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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 (행 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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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필재 목사

『죄와 벌』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러시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위기의 때를 만난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1849년 그가 28세 되던 해에 폐르라쇄프스키라는 정치서클 활동사건이 발각되어서 국가 내란 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정대로 사형을 당해야 되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영하 50도 강추위 속 벌판 기둥에 묶여 사형을 당해야 됩니다. 이제 그 땅에 살 수 있는 시간은 정확히 5분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5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2분 동안은 현장까지 찾아와 준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사용하겠다. 그리고 또 2분 정도는 28년 살아온 나의 인생을 한번 회고해 보자. 그리고 마지막 1분은 내가 살던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과 하늘을 바라보면서 죽자.’ 그는 생각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자기 28년 인생을 한번 돌아보는데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하고 정신이 아득해 집니다. 그때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랬느냐?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고 정신이 아찔하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형 집행장에 총알 장진하는 소리가 ‘철커덕’하고 들러왔을 때 그는 이미 죽기도 전에 쓰러져서 아무 것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한 병사가 하얀 손수건을 급히 흔들면서 사형장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황제의 명령이다! 사형대신 시베리아로 귀향을 보내라는 급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귀향은 갔지만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얻어졌습니다. 귀향을 가서 있는 동안 역사가 바뀌어 풀려나 작가 활동을 평생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항상 생각한 것이 ‘죽음에 선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늘 생각한 일이 ‘내 인생의 마지막 5분! 내 인생의 위기 처리!’ 그런 마음으로『죄와 벌』이라는 책을 써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가 만난 생사를 가름하는 위기가 오히려 그에게 영혼을 깨우는 큰 축복의 시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스데반이 죽음 앞에 섰을 때 되어진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6장 마지막인데 7장에 가서 스데반은 죽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스데반을 평가하는 말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8절에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나타난 많은 일을 보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부분이 평신도 사역의 특수성입니다. 평신도들이 큰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집사님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수 은사적 사건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특별히 나타나는 두 집사님이 있습니다. ‘스데반’과 ‘빌립’입니다. 이 스데반 집사는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혈통은 유대인인데 헬라 문화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지금 본국으로 돌아와서 살고 있는 사람인데, 최초의 초대교회 집사가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최초가 두 가지입니다. 최초의 집사가 되었고,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피 흘리며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영적 헌신이 됩니다.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쓰셔야 되는 일로서 스데반은 기독교에서 순교 당했다고 하는 그 많은 순교자 가운데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함으로 기독교 순교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 집사는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본국에 돌아갈 때 빌립이 그를 만나서 길가에서 집사님이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줌으로 에디오피아 선교에 기초를 놓게 되는 이 사람의 사도적 사역이 조명되고 있습니다.

오늘 8절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스데반의 객관적 모습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에게 나타난 권능이 도대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은혜’에 대한 개념은 “주님으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값없이 받은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권능’이라고 말할 때는 “받은 은혜가 바깥으로 표현되는 눈에 볼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은혜가 충만하다는 말을 물량적으로 표현하면 마치 그릇에다 물을 부어서 그 물이 넘쳐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상태 이것이 “은혜가 충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충만한 은혜가 권능으로 나타나니까 기사와 표적,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에 스데반 집사가 이렇게 큰 인물로 부각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본래 평신도 사역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집사님입니다. 구제 활동을 위해서 교인들의 추천을 받은 헬라파 유대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은 집사님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사도들이 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보다도 앞서 순교자가 됨으로 사도들이 그 집사님을 보고 담대함을 얻어서 더욱 전도 사역에 충실하게 되는 동기를 부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사도행전에 아주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실 때에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 권능이 스데반에게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그 직전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변명이나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담대히 말하고 있는 권능이 스데반에게서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오늘 9절 말씀에 여러 지역 이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리버디노,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같은 많은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합동해서 지금 스데반을 핍박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권 안에 들어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헬라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시면 큰 문화재 건물의 문짝들은 다 헬라 문화권에서 뺏어다가 건축한 것들입니다. 정치는 로마요, 문화는 헬라인데 종교는 유대 종교입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유대 백성들의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흩어지는 백성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하노라”라고 했습니다. 흩어져 사는 민족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혈통은 이스라엘 나라에 420만 밖에 안 됩니다. 아랍 계통 사람들이 와서 귀화했기 때문에 80만이 더해서 500만 인구를 가지고 있는데, 밖에서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훨씬 더 많습니다. 미국에만도 600만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나타나는 여러 지방은 바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헬라 문화권 안에서 살다가 본국에 돌아온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스데반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스데반과 이 지방 사람들은 다 한 문화권 안에서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들과 변론을 할 수 있을 만큼 말이 잘 통했습니다.

