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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신앙, 내 인생(창 19: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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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공동체를 만나게 됩니다. 국가와 민족과 사회, 교회와 교인들, 가족과 친척, 동기나 친구 등 많은 집단을 통해 위대하고 훌륭한 인격이나 능력이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좋은 영향을 받고 동화되어 훌륭하게 멋지게 인생을 펼쳐나가면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반면에 좋은 사람들 틈 속에서 자기가 자동적으로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인 양 착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어렵게 난관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해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놓은 부모의 2세들이나,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 형제들에 의존하여 살아가다가 전혀 자신은 자기 스스로의 존재와 위치를 지켜나가지 못하고 내 신앙, 내 인생을 멋지고 훌륭하게 펼쳐나가지 못하는 형제들도 많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깜깜한 밤중에 차를 운행하는 운전자가 다른 차들이 켠 불빛에 헤드라이트를 비췰 필요가 없이 잘 갔다면 잘 한 일일까요? 만약에 헤드라이트가 필요한 곳인데 켜지 않고 그 어둠을 갔더라면 무슨 사고가 났겠습니까? 이런 인생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가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불빛을 따라 가는 자처럼 가족이나 주위의 사람들의 신앙의 행로를 좇아서 자기도 모르게 가면서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속한 단체의 열성적인 신앙과 함께 어울리면서 나는 좋은 믿음, 특별한 믿음을 가졌다고 착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다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열심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나는 좋은 교인"이라고 착각하다가 그 주변들이 사라지고 홀로 남을 때 암담함을 경험하는 미숙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오늘 읽은 성경의 롯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걸음을 걸을 때 옆에서 함께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본토 친척을 떠났습니다. 그런가하면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날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처럼 잘 달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그 땅에 아브라함이 서는 것을 보고 함께 섰습니다. 문제 없는 완전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소 떼와 양 떼의 숫자가 많아져서 아브라함과 롯의 하인들이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서 “우리 싸우지 말자. 그 대신 우리가 경계를 하나 만들어서 서로 그 안에서 목초지를 만들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겠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이 롯은 늘 목초지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두말할 것도 없이 늘 물이 있고 목초지가 풍성한 요단 들녘을 선택하면서 "여기가 내 땅"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용히 떠나서 헤브론 산지에 거하면서 그 깡마른 땅이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헤브론이라는 말은 '교제'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 말은 아브라함이 거기서 살게 된 다음에 붙여진 별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롯은 그 곳의 영적인 분위기가 어떠한가요? 아무런 생각 없이 단지 자기 가축의 먹이를 중심으로 해서 그 인생을 결정해버리고 맙니다. 그는 자기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는 좀 압니다.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후서 2장 보면 소돔 땅에 거하면서 그가 심령이 상할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소돔 사람들에 비해서는 그래도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살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신앙을 확실하게 확인할 기회가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가셨는데 그의 환대를 받으신 다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실 약속을 거듭하시면서 "내가 하는 일을 나의 벗 아브라함에게 숨길 수가 있느냐? 내가 저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망시키겠다"고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 아닙니까? 그 속에 있는 의인들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겠습니까? 하나님, 그 속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50인을 인해서 그 성을 사하리라" "그 중에 다섯 명을 빼면요, 그 중에 40명이 있으면요? 그 중에 30명, 20명, 10명이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성에 임할 화를 면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천사는 그 땅의 죄악을 정확하게 점검하시기 위해서 찾아가셨습니다. 그 때 성문에 앉아있었던 롯은 오는 두 사람, 나그네를 보고는 그 앞에 나아갑니다. 18장에도 아브라함이 손님을 향해 힘껏 인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 롯도 나가서 땅에 머리를 대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주여 우리 집에 유하사이다” 이것은 당시의 교양 있고 덕 있는 사람들의 삶의 행태였습니다. 롯은 강청해서 집으로 그 분들을 모셔왔습니다. 그 밤입니다. 소돔 땅에 무론 대소하고 동네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오늘 낮에 들어간 젊은 남자들이 잘 생기고 예쁘던데 그 남자 둘을 내놓아라. 우리가 상관하겠다" 그러니까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집단으로 이 젊은 두 남자를 성폭행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때 롯은 그들에게 제안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은 손대지 말라."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게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이 있으니까 이 두 딸을 데려다가 마음대로 하라." 딸 둘을 내주겠다고 롯이 타협하고 있습니다. 이 악 대신에 다른 악을 택하고 있습니다.

