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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1) (마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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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기독교는 기도교?

지난주 설교를 통해 유대교에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바로 구제, 기도, 금식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신앙행위인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도교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에 있어 기도는 중요하고 이 기도가 빠지면 본질이 빠지는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만 기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다 기도라는 것이 다 있습니다. 불교에도, 이슬람교에도, 도교에도 그 어떤 종교에나 다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지만 이슬람교에는 ‘살라트’라는 기도의 규정이 있습니다. 즉 모든 무슬림은 반드시 하루 다섯 번 알라신에게 기도하라는 규정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슬람교 신자들은 이 살라트 시간이 되면 반드시 이슬람의 성지 메카가 있는 방향을 향해 기도를 합니다. 모든 무슬림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심지어 내 생명이 걸린 심각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이 하루 다섯 번 기도를 빠지지 않습니다. 정말 대단한 기도생활입니다.

그런데 이 ‘살라트’라는 전통 역시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반드시 하루 세 번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세계 어디에 있든지 하루 세 번, 아침과 오후, 그리고 저녁이나 밤에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를 합니다. 또한 기도는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자는 기도하기 전에 몸을 씻고, 옷을 단정하게 입습니다. 기도드리는 장소는 집이나 회당, 둘 다 가능한데 어떤 장소이건 반드시 청결해야 하며, 사람을 자극하는 향이나 냄새가 나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이런 냄새가 기도자의 마음을 흐트러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도 시간은 대략 세 번의 기도를 모두 합하여 네 시간 정도 됩니다. 정말 기도에 엄청난 열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기도습관은 구약성경 다니엘 6:10에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은 바사 왕 다리오의 총애를 받아 전국을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 중 하나가 됩니다. 이를 시기한 방백들은 다니엘 죽일 궁리를 하지만 다니엘이 워낙 충성된 사람이라 고소할 어떤 틈도, 허물도 없었고 약이 바싹 오른 방백들은 드디어 다니엘 죽일 방법을 하나 찾아냅니다. 바로 다니엘의 기도습관입니다. 다니엘은 언제나 하루 세 번 예루살렘(성전)을 향해 난 창을 열고 무릎 꿇고 기도했는데 방백들은 이러한 다니엘의 기도습관을 빌미로 계략을 꾸밉니다. 왕을 충동질하여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 어느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자는 다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어명을 내리게 한 것입니다. 이제 늘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기도하면 영락없이 사자굴에 들어갈 판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목숨과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구약의 전통을 이어 받아 하루에 세 번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세 차례 이상 금식하는 것을 중요한 전통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의 기도습관을 생각해 봅시다. 이슬람교나 유대교의 기도는 습관적이고 형식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게 하고 싶을 때 해야지 어떻게 무조건 하루 몇 번, 몇 시간이라고 정해 놓고 무조건 기도하라고 하냐? 이렇게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 개신교는 하루에 몇 번 기도하라고 몇 시간 이상 기도하라고 정해 놓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이런 횟수에 구애 받지 말고 자유롭게 기도하되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유대교나 이슬람교보다 더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개신교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오히려 규정보다 더 기도를 많이 하라는 뜻입니다. 유대교는 하루 세 번 기도하고, 이슬람교는 하루 다섯 번 기도한다면 적어도 우리 기독교는 열 번 스무 번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우리는 기도를 정말 게을리 합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 그리고 얼마나 오래 기도합니까? 혹시 하루에 세 번, 다섯 번은커녕 단 한 번도, 단 1분도 기도하지 않고 살지는 않습니까? 기도는 정녕 우리의 호흡이요 영적인 식사라고 말하면서도, 숨 안 쉬면 1분도 못 참고, 밥은 한 끼만 안 먹어도 못 견디는데 기도는 하루에 한 번도 안 하고, 단 1분도 안 하고도 멀쩡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 바른 기도 방법

자, 지금까지 기도의 횟수와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자주 하고 많이 하더라도 기도를 잘 못 된 방법으로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잘못된 방법으로 기도하면 기도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시간과 횟수로만 치면 이슬람교나 유대교가 최고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들보다도 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단과 사이비 종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주시냐 하는 문제입니다.