리버디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B.C 53년에 대량의 인구가 로마에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들입니다. 처음에는 노예로 갔다가 후에 자유인이 되어서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로마어 가운데 ‘리베르티누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영어로 번역이 할 때 ‘리버티 (Liberty)’라고 자유를 말합니다. 리버디노는 리베르티누스들 그러니까 노예로 끌려갔다가 리버티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장소가 리버디노로서 거기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 구레네인은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구레네시에 살던 유대인들인데, 구레네시 인구의 4분의1이 유대인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6절에 구레네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잠시 동안 대신 지고 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구레네 사람들과 유대는 늘 오고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인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유대인들입니다. 여기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이 살았는지 약10만의 인구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고국을 왕래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또, 길리기아인은 소아시아 동부 지금의 터키 땅인데 바울 선생의 고향입니다. 헬라 문화권이며 헬라파 유대인이 거기에서 또 많이 살았습니다. 아시아인은 주로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지방 사람들입니다. 이런 많은 사람들이 지금 스데반에게 몰려들어서 자기들과 같은 문화권의 언어들로 집중적으로 핍박하면서 변론했다는 것이 지금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데반의 또 하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10절에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이런 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에 대표성 있는 인물들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들은 거의가 다 말을 잘 하지 못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약점으로 몇 번이나 하나님께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합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말에 능치 못하오니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바울 선생도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6절에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울도 말을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큰 성업을 성취했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졸한 말과 더듬는 말일찌라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스데반도 그 많은 헬라 문화권의 능변가들이 와서 말을 하지만 능히 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있다고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권위가 나타나니까 그를 처리할 길이 없어진 이들은 이제 물리적 힘을 가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12절을 보면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공회는 대한민국으로 말하면 대법원이요 국회 청문회요 청와대 국무회의요 과거는 중앙정보부 같은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여기에 잡아다가 스데반의 잘못을 만들어 죽일려고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공회에 가면 끝나는 것입니다. 종교재판에 회부합니다. 마지막 예수님도 이 자리에서 십자가 처형이 결정되고 집행된 것입니다. 거기에 잡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죄 몫이 13절에 나옵니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려 말하였다.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도다.”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이 자리에 잡아다 놓고도 예수의 죄 몫은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거친 율법 질문 앞에 답변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 역사에는 복음이 종교 안에 사로잡힐 때 본래의 능력을 상실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죽여 버린 사건입니다. 율법주의라고 하는 종교의 틀을 만들어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기에 가두어 버리니까 본래의 능력은 상실이 되고 진리이신 예수는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예수의 복음 진리를 선포합니다. 방법은 율법주의라는 종교의 틀 속에다 이 스데반을 가두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와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까지 동원해서 진리의 입에다 자물쇠를 잠그고 꼼짝 못하게 합니다. 다음 장에 보면 스데반은 돌에 맞아 쓰러지게 됩니다. 종교가 진리를 죽인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도그마(Dogma)’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교리, 신조라는 의미입니다. 도그마는 절대 필요합니다. 어느 교단이나 어느 교회나 도그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전을 해서 도그마티즘(Dogmatism)이 되면 무서운 종교의 위험을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장로들은 다 이런 도그마티즘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그마티스트(Dogmatist)가 되었습니다.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집단을 만들어놓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교단은 도그마티즘에 빠졌기 때문에 이것 밖에 없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도그마에 복음과 진리를 가두어놓고 예수를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도그마에 어긋난다고 해서 끌고 가서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복음과 진리를 종교의 틀 안에 가두는 것이 죄가 됩니다. 큰 위험이 옵니다.

