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유배자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계 1:9~20)

  • 잡초 잡초
  • 387
  • 0

첨부 1


- 설교 : 이필재 목사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자살을 해서 죽었고, 열 제자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제일 나이가 어린 요한만이 100세가 넘도록 살아 목회를 하다가 자연사하여 지금 에베소 지방 요한에 묘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A.D 95년에 로마의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예수의 직계 제자 요한이 아직 살아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가장 참혹하게 고통 주는 일을 생각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요한 자신이 “내가 밧모섬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밧모섬은 로마 정부가 죄수 유배지로 사용했던 에게해 연안에 있는 여러 섬들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그리스 정부의 영토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은 터키에서 가깝기 때문에 제가 거기를 갈 때는 터키에서 배를 타고 5시간 정도 찾아갔다 온 일이 있습니다. 길이가 16km, 그리고 폭이 9.6km이니까 아주 작은 섬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곳에 유배 왔던 이유로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서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썼던 자리를 보기 위해서 많이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 섬에 귀향을 왔던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물이 없고 당연히 먹을 것도 없습니다. 육지에서 공급을 끊으면 한달 안에 다 죽도록 되어있는 섬입니다. 그래서 로마 정부가 가장 흉악한 죄수들을 그곳으로 보내서 죽게 만든 장소입니다. 지금 밧모섬에 가면 관광객을 상대로 안내를 하는 사람들이 설명을 해 주는데, 다 똑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곳에 와서 8개월을 있었습니다. 네르바 황제의 취임과 함께 풀려나서 다시 에베소 지방으로 돌아갔는데, 그 8개월 동안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누구도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다 죽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그 동굴은 지금도 그대로 원형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이 눈을 감고 하늘의 계시를 바라보며 설명을 하면 요한 선생을 옆에서 열심히 도와주던 젊은 청년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청년이 요한이 말하는 것을 모두 받아서 기록한 것이 바로‘요한계시록’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계시’라고 하는 말의 해석은 “뚜껑을 열어서 보여주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세계의 뚜껑을 열어서 보여주셨다는 말인데, 이것은 여러 가지로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신 사건으로 구약에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수많은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종들에게 직접 계시로 말씀하시고, 현장에서 보여주시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또, 때로는 꿈의 계시로 나타나 요셉에게도 나타나시고, 마리아에게도 나타나시고, 동방박사들에게도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꿈의 계시로 뚜껑을 열어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이것이 환상으로 나타납니다. 바울 선생도 환상을 보며 환상을 따라갔습니다. 많은 사도들에게 환상의 계시로 보여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한 것이라.” 천사를 통한 계시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계시로 요셉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6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 65권은 지나간 역사 중심의 기록입니다. 이 한 권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될 일에 대한 미래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진리의 특징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가는 철학과 방향제시를 하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아주 훌륭하게 잘 조명된 사건이 출애굽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만나는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지만 가나안 땅을 향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이 주어진 사명이었고 그것을 반대하고 돌이키려고 하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나안 땅 개념의 하나님 약속을 믿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악조건의 불합리 장애물을 다 헤치고 천국을 향하는 순례자들의 길을 향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앞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매우 황홀하고 찬란한 빛을 보여주는 희망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행진하라!” 들어주는 한 깃발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들어있는 말들을 우리가 생각을 하면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아름다운 희망의 빛을 하나 만들어놓고 그것을 보면서 순례 행진을 중단하지 말고 달려오라고 66권 중에서 이 한 권으로 책이 마지막 빛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 보면 마지막 인간의 모습이 조명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성 있게 살아갈 장소에 대한 하나의 그림을 어떻게 그려주었느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정이라.”