반면 원칙을 붙잡으면 어느 때나 원칙을 지키는 훌륭한 신앙의 사람도 있고, 쉽게 그 때 한번 주님 앞에 충성하고 주님 말씀대로 살았으니까 지금은 안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가진 원리를 버리라고 요구하는 요구 앞에 우리들은 쉽게 무너지고 그 악을 거절하는 대신에 다른 악으로 대치하려고 드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홀로 온전하게 서있지 못하는 신앙은 이렇게 타협합니다. 내 삶 속에서 신앙에 타협하는 부분은 없습니까? 으까 지금은 안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너지고 그 악을 거절하는

롯이 폭도들에게 나가서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이 외칩니다. "밖에서 굴러들어온 놈이 지금까지 우리의 재판장 노릇하더니 지금도 또 네가 재판장이냐?" 여기 성경 본문에 "네가 우리의 재판장으로 있었도다" 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는 말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는 나름대로 그 죄악에 동참하지 않고 틀렸다고 자기 의견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 앞에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이 롯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저들의 눈을 멀게 하는 기적으로 이 롯의 집을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천사는 말합니다. "너는 지금 빨리 떠나라. 도망치되 뒤돌아보지 말아라. 뒤돌아보지 않되 평지에 있지 말고 산으로 올라가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이 땅에 임한다." 그를 권면하지만 "롯은 지체하더니"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확립된 신앙을 갖지 못한 성도들이 하는 행태 중의 하나가 지체, 즉 자꾸만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나서 십일조에 대해 성경에서 읽다가 십일조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지만 그 때 사람들이 이렇게 변명하면서 지체합니다. '지금은 너무 생활비가 빠듯하니까 나중에 이만큼 재산을 모은 다음에 십일조 하겠다. 차차하겠다.' 이 지체는 사탄의 무서운 함정입니다.

어느 날 사탄들이 모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타락시킬까 의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 재물을 다 빼앗아 버리십시오. 그러면 예수 믿으면 손해나니까 하나님 안 믿겠습니다."라고 말할 거라고 한 마귀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늙은 마귀가 그것 가지고 어림없다고, 이 세상 돌아다녀보라고, 돈 많은 사람들은 예수 잘 안 믿지만 가난한 사람은 오직 주님만 믿는다고, 하나님 밖에 믿을 것 더 있겠느냐고, 전심으로 믿어서 그것은 안 된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상하게 돈만 가지면 예수 잘 안 믿으려고 들어요. 두 번 째 마귀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혼을 내주라. 그러면 고통스러워서 예수 안 믿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늙은 마귀가 또 말합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저들이 고통당하면서 "내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해서 하늘에 상급이 있도다"며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젊은 마귀가 제안하기를 "그러면 당장 그 놈들 죽이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늙은 마귀가 그것 갖고는 어림없다. 죽으면 그 사람들 천국 갈 텐데 얼마나 좋아하겠느냐고? 그래서 일단 침묵기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구나."하고 포기 하자 그 때 늙은 마귀가 꼭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면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차 하겠다고 뒤로 미루고 지체하게만 만들라"고 말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도 순종하지 않고 지체하는 사람도 자기 신앙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가 지체할 때 하나님께서 저들의 손을 붙잡고 함께 나갑니다. 여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16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은 저들의 손을 붙잡고 끌고 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을 진멸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순종해서 지금 그 성을 빠져나갑니다. 한참 가다가 롯이 이렇게 제안합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이 가라는 저 산은 너무 높습니다. 내가 거기까지 갈 건강도 안 되고 또 거기는 맹수도 나타나고 도적들도 있어서 무슨 위험을 당할지 모르겠고 특별히 내가 힘이 붙여서 거기까지 가지 못하니까 저 평지 가에 조그마한 성읍, 그 성읍에 나를 머물게 해주옵소서” 이 적다는 말이 우리말로는 소알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적다는 뜻입니다. 이 적은 곳에 머물게 해달라고 강청을 하고 순종을 하지만 전적인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중간한 순종을 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저들의 영혼을 보호해 주십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네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롯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인자하심을 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을 향해서 손으로 잡아끄시는 여호와의 손길을 봅니다. 그런가하면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단 한 명의 의인,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도 아무렇게나 할 수 없으신 하나님은 참으로 섬세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멸망의 시간에 하나님은 단 한 사람의 죄인도 남김없이 멸망시키겠지만 단 한 사람의 의인도 멸망당하지 않도록 구원하실 섬세하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가하면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건이 있는데 29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이 구원이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 의인의 생애를 통해서 놀라운 구원 역사를 행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인생을 오랫동안 살아오신 부모님들 가운데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많은 회한이 있고 다음과 같은 마음의 깊은 좌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처럼 돈을 많이 못 벌었기 때문에 내가 자녀들에게 해줄 것을 원 없이 못해주었다는 이런 마음 한 구석의 깊은 좌절을 맛본 부모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꼭 부자가 좋은 것 아닙니다. 엄청난 부자들 가운데 도깨비 같이 사는 가정도 많습니다. 형제가 전부 배가 다를 뿐만 아니라 바쁘다는 이유로 그 엄청난 돈을 마음대로 쓰라고 돈으로 보상하는가 하면 자기 자식의 모든 문제를 다 현찰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한 인격이 인격으로 만날 틈도 또 아름답게 교제할 가정의 축복도 빼앗기는 것이 돈을 많이 가지고 살아가는 삶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형제들은 유산을 누가 더 많이 받나? 마음에 무서운 칼을 들고 상대편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죽이는 무서운 싸움을 합니다. 그러기에 돈 많은 것이 꼭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당히 가진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이 할 것 있다면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롯을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 부모님의 기도가 있는 한 우리 자녀들은 멸망당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고 롯을 기억하신 하나님, 다윗을 기억하사 예루살렘에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기를 그처럼 열망하셨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한, 하나님 앞에 서 무릎 꿇는 기도가 쉬어지지 않는 한 우리 기도 속에 자녀의 삶은 복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대의 것입니다. 없다고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돈은 내 자녀를 타락시킬 수 있지만 기도는 내 자녀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말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그 자녀는 결코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여기 롯을 구원하신 하나님, 의인인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들 살아오시면서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안주었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그 연약한 믿음이 구원받았습니다. 아니, 저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땅의 멸망까지 지체하시면서 우리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배후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산 신앙, 그를 향한 간절한 기도가 있었고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남에 의해서 비춰졌던 신앙이었기 때문에 자기 빛이 없어서 비춰줄 수가 없었습니다. 구원을 열심히 설득하려고 사위에게 갔더니 사위는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사위는 저 무너지는 세상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 아내는 소낙비처럼 유황불이 쏟아지는 그 시간에 이제까지 쌓아올렸던 부가 한꺼번에 없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아까워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그의 딸들이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무너진, 불타버린 저 세상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이 결혼할 상대가 없어졌다 해서 두 딸들이 자기 아버지를 욕보인 사건, 그래서 공개석상에서는 이 성경은 읽을 수 없는 성경 장면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의 기록에 롯이 빠져있는 것을 보면 너무 부끄러워서 구원은 받았지만 자기 삼촌 아브라함에게도 갈 수 없는 인생이 되었나 봅니다.