안식일에 길을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하나 따서 먹은 것은 복음 안에서는 아무 죄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교단이 가지고 있던 도그마티즘으로 보면 때려죽일 죄가 됩니다.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서워집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은 복음으로서는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유대교라는 종교의 도그마티즘 안에서 보면 “너 안식일에 왜 이랬느냐?” 죽일 죄가 됩니다. 14절을 보시면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전하여준 규례는 완전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교단적으로 만들어놓은 종교의 도그마로 해석을 하니까 예수도 스데반도 다 죽여 버려야 됩니다. 중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까? 진리를 종교의 틀 속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에 틀 속에 갇힌 예수의 진리를 다시 끄집어내기 위한 행동이 종교개혁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죽여 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 스데반은 집사님으로서 한편의 설교를 하고 죽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이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너희가 죽였도다”입니다. “유대교라고 하는 율법주의 도그마티즘의 종교집단이 인류의 구세주 나사렛 예수 복음과 진리를 죽인 것이다.” 그래서 스데반도 죽인 것 아닙니까? 그들은 숨길 수 없는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서 이제 스데반을 현장 처형해 버리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지금도 아마 그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은데 “한국의 인물”이라고 해서 훌륭한 사람을 뽑아서 돌아가신 분을 조명해 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김재준 박사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대한민국의 교파와 분열은 거의 도그마 때문에, 그러니까 김재준 목사님이 주장하는 신학은 마귀라고 규정을 해서 그때부터 교파가 갈라졌습니다. 장로교가 그래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은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을 마귀라고 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신학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신학교 교무과장이 길을 가다가 서로 싸우는 상대방 교단의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데도 그 신학교 교무과장을 삿대질하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이 아무개 목사! 이 마귀 새끼 잘 만났다! 한경직은 왕마귀이고 너는 새끼 마귀이다!” 막 욕을 했는데 지금은 그때 그렇게 서로 마귀라고 규정한 내용이 신학적으로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도그마가 그렇게 문제가 됩니다. 제가 어느 장로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저를 보고 “우리 교회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아, 뭡니까?” “이리 좀 와 봐요.” 어느 젊은 여신도 한 분을 부르는 겁니다. 막 내 앞에 세우더니 “우리 교회 1호 여자 장로입니다.” 그러시는 겁니다. 아, 그게 뭐가 자랑거리가 된다고 나한테 말씀하시는지. “아,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잘 하셨습니다.” 저녁 식사 마치고 부흥회 시간에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여성 안수 문제를 해결해서 여자 장로님을 담임 목사님이 자랑했기 때문에 제가 말하겠습니다. 잘하신 겁니다. 저는 PCUSA 미국 장로교단의 목사인데, 여자 장로를 세우지 않는 교회는 성차별 한다고 교회로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해결하였다니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수 제도는 그 교단이나 교회가 정한대로 해도 좋고 안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안수집사니 안수 장로니 하나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면 더욱 좋습니다.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문제는 뭐냐? 여자는 절대로 안 된다고 성경 해석을 해서 100년 이상 성 차별한 그 죄는 어떡할 겁니까? 성경대로 한다고 100년 동안 성차별을 했다면 끝까지 여성은 장로가 안 되어야지 왜 지금은 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총회적으로 지난 100년 동안 우리 교단에서 성 차별한 죄를 회개한다는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여기 많이 계시죠? 여 선교회 헌신 예배드릴 때 여자는 강대상에 올라오지 말라고 저 아래에서 다녔잖아요? 그런데 여 집사님들은 못 오게 하는 강대상을 청소하는 여자는 막 올라와서 돌아다닙니다.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도그마입니다. 도그마는 필요한데, 도그마티즘에 빠지면 도그마티스트가 되어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독선주의를 만든단 말입니다. 예수님도 스데반도 유대교 종교 집단의 희생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억울하게 인생을 희생당해야 되는 스데반의 태도는 어떤 모습인가? 또 하나의 본능이 나타나죠? 15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게 스데반의 권능입니다. 가장 험악한 공포 분위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 천사와 같이 얼굴이 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음 상태에 따라서 얼굴의 색깔도 모양도 변합니다. 지금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림 가운데 유명한 그림을 고르라면 저 같으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 만찬을 생각합니다. 지금 이태리 밀라노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가가 식탁에 둘러앉은 그림으로 성도들 가정에 아주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얼굴을 그릴 때 마귀까지 나타나게 됨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가장 힘들 게 작업한 것이 가룟 유다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였다고 합니다. 다 완성시켜 놓고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리지 못해서 2년 걸렸습니다. 왜? 그때 그 자리에 가룟 유다의 마음은 이미 예수를 넘겨줄 계획이 다 되어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결국 가룟 유다의 얼굴을 정면으로 못 그렸고 그림에 보시면 옆모습만 나와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얼굴, 무엇인가 문제를 일으킬 얼굴! 스데반이 받은 은혜와 그 은혜가 권능으로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 오늘 말씀에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곤고한 나의 삶을 지켜주는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선물인데, 인생에 가장 절박한 순간을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천사의 얼굴을 남긴 스데반을 조명해 보면서 우리가 겪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삶의 고난의 현장에서 초월적 믿음을 가지고 천사의 모습으로 또 한 주간의 순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신앙의 힘이 무엇인가 곤고한 삶을 지켜주는 신의 선물! 오늘 우리들은 스데반을 보면서 죽음 앞에서 권능이 나타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당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고난을 스데반의 신앙으로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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