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 여신도들은 보석을 좀 좋아하시는데 하늘나라에게 가면 얼마든지 있다고 그랬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의 목적이 있습니다.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가득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고, 오늘 말씀에 아주 분명히 나와 있는 것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자니까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을 비교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보석이 등장한 것이지 실제로는 지금 세상에서 갖고 있는 물질적 보석은 아니지요. 더 아름답고 훌륭함을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이렇게 종말적 교훈으로 되어 있어 미래 지향적인 삶의 방향 제시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물이 없고 고통스러운 사막의 모래벌판 위에 있지만 마침내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가나안 땅을 차지해서 살리라는 의미와 똑같은 출애굽 사건이 하늘나라에 가는 조명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최종적 성취의 진리를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함으로써 성경이 완성되었는데 요한이 밧모섬에 핍박에 의한 유배생활 가운데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매우 중요한 교훈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역사 신학자들이 성경의 사건들을 역사화해서 조명할 때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인간 구원 사역이 역사화된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언제이냐? 아브라함 때부터라고 규정을 합니다.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칩니다. 자, 지금 유대인들이나 또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됩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고 얼마든지 있는데 말입니다. 또, 아브라함보다 훨씬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경에 줄줄이 나오는데, 아담도 있고 에녹도 있고 노아도 있고 아벨도 있고 얼마든지 있는데 왜 그 후대 후대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가 말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시면 “복음서 기록의 시작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했습니다. 왜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을 갖다 붙였는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를 설명하는 첫째 시작도 아브라함부터 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누구의 자손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노아의 후손이요, 아담의 후손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가 아브라함 때부터 인간 중에서 특별한 선택을 하시고 그와 함께 구원 사역을 하시는데 첫번째 사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기 때문에 ‘열국의 아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왜 아담한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노아한테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후대 사람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셨느냐 말입니다. “너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복을 손에 들고 온 세상에 다니며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라.” 그런 뜻입니다. 만약 “너를 축복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를 축복할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를 저주할 것이니까 이 약속을 가지고 가거라.” 그래서 이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편집을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특별 쓰임을 받은 사람이 첫째가 창세기 아브라함이고 마지막이 이 계시록의 사도 요한으로 처음과 끝이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유배적 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삼대 문명의 발생지 중에 제일 먼저라고 평가받는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입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사람입니다. 창세기 24장에 이삭이 결혼할 나이가 되니까 아브라함이 그 종을 시켜서 며느릿감을 하나 구해오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라고 말을 합니다. “이제 종이 그 중인의 약대 중 열 필을 취하고 떠났는데 곧 그 중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았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75년 동안 기반을 닦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를 보고 숙명적 명령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메소포타미아는 이라크 땅이고 가나안 땅은 지중해 연안 지금의 이스라엘의 테라비브 근방인데 그 사이가 사막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만나는 일이 창세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한지라.”