우리가 집 짓는 것으로 인생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터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터전입니다. 그리고 설계도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설계도입니다. 그 설계도 따라 내 인생이 지어져갑니다. 그런데 자료 선택은 내가 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불변하는 금 같은 믿음으로 자기 인생을 짓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보석처럼 빛나는 선행으로 자기 인생을 짓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순전한 은 같은 것으로 자기 인생을 지어가고 어떤 사람은 풀이나 짚으로 얼기설기 집을 짓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어떤 재료를 선택해도 내 인생의 집이 지어지는 것이 비극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준공 검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준공검사를 하는 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때입니다. 준공 검사 불의 심판이 끝나면 어떤 사람은 불에 타지 않는 아름다운 것이 우뚝우뚝 서 있습니다. 칭찬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한 편의 사람들은 자기는 잘 세웠다고 자랑했는데 그것이 깡그리 타버리는 인생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구원, 마치 이 롯이 구원 얻는 것 같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사람이 있겠다고 합니다. 그 무서운 불의 심판이 우리 앞에 올 때 내가 지금껏 살았던 것 중에 불의 심판을 이기고 우뚝 서서 남아있을 것이 무엇입니까? 내 재산? 다 불에 탈 것입니다. 학위증서? 불과 함께 날라 갈 것입니다. 명성? 그것은 불까지 필요 없습니다. 바람만 불어도 날라 가는 것이 명성입니다. 신앙은 가졌지만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하다가 구원을 얻었지만 부끄러운 구원 얻은 롯을 보면서 내 신앙은 확실하게 서 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는 분명합니까?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불로 심판할 때 타지 않을 것으로 내 인생이 지어져 가고 있습니까?

정말 타지 않을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내가 안 없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타는 것이 있다면 아마 구원 받은 분들의 장애가 탈 것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잘 단장해서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점과 티는 불에 탑니다. 점과 티도 흠도 없이 살라는 요구는 그래서 우리에게 계속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내가 전도한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갈 때 그 영혼은 안 없어지고 하나님 앞에 갑니다. 선교 헌금을 열심히 하신 분들은 천국에서 상상 못 할 사건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종족들이 뛰어와서 목을 껴안고 "당신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본 적도 없는데?" "당신이 헌금하고 기도해주었던 그 선교사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천국에 가서 안 없어지는 것은 내가 이 땅을 살면서 사랑했던 아름다운 추억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없어지지만 사랑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인생을 성공한 사람의 척도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쌓았는가가 아니가 내가 얼마나 사랑을 넓게 많이 했는가? 입니다. 부자 개념이 달라져야 됩니다. 없어지지 않는 것들을 쌓아야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떨어지지 않는 축복입니다. 아마 이 땅에 살면서 사랑의 영광을 많이 가지고, 그 추억을 가지고 간 사람은 주님 앞에서 영원히 즐거울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 즐거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4천 년 전의 한 사건을 보면서 남의 신앙을 의존해서 따라갔던 삶의 비극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내 신앙, 내 믿음으로 내 인생을 꿋꿋하게 달리다가 주님 앞에 설 때 영광의 구원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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