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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은 망하지 않는다 다만 넘어질 뿐이다 (잠 24: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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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구원 목사

일반적으로 의인(義人)이라고 할 때 사전적 의미는 의(義)와 사람을 일체화 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義)는 사람이 행하여야할 옳은 일이라고 정의 합니다. 그러나 의인(義人)이라고 할 때는 그냥 의로운 사람이라는 다소 소극적인 정의를 내립니다.
성경은 의인에 대하여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① 하나님의 예정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의인은 선택된 자입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② 구속론적 입장에서 볼 때 의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입니다(롬 8:30).
③ 가치론적으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은 자입니다(롬 8:15; 요 1:12-13).
④ 윤리적 입장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의를 행하는 자입니다.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롬 2:13). 잠언 20장 7절에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보은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집이라고 할 때는 의인이 사는 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많은 말을 생략하면 이 집은 오늘의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잠언 24장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의인은 필연적으로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와 함께 의인도 넘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의인 노아도 넘어져서 실수한 일이 있었는가 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넘어져서 실수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군 다윗도 넘어진 일이 있었는가 하면 사도 베드로도 넘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흰 종이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은 선명하고 크게 보이듯이 의인이 넘어질 경우에는 악인들보다는 그 충격과 미치는 파장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의인의 넘어짐이 의인된 조건이라도 되는 듯이 당연시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의인은 왜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본능적 (本能的) 속성 때문입니다.

본문 24장 15절에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에게 의인의 가정을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공격하거나 헐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아 2:15).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그를 공격했습니다. 사무엘상 19장 11절에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고 했습니다.

시편 59장 3-4절에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鑑察)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불신자'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는 악한 마귀의 종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땅에서 악인들의 도전과 공격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의인의 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강수처럼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생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와 정의가 강수같이 흐르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의인은 왜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Ⅱ. 넘어지나 다시 일어나는 의인의 복원력 (復原力)적 속성 때문입니다.

본문 24장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일곱 번』은 성경에 완전수입니다(잠 3:31; 26:16; 창 4:24; 욥 5:19; 마 18:22). 이것은 완전히 넘어진 상태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숨기면서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욥기 5장 19절에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잠언 14장 32절에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8장 4절에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과학적 이론 가운데 구심력과 원심력이 있습니다. 구심력은 어떤 물체가 원운동을 할 때 중심으로 쏠리는 힘을 말합니다. 원심력은 어떤 물체가 원운동을 할 때 구심력에 반대하여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힘을 말합니다.
마치 의인은 하나님의 의를 중심하고 일어나는 원심력과 구심력을 생각하게 합니다.
의인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25절에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기 때문에 절대로 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추격하던 애굽의 바로에게는 육지를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홍해에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 앞에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아니하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짐을 당했으나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심지어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풀무가 뜨거워서 이들을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습니다. 불 가운데 던져진 자들은 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박되지 아니한 한 사람이 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 모양이 신들의 아들과 같았습니다(단 3). 하만은 하나님의 사람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오십 규빗이 넘는 장대를 만들었으나 결국 악한 사람 하만 자신이 장대 위에 달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의인의 궁극적 승리와 악인이 받는 저주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극에 달하는 포악한 방법으로 의인들을 능멸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의인에게는 최후의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왜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Ⅲ.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의인의 전략적 (戰略的) 속성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선』은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선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선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 3:12). 선은 언제나 행한다는 동사를 수반합니다. 선을 행한다(살후 3:13), 선행과 구제(행 9:36),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엡 2:10), 선한 일(골 1:10; 살후 2:17; 딤후 2:21; 3:17; 딛 1;16; 3:1; 히 13:21; 요 5:29; 골 2:7,10).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딤전 1:18; 6:12; 딤후 4:7). 선한교훈(딤전 4:6)이라고 했는가 하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갈 6:9). 그렇다면 여기에 선한 일은 곧 하나님의 일로 그 가닥을 잡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요한복음 6장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 자체가 선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 가운데 선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운동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교회운동의 전부입니다. 교회운동의 전부는 택자를 찾는 전파행위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이라고 할 때, 곧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행위입니다.

1) 악인의 멸망을 보고 슬퍼할 줄 아는 신앙인격입니다.
본문 24장 17절에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상대의 불행으로 하여금 내적인 만족을 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망할 때는 기뻐해야 되지만 그러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는 자기의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슬퍼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자신의 죄과를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사하고 여호와께 경배토록 해 달라고 사무엘에게 애원했습니다(삼상 15:24-25).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냉정했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서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고 돌아섰습니다. 이 때 사울 왕은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지도록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이렇게 애원하며 매달리는 사울 왕에게 사무엘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삼상 15:27-28). 계속해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는 죽는 날까지 사울을 보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슬퍼했기 때문입니다(삼상 15:35).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고 했습니다(삼상 16:1).

그는 인간적으로 사울의 망하는 것을 보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격입니다. 보호받아야 할만한 인격입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사울과 자기의 혈맹의 친구 요나단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때는 사울 왕이 비록 자기를 죽이려고 군사를 몰아 다녔지만 다윗은 슬픈 노래로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했습니다(삼하 1:17). 다윗이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같이 하였다고 했습니다(시 35:14).
우리는 불신자들의 멸망을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전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말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2) 악인의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신앙철학 입니다.
본문 24장 19-20절에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했습니다.
악인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닐지라도 오히려 성도들보다 세상의 명예와 물질을 마음대로 취하면서 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때 그 누구든지 분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은 악한 자의 하나님이냐고 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분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욥기 20장 5절에는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이니라』고 했습니다.
악인은 땅에서도 그 영화가 길지 않다고 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악자의 장래가 결코 길지 못하고 망하는 것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등불이 꺼지듯이 그 영화도 끝날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잠 24:20). 교도소에서 사형수를 일시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보고 일반 수감자들이 부러워할 자 있겠습니까?

3) 악인과 구별되는 성별의식입니다.
본문 24장 21-22절에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고 했습니다.
여기 『반역자』란 말의 '쇼님' ( ) 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딴 길로 가는 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왕의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결코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한 자와 더불어 사귀지 않습니다.
시편 1편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모두 불신앙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인의 집은 일어나고 맙니다. 결국 악인의 집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갈등하는 마음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 그만해야 합니다.
옛 속담에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는가하면 삼대(三大) 거지 없고 삼대 부자(富者) 혹은 정승(政丞)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계속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런 속담을 주고받으면서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는 지혜로 삼았습니다.
시편 73편 27-28절에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와 가까이하고 자기 직분과 가까이 하고 목사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악한 자가 의인을 방해하려고 노려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의인은 넘어짐이 없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고 했습니다(잠 28:1).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했습니다(시 1:6).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본다고 했습니다(잠 29:16). 우리가 악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집은 다시 일어납니다.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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