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한 땅에 갔으면 뭐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는 식량 구하기 위해서 애굽까지 내려가서 별 치사한 일을 다 당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유배를 떠난 겁니다. 마치 귀양살이를 떠난 듯한 그러한 삶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첫번째 부름 받은 사람이 이러한 삶의 과정을 거쳤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쓰임을 받더니 계속해서 똑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의 경우에 우리들의 판단 상식으로 나 같으면 당시 최강의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바로 왕이 자신을 절대 후계자로 지목한 사람이 얼마 있으면 왕위에 오를 터인데 가만히 참고 있다가 왕위 계승을 한 다음에 그 권한을 행사해서 애굽 나라를 아예 이스라엘 나라로 만들고 그 다음에 고통 받는 자기 이스라엘 히브리민족을 얼마든지 왕궁의 실력자로 다 등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노예가 아니라고 자유 선포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권력 기관에 모든 히브리 민족을 다 등용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모세를 빼내서 가장 험악한 사막 지대인 미디안 광야의 불모지 땅으로 유배를 보내십니까? 바로 왕의 후계자로 최고 영광을 누리던 사람이 별안간 세상에서 제일 힘든 떠돌이 유목민 가정의 고달픈 목동이 되어 밥을 얻어먹고 살아갑니다. 적어도 그런 고난의 유배 생활을 40년동안 계속합니다. 이때 모세의 신분은 살인죄수로 지명수배 체포 명령이 떨어져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배지 호렙산 기슭에 양떼를 몰고 다니는 늙은 80세의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너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겠다고 말하라.” 미디안 광야의 40년 도피적 생활의 유배지에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구상에서 가장 힘든 민족 이동의 역사를 완성시켰던 역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집에서 네 식구 단란하게 살 수 있었는데, 하나님은 야곱을 외로운 땅 유배자가 되게 하십니다. 야곱이 자기 집에서 계속 살 수가 없었던 이유가 에서와의 불화가 살인까지 연결될 기미를 어머니가 알고 몰래 도망시킵니다.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20년 후에 에서는 야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 죽이기에 군대 400명을 가신으로 키워 데리고 나가지 않습니까? 20년 지난 역사에도 원한이 사무쳐 죽이려고 했는데 야곱은 유배지로 떠나지 않았으면 죽었습니다. 유배의 땅으로 가는 도중 야곱은 평생 처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처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비로소 하나님을 만납니다. 브엘세바는 유대 남쪽이요 그가 찾아간 곳은 다른 나라 영토 하란으로 20년이나 그곳에 가서 라반에게 종살이하는 유배의 역사를 지내게 됩니다. 야곱은 하늘나라의 12보좌의 상징인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는 기초를 계획하셨기 때문에 “너희 집에서는 안 된다. 하란에 가서 20년 고생하라.” 유배지로 보내서 노예생활과 같은 남의 집 머슴 생활 하면서 그를 성숙시켰습니다. 또, 요셉의 경우는 17세에 애굽으로 유배의 길을 떠납니다. 온갖 억울한 인생 여정을 다 겪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그에게 나타나서 애굽 총리로 110세까지 살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그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왜 하나님은 어린 요셉을 그렇게 유배의 땅으로, 남의 나라로 보내서 온갖 억울하게 유배생활을 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모두가 그렇게 나타납니다.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수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의 여호와의 형상을 보고 선지자의 사역을 한 것도 바벨론 유배 생활하는 가운데서 되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이 여호와의 함께 하심을 느브갓네살 왕에게 나타내던 그 때도 어린 소년으로 유배당해 갔던 바벨론 역사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는 모두다 유배자를 통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되어지는 특별한 소명자들에게 주어지는 유배의 뜻이 무엇인가? 인간의 모든 소속을 다 끊어버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만 바라보라!”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봤을 때 그의 손을 잡고 구원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경의 역사가 오늘 우리 현실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 하나님의 인간 구원 사역의 성격은 모두다 유배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파송한 일종의 유배자 선교사란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세계 모든 선교의 역사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1800년대에 미국 문화에서 살던 젊은 청년 언더우드나 아펜셀러 같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조선 땅을 찾아왔을 때 그들의 마음에 어떤 생각의 위로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잘못하면 잡혀 죽을지 모르는 땅에 와서 말 한마디 통하지 아니하고 문명의 시설이라고 하나도 없는 이 거리를 헤맬 때 그들은 유배지로 온 것입니다. 누가 그들을 보고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했으며 누가 그들을 보며 반갑게 맞이해 준 사람이 있습니까? 잘못하면 잡혀서 죽을 뻔한 그런 현장에 와서 산 것입니다. 