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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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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사람은 어떤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형식의 서약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답의 서약은 언뜻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실제로는 보통 중요한 말이 아닙니다. 부부의 행복은 그들이 결혼할 때 서로를 향하여 맹세했던 사랑의 서약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느냐에 다 달려 있는 것이고, 목사나 장로는 그들이 안수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손을 들고 서약했던 바를 과연 얼마나 잘 기억하고 지키느냐에 따라서 그 사명 수행의 성과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친히 그와 같은 문답서약을 한 가지 시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신앙고백 문답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당신의 몸 되신 교회의 기초를 세우시는 일과 당신께서 불러 모으실 택자들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이 중차대한 두 가지 일이 바로 이 하나의 문답을 통한 고백과 서약에 다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신앙고백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교회를 함께 세우게 해 주고 또한 각자의 구원을 반드시 완성하도록 해줄 그 요긴한 신앙고백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1.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당당한 신앙고백’만이 교회의 튼튼한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16장 13절 상반절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라고 그 문답이 있었던 무대의 배경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도시가 가이사랴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헤롯 빌립 왕이 로마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도시 이름에다가 ‘황제’ 즉 ‘가이사 (Caesar)’라는 명칭을 첨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시 이름만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그는 거기에다가 로마 황제를 기념하는 화려한 대리석 신전까지 지었습니다. 즉 가이사랴 빌립보는 유대인들이 살던 지역 중에서 로마 황제의 권위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시였던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또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판(Pan)신’이라는 이방신 숭배가 만연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도시가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개명되기 이전의 원래 이름은 ‘파니아스(Panias)’였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신들 가운데서 ‘판(Pan)’이라는 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었습니다. 이 신은 소위 ‘목양의 신’으로서 헬라인들에게는 바로 풍요의 상징이었는데, 바로 그 판신이 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대표적으로 숭배되던 우상신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와 갈릴리의 다른 여러 동네를 제쳐 놓고 하필이면 그 같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갈릴리 바다 위에 배 한 척 띄워 놓고, 혹은 디베랴 언덕에서 지중해 쪽으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제자들끼리만 모여 있는 오순도순하고도 평화로운 배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불신 세상의 가치관이 그 최고의 영향력을 자랑하던 곳, 세속 사회의 권력과 부가 그 최고의 영광을 뿜어내고 있던 가이사랴 빌립보 한 가운데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최첨단 문화를 자랑하던 그 도시의 눈부신 모습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네들의 모습이 얼마나 더 왜소하고 초라하게 여겨졌겠습니까? 하지만 적어도 가이사랴 빌립보 정도의 세상 영광 앞에서는 조금도 주눅들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당신을 자랑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할 줄 알아야 만이, 온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교회를 그 신앙고백 위에 세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곳에서 주님께 신앙고백을 드리고 계십니까? 호젓한 수양관이나 기도원 같은 곳에서 며칠간 수련회 하는 동안에만 “주여, 믿습니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신앙고백은,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은은한 오르간 소리가 들리는 예배당 안에 앉아 있을 때만 우리 입에서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저 그런 좋은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만 나오는 신앙고백을 두고서 우리 예수님께서 담대한 신앙고백이라고, 교회의 터가 될 만한 믿음직한 신앙고백이라고 인정해 주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 같은 곳에서 우리에게 신앙고백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보다 불신 부모가 더 높아 보이고, 학교 선생이 더 높아 보이고, 직장의 사장이 더 높아 보이는 바로 그 곳이,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람이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는 법인데 너는 과연 누구를 모시고 있느냐?”라고 물어 보시는 장소입니다. 예수님보다 오늘의 매상이 더 중요해 보이고, 내 저금통장이 더 귀해 보이고, 내 가족의 여가활동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바로 그 곳이야말로, 주님께서 직접 우리를 향하여 “네 마음과 정성과 뜻이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시는 장소인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화려해 보이고 중요해 보이는 바로 그 곳에서 조금도 기죽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높일 줄 아는 당당한 신앙고백을 발휘할 수 있어야 만이 진정 ‘세상을 이기는’ 교회를 세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 18절과 19절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이었습니다. 기록하기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주후 455년 반달족이라 불리는 야만족들이 로마시에까지 침략해 들어왔었습니다. 당시 이미 힘을 잃고 있던 로마제국은 이들의 침략 앞에 그야말로 속수무책의 상태였습니다. 그때 로마 교회의 감독이 레오(Leo)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그 같은 혼란의 와중 속에서 탁월한 정치적 기량을 발휘하여 그 침략군 지도자와 일종의 평화 협정을 성사시켜 내었습니다. 짐작할 수 있는 대로, 그 이후 레오 감독은 로마시에서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바로 그 레오 감독이 이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 즉 지상교회의 수반으로 임명하셨고 로마교회의 감독은 바로 그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같은 권위를 가진다.”