟으라 방법을 개선하라 기도하라 인내하며 기다리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라고 늘 생각합니다. 어렵다면 힘을 더 쏟고 시간을 더 쏟고 방법을 개선해보고 더 기도하며 그래도 안 될 때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지요.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을 당할 자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 속에 가니 우리가 이 세상 마치는 날 까지, 주의 뜻을 이룰 때 까지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위기를 극복한 자체가 축적되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되 그것은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구토록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마음 들여 역사했으니 어떤 일이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심전력하고 수고하고 애쓸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되요.

우리 분당중앙 교회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서로에게 힘을 얻어야 되요. 느헤미야와 예루살렘 백성은 서로 힘을 얻습니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로서 예루살렘 백성은 또 백성으로서 또 서로 백성 간에 힘을 얻으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그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서로에게 힘을 주시는 사람이 되야 되요. 서로에게 힘을 얻는 사람이 되야 되요.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 봅시다. ‘내가 당신에게 힘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요 힘만 빠지게 하는 데요.’ 이러면 안되구요. ‘맞아요 힘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남편은 아내에게 힘을 줄 수 있어야 되요. 또 남편은 아내에게 힘을 줄 수 있어야 되요. 또 부모는 자식에게 힘을 줄 수 있어야 되구요. 자식은 또 부모에게 힘을 줄 수 있어야 되요. 형제끼리 자매끼리 또 성도끼리 힘을 줄 수 있어야 되요.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가고 힘을 주어서 정말 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서로의 각자의 장면속에서 승리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 할 때와 그렇지 못 할 때 차이 하나 말씀드릴께요. 성령 충만 할 때는요 모든 상황에는 정말 그 일에 가능성도 있고 그 일에 불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일에 100%가능하다 100% 불가능 하다라는 것은 없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충만하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기쁨과 가능성이 확대되어져 보여요.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지 못할 때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능하지 못한 것 여러 가지 그냥 고통스러운 것 괴로운 것 이런 것만 확대되어져서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가능성은 점점 축소되어져 보이지 않는다 이 말이예요. 여러분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은혜만 보이고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우리들에게 있어지는 인생의 괴로움과 고통만 보이는 거예요.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눈앞에 어른거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말씀 드리고 제가 맺고자 합니다. 대단히 말씀드리기 쑥스러운데요

제가 요즘 목요일 마다 저희 교회 산에 가시는 분들과 더불어 이렇게 산행을 하게 됩니다. 저는 겨울에 산에 가기는 올해가 처음입니다. 예년에도 몇 번 있었지만 그저 몇 번 정도고 이렇게 정기적으로 가는 것은 처음인거 같아요. 몇 번 가는 거야 특별한 경우니까 그렇구요 그런데 가다보니까 상당히 춥더라구요 그래도 정한 것이니까 또 한번 시작했으면 끝까지는 하니까 이렇게 가다보는데 정말 춥더라구요.

저는 추운걸 정말 좋아하지 않거든요 여러분 추운거 좋아하세요? 저는 추운걸 좋아하지 않는데 되에다 물 매달고 가면 그게 어는 게 그냥 살얼음 어는 것이 아니라 내려올 때 보면 꽝꽝 얼어져 있더라구요. 그리고요 이렇게 마스크 잠시 벗어놓으면 그게 얼고 그 다음에 땀나서 여기다가 수건 매고 가면 그것 풀어놓으면 그게 또 얼더라고요. 그래도 산에 가면 사람들이 꽤 많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만큼 지내다 보니까 추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없어지더라고요. ‘에이, 추워봐야 한 영하 20도 되겠나?’ 그런 생각이 들고 추위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더라고요. ‘아이 눈이 오면 눈 오는 데로 가는 것이고 비오면 비오는 데로 가는 것이고 또 추우면 춥고 또 더우면 더운 데로 가는 것이지.’ 생각하니까 정말 봄 여름 가을 겨울 상관없이 다 그 가운데 기쁨이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겨울에 뭐 원래 걸으면 땀이 나는 것이니까요. 겨울에 몸은 더워지고 밖은 시원하고 하니까 더 좋은 면도 참 많이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좀 더 추워지면 좀 더 준비하면 될 뿐이지 하고 마음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제 마음에 어떤 두려움이 없어지고 도전의 한계가 점점 더 넓어지는 것 같아요.
역시 어려움을 겪어야 도전 정신도 생기고 또 수준도 높아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감도 생기고 한번 하면 능력이다 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무슨 생각이 드냐 하면 ‘아 이제 내가 좀 암벽 등산을 배워서 본격적으로 암벽등산을 해야 되겠다.’ 요즘 이런 마음이 자꾸 들어요.
그래서 제가 암벽등산을 본격적으로 배워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나더라고요 전에 신문을 봤더니요 뭐가 나오냐 하면 겨울 야간 빙벽 등산 이런 게 이렇게 나왔는데 그걸 보는 순간 ‘ 야 이건 내가 해야 될 일이다.’ 요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겨울에 폭포 같은데 빙벽이 생기는데 그걸 가지고 그것도 밤에 하더라고요. 아마 밤에 해야 더 위험하고 어려우니까 더 아마 마음에 소망이 생기는 가 봐요. 저는 그걸 좀 한번 하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좀 배워서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지경이 점점 나아가는 거예요. 요새 제가 재일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뭐지 압니까? 목사가 체신없다 그럴까봐 제가 못하고 있는데요. 제가 요즘 번지 점프를 하고 싶어요. 그런 것 굉장히 재미있을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좀 어디 몰래가서 한번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성도들 보는데 목사가 그러면 괜히 체신없을 것 같고 그래서, 그리고 무슨일이 하고 싶으냐면 행글라이딩이나 스카이다이빙 이런 거 하고 싶더라구요. 언제 그런거 해도 말리지 마세요 여러분들. 제가 보니까 한계가 점점 넓어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 제가 안하던 것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고 싶은 한계들이 점점 더 넓어지는 것 같아요. 제가 그래서 요즘 익스트림 스포츠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주어진 여건 가운데 위축되기 시작하면 한없이 왜소해 져요. 정말 우리의 삶이 너무너무 초라해 지는 것 같아요. ‘ 아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아! 난 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너무 초라해 지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마음의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우리의 한계의 지평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 무대는 또 한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들에게 있어선 나이도 문제가 아니고 내 지금의 여건의 문제도 아니고 내게 있어서 모든 주변의 사람도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딱 하나 내 마음인거 같아요. 그런데 마음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을 믿고 마음의 확신을 가지는 순간 우리의 삶의 영역은 한없이 확장되는 겁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어떠한 방해를 받아도 어떠한 고통을 겪어도 전심전력하여 우리의 삶속에 주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삶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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