기도문을 하나 읽어 드리지요. “오 신이시여! 나를 위해 모든 문을 여소서. 기도를 들으시고 구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시는 신이시여, 내가 당신의 도움을 구합니다. 내 생명을 당신의 손에 의탁합니다.” 참 귀한 기도문이지요? 하지만 이 기도문은 9.11 테러사건의 범인들이 비행기에 탑승하던 때의 했던 기도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슬람교는 정말 철저한 기도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기도를 하고 난 뒤 수 백, 수 천 명의 생명을 태연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과연 이 기도는 바른 기도일까요? 신이 정말 이런 기도를 받아 주실까요? 그만큼 바른 기도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들, 아무리 열심히 한들 그 기도가 바르지 못하다면 소용이 없고 나아가 큰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5절부터 15절에 이르기까지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좀더 엄밀하게 따지면 16절부터 18절에 나오는 금식도 기도의 한 방법이기 때문에 18절까지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본문에서 일반적인 기도에 대해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제대로 하는 방법, 올바른 기도는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기도방법을 지적한 후 우리에게 바른 기도의 자세는 어떤 것인지, 어떤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주시는지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먼저 5절부터 8절 말씀을 읽어보시면 우리는 금세 지난주 나누었던 1~4절 말씀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외식하기 위해 회당과 길에서 구제하거나 기도하지 말라, 이런 구제나 기도를 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 은밀하게 구제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고 은밀한 중에 기도하면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갚으신다” 등 구제와 기도라는 주제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외식기도와 골방기도

그러면 어떤 것이 외식하는 기도인지, 또 어떻게 하면 외식하는 기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절을 같이 읽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기 나오는 외식하는 기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코너, 즉 길모퉁이라는 뜻)에 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구제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기도하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가장 많이 지나가는 곳을 골라 기도한 것입니다. 대개의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만약 외출 중에 기도 시간이 되면 어떻게 했는가? 길가에 서서라도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길가에 서서 하는 기도는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로 시작했으나 곧 외식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즉 기도 시간에 일부러 외출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습지요? 이것이야 말로 진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아마 사람들은 감탄하면서 이렇게 칭찬할 것입니다. “야, 저 집사님 진짜 기도 열심히 한다. 기도 대장이야 대장!” 사실 기도 많이 한다고 칭찬 받는 일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기도 많이 한다고, 기도 잘 한다고 칭찬 받는 일이야말로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좋은 칭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것은 주님이 기도 많이 하는 것, 기도 잘 하는 것이 소용없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잘 해야 하고 많이 해야 합니다. 주님이 막으신 것은 바로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 말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6절을 읽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러면 외식하는 기도 말고 어떤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는 것만도 은밀한데 게다가 문까지 걸어 잠그라고 하시니 이것은 2중, 3중으로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은 은밀한 기도를 기뻐하실까요? 이런 오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기도 말고 공개적인 기도, 남들 앞에서 하는 기도는 안 받아주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예배 때 회중 앞에서 하는 회중기도는 하지 말아야 하나? 기도회 때 통성으로 기도해서 남들이 다 내 기도 소리 듣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기도도 받으시고 공개적인 기도도 받으십니다. 다만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기도의 대상’ 문제입니다.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내 기도를 들으셔야 합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 들으라고 기도하는 분들, 남에게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기도하는 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대상만 분명하다면 은밀한 기도든지, 공개적인 기도든지, 회중기도든지 그 어떤 기도든지 하나님은 다 받아주신다는 말입니다. 또한 기도의 첫 걸음은 반드시 1:1 기도, 개인기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 개인기도, 1:1 기도를 잘 하는 사람만이 회중기도도 잘 하고, 공개적인 기도나 중보기도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개인기도 안 하는 사람이 무슨 수로 공개적인 기도나 회중기도를 잘 하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1:1 대화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과만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골방기도’의 원리입니다. 하지만 골방기도란 반드시 골방에 들어가 문 잠그고 하는 기도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집에 골방이 없는 사람은 기도 못 하지 않겠습니까? ‘골방’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메이온’인데 이는 ‘자르다’는 뜻이므로 본디 세상과 단절된 곳, 은밀하고 남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내실, 밀실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단어를 쓰시면서 장소적인 의미로 쓰신 것이 아니라 자세의 의미로 쓰셨습니다. 즉 집에 꼭 으슥한 골방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골방처럼 세상의 복잡한 일들과 단절된 장소 혹은 시간, 나아가 그런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따라서 골방기도란 세상적인 것에 방해받지 않을 시간과 장소를 찾아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 것들 다 자르고, 유혹이나 근심걱정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런 골방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외식하는 기도의 특징은 사람들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적인 기준에 따르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 외식하는 기도의 반대말인 골방기도는 세상적인 기준과 생각을 다 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기도를 하기 바랍니다.




