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의 다림줄 (고전 8:1-13)

  • 잡초 잡초
  • 651
  • 0

첨부 1


- 설교 : 신동수 목사

여러분 혹시 다림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린 시절, 저의 동네에는 이따금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목수가 연장 통을 열고 처음 꺼내는 것이 이것이지요. 어린 저의 눈에는 무척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 건축현장에 아르바이트를 갔을 때, 드디어 그것을 가까이서 자세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노란 금속으로 된 원뿔 같이 생긴 무거운 추가 달린 줄인데 목수가 원뿔의 끝을 기준 점에 늘어뜨려서 팽팽해진 줄에 기둥이나 벽이 똑바른지 맞추어 보기도 하고 새로 세워질 기둥이나 벽을 미리 어림잡아보기도 하는 기구입니다. 이 다림줄을 잘 다룰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큰 목수가 되고 안되고 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다림줄을 잘못 띄워 놓고 일을 시작하면 한나절 땀흘린 일이 헛일이 되어 그만 애써 세운 기둥이나 담을 아예 헐어버리고 새로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도 각각 자신의 신앙을 이루어 가는 나름대로의 다림줄을 그 내면에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신앙에 기준이 되는 다림줄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땀 흘린 수고가 허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

오늘 읽은 성경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고린도교회에도 신앙의 다림줄이 잘못되어서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고린도교회는 A. D. 50년경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 시대에 고린도는 상업의 중심지였고 학문도 성행했으며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번창한 대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가 극심하였고, 음란한 제의로 인한 방탕함이 사회전체에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환경으로 인하여 고린도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고린도를 떠나있던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고린도서를 통해 여러 문제들에 대한 바른 신앙적 교훈을 전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문제들 중에서 우상의 제물로 일어난 문제를 다룹니다

율법의 다림줄

당시 고린도에서는 사람들의 모임이 주로 신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종교생활에서 필수적인 부분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제의에 사용된 음식물들을 사제들이 처분하였으나 다 처분하지 못하고 남은 제물들은 시장에서 판매하였습니다. 제의에 사용되지 아니한 고기도 있었으므로 교인들이 거리낌없이 시장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 있었지만 사실 제물과 순수한 음식을 구별하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러한 상황으로 곤란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를 우상과 타협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여전히 율법도 지켜야한다고 믿었습니다 본문 4-9절을 보면,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며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갖지 못하여 자유함이 약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사람들 마음에는 예수님뿐 아니라 율법의 다림줄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의 다림줄

그런데 이 율법의 다림줄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의 눈에 몹시 거슬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식의 다림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1절에서 언급한 이른바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상이란 아무런 실존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도 그의 견해에 동의하며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근본적인 진리에 의하면 이 땅에서 신들이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온 세상 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우주만물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주인이십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 세상에는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이 신으로 존재하며 모든 우상은 생명이 없는 물체에 불과하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전혀 고려치 아니하고 우상의 제물을 그들 앞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먹음으로써, 아직 이방신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신이라고 여기던 연약한 신앙인 들에게 큰 신앙적 부담과 정신적 고통을 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비록 바른 지식 위에 서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을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치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 지식은 성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주신 것이지만 본질적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의 몇몇 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는 마치 이 지식을 자신들만의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에게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를 배려해서 조심하는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사랑의 다림줄

바울은 이제 사랑의 다림줄을 권합니다. 바울은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3절)고 말하며 지식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참된 지식 안에 거할 것을 촉구합니다. 참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른 지식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로 사랑을 소개합니다. 즉 모든 지식은 사랑의 원리에 의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의 지식을 먼저 깨우쳤던 몇몇의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사랑의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그렇게 성급하게 복음의 자유만을 누리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자유를 누리기 전에 자유 함이 약한 신앙인 들에게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고, 그들에게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 마음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 함이 약한 사람들의 신앙적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어떤 고통을 받든 관계없이 자신들의 자유를 만끽하는데 도취되어 결과적으로 많은 영혼들을 실족케 했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 바울은 형제에 대하여 죄는 짓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 이라고 강하게 책망합니다. 약한 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셨는데 사랑 없는 지식으로 약한 자를 멸망시키게 된다면 결국 그리스도께 범죄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식의 다림줄을 가진 이들에게 자신의 신앙결단을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그가 우상 제물을 먹음으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형제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에게는 사랑의 다림줄이 있었습니다.
포기의 다림줄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다림줄에 배설물처럼 보인 것들이 나의 눈에는 보화처럼 보이지 않는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앞에서 염려스럽게 돌아봅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