또, 지금 우리 한국의 선교사들이 외국으로 많이 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그렇게 많은 선교지 답사를 다녀봤지만 훌륭한 선교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 가운데 오지 선교를 하는 사람들은 유배지에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멕시코 남부의 백두산만큼 험악한 산 속에서 오지 선교를 하는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를 위로하고 동참하고 또 그들의 삶의 모습을 일주일동안 살핀 일이 있는데, 가장 힘든 것이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는 평생 먹어야 합니다. 안 먹으면 어떡합니까? 그 곳에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문화 시설이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 음식을 만나와 같이 평생을 먹으면서 선교를 하니 이것은 유배 생활입니다. 귀양살이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 인간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모든 종들을 유배지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노예와 같은, 유배자와 같은 그런 생활을 하게 하심으로 인간 구원의 역사가 이렇게 이루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요한이 에베소 지방에서 목회를 할 때 그 계시를 열어주지 아니하시고 불모지인 밧모섬에 유배자로 보내서 거기서 계시를 받도록 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LA 한미 노회 책임을 맡고 있을 때 어느 날 대단히 고생스러워 보이는 모습의 30대 후반의 여자 분이 노회 사무실에 찾아오셨습니다. “미국 장로교 PCUSA 교단에서는 저 같은 여자도 목사 안수 제도가 열려 있다고 하여서 제가 좀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네, 저는 선교사의 부인입니다. 제 남편은 선교 열정이 남보다도 아주 강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게 사는 고난의 민족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가 이곳저곳을 다 다녀보다가 내가 갈 곳은 이곳이라고 정한 곳이 방글라데시의 정글 속이었습니다. 여기가 내가 갈 곳이라고 생각을 해서 우리 가족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모두 그곳으로 갔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원망이 많았습니다. 우리 형편이나 사정에 맞는 선교지를 택할 것이지 여기에 와서는 학교가 없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이 정글 속에 데려다 놓고 이를 어떡하란 말입니까? 아니면 고국에서 그냥 목회를 하고 살아도 되는데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다가 가족들을 갖다 버리도록 해놓고 먹을 것도 없는데 마치 열매 따먹으면서 살라는 식으로 선교를 하고 이 지역은 열병이 심하고 풍토병이 심해서 병들어 죽기 딱 알맞은 그런 고장에 있다니…. 그렇다면 선교를 해도 좀 자기 몸을 생각하며 할 것이지 불철주야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뛰어 돌아다니다가 예상대로 죽었습니다. 저는 남편 무덤 앞에서 땅을 치며 원망과 통곡을 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다가 죽었다고 합시다. 나와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 암흑과 같은 불모지에 유배온 듯 살다가 젊어 먼저 죽으면 이 아이들은 다 여기서 죽으란 말입니까? 난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래서 그녀는 남편 무덤을 막 쥐어뜯으면서 하나님도 싫고, 남편도 원망스럽고 막 통곡을 하는데 아무도 없는 그 정글 하늘에서 자기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한 음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너도 이 땅에서 죽어 네 남편 곁에 묻히어라!” “이게 무슨 소리냐?”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 혼자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 정글 속에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밖에 없고, 남편 무덤 밖에 없어요. “어? 이게 무슨 소리냐?” 그녀는 깨닫고 “나도 그 땅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남편의 뒤를 잇기 위해서는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가려고 제가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유배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두고두고 오고 오는 세대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불빛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 실현 예언의 계시를 요한을 밧모섬 유배지로 보내서 거기서 성취하심으로 하나님 구원 역사의 완성의 빛을 보여주십니다. 이 빛을 보고 모두가 옵니다. 지금 우리들은 교회에서 127군데 열심히 선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유배지에서 수고하고 있는 형제들과의 동참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무엇을 향해서?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너희가 이렇게 될 것이다. 65권 중에서 한 권의 빛을 유배지에 간 밧모섬의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빛을 줌으로 이 빛을 보고 따라 오라!” 성경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다소 곤고한 때가 있으나 이 빛을 바라보면서 순례자가 찬송을 부르며 오늘도 행복하게 순례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살펴볼 때에 하나님의 종들은 수없이 유배지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비추는 하나님의 구원 빛을 보면서 이 세상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저 천성을 향해서 행진하고 있사오니 미래 지향적 진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 진리의 요한계시록을 빛으로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인생 과정을 이기며 승리하며 노래하면서 갈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