중언부언 하지 말라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은 또 하나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십니다. 바로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7절을 읽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하는 기도란 무엇일까요? 중언부언이란 헬라어로 ‘밧톨로게오’인데 ‘똑같은 말을 반복하다, 쓸데없는 말을 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의미나 목적 없이 쓸데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기도는 주로 누가 하는가? 7절을 보면 ‘이방인과 같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실제로 열왕기상 18장 26절에 보면 바알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대결할 때 제단에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27절에 그들을 이렇게 조롱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공동번역으로 읽습니다. “바알은 신이니까, 더 크게 불러 보아라.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신지도 모르지. 외출 중인지 아니면 여행 중인지 혹은 잠이 드셨는지도 모르니 어서 깨워 보아라.” 실제로 이방인들은 신이 외출을 하거나 잠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큰소리로 하루 종일 신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전형적인 중언부언의 특징입니다. 불교신자들을 보니까 불경을 열심히 외우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불경이라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서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외우곤 합니다. 무조건 말을 많이 하는 기도, 의미 없이 계속 반복하는 기도, 뜻도 모르면서 무의시적으로 하는 기도, 이것이 바로 중언부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길게 하는 기도는 무조건 잘못된 것인가? 짧고 간단한 기도만 좋은 것인가? 물론 저는 회중기도 할 때는 3분 이내로 단순하고 간결하게 하라고 늘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가 함께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너무 길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긴 기도 중에도 좋은 기도, 훌륭한 기도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밤을 지새우며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긴 기도가 무조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없이 의미도 없이 장황하고 길게 하는 기도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딱 한 두 마디만 기도를 하더라도 정말 은혜가 되는 기도도 있습니다. 기도는 길든 짧든 길이와 분량에 상관없이,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고 대상이 분명하고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신다

그래서 주님은 8절에 저희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결론이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과 생각을 다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내 마음과 소망을 모르실까요? 그럴 리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굳이 기도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기도 내용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하면 또 하나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 안 해도 다 아신다면 우리가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나?” 충분히 나올법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지요. 기도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대화는 뭡니까? 꼭 상대방의 상황이나 생각을 몰라야만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 마음도 알고 처지도 알지만 대화를 통해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특히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반드시 대화가 필요합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생각 모를까봐 그러냐? 나 다 안다. 뻔하지 뭐...” 사실 자녀의 생각이나 원하는 바를 부모가 뻔히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대화도 안 한다면 그 부모는 참 된 부모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하도 제가 전화를 잘 안 하니까 먼저 전화하신 모양입니다. 제가 “무슨 일 있으세요?”하고 물으니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네 목소리 좀 듣고 싶어 전화 했다”고 하십니다. 부모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다 알지만 그래도 자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자녀와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역시 자녀들과 대화하기 원하십니다. 자녀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우리와의 대화를 통해 사랑과 신뢰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내 필요를 다 아시지만 우리가 “아버지 이것 좀 주세요” 하고 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은 마치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많이 졸라서 마치 하나님에게서 복을 빼앗아 오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잘못 되었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하는 것이다

앞으로 2주 동안 더 기도에 관해 설교를 들으실 것입니다. 월삭기도회 때도 거의 1년에 걸쳐 기도학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기도에 대해 수많은 말씀을 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 결론은 하나입니다. 기도는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지식적으로 기도에 대해 잘 알더라도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늘과 앞으로 두 주간 나눌 말씀을 통해 지금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떠한지 돌아보고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힘이 들어도 굳이 새벽기도회를 늘 인도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물론 담임목사인 제가 인도해야 더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제 스스로가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목사도 자칫하면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생활을 게을리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영적인 능력의 원천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게을리 하는 것은 영적인 능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삼상 12:23).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기도는 성도 개인과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기준입니다. 화학시간에 산성인지 알칼리성인지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적셔보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산성이면 리트머스 시험지가 붉게 변하고 알칼리성은 푸르게 변합니다. 기도 역시 교회와 성도 개개인의 영적 능력과 상태를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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