라고 하는 소위 ‘교황설’을 주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교황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명백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수반은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될 수 없으며, 또한 그 같은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일에 특별히 쓰임을 받는 명예로운 직분도 결코 베드로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공히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8절의 말씀인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주님 말씀의 참된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이 신앙고백을 교회의 기초로 삼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베드로가 했던 것과 같은 꼭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 지상교회를 건설하시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사가 세상 정치가들과 협상을 잘해야 제대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숫자를 이용해서 무슨 ‘압력단체’처럼 활동할 때 그 사회에서 발언권을 얻게 되는 단체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담대한 신앙고백 위에 서게 될 때만이, 참으로 ‘반석 위에 서 있는’ 튼튼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권력과 부, 과학의 발전과 문화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이 불신사회가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얼마나 발전하고 그 어떤 대단한 영광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참된 교회는 조금도 주눅들거나 꿀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 어떤 권력기구에도 이 신앙고백으로 뭉쳐진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없으며, 그 어떤 경제단체도 이 신앙고백으로 뭉쳐진 공동체가 발휘하는 영적 복지사업을 도무지 따라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문화와 과학도 교회가 소유하고 전파하고 있는 이 신앙고백보다 더 우수한, 금세와 내세에 관한 최첨단의 지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담대하게 신앙고백할 수 있는 교회만이 그와 같은 능력과 영광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정도 앞에서 풀이 죽을 수준의 교회라면 진리를 위한 싸움이나 순교의 자리에까지 가기에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격려하시는 우리 주님 앞에서, 세상이 우리 앞에 어떻게 나타나더라도,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더라도 결코 굴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당당하게 예수신앙을 자랑함으로써 결국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교회를 함께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해도 미혹되지 않는 ‘정확한 신앙고백’만이 신자의 구원을 온전히 성취시킬 수 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16장 13절 하반절과 14절에 기록하기를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이미 예수님 당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헤롯왕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엘리야 선지자나 예레미야나 아니면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마지막 때에 다시 세상에 올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바로 그 같은 부류의 선지자 중 하나로 오해했던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예수님을 잘못 믿고 예수님에 대한 온갖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런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정확한 신앙고백을 했던 것이며, 그렇기에 그의 신앙고백은 더욱 돋보이는 귀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잡다한 해석들이 우리의 올바른 신앙고백을 방해합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설명으로서 정답 비슷하게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는 믿지 않지만 그 무언가 초인간적인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는 사람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지는 않지만 무슨 인류의 정신문화에 최고의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고 극구 찬양하고 높이는 사람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는 않더라도 달리 예수님을 본받고 따라갈 수 있는 길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종교인들이 실로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갖가지 ‘불신앙적인 신앙고백’들에 우리의 귀가 솔깃해져서는 아니 됩니다. 나름대로 예수님을 높이고 칭송하는 것 같고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는 그런 말들에 신자가 현혹을 당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이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고백받기를 원하시는 당신의 진짜 모습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듣기를 원하시는 ‘정확한 신앙고백’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바로 본문 15절과 16절에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 첫째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러 이 땅에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고 믿고서 하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는 직분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선지자,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간 사회에 실현시키는 왕이었습니다. 장차 오실 구세주는 바로 그 같은 세 직분을 한꺼번에 다 감당하실 분이었기 때문에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즉 구약에서는 메시아,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오신 구세주이심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말 속에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그의 믿음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훌륭한 왕이나 아니면 위대한 선지자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그들의 구세주가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로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자기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 엄청난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시다.’라고, 이 두 가지 신앙의 요소가 한 번에 모아져서 고백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구속자와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 구세주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안에서 합하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위대한 고백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위대하여 사실 사람으로서는 스스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17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기가 막히도록 멋지고도 정확한 예수신앙고백은 「혈육」 즉 어떤 다른 사람의 이성과 지혜와 교육과 연구만을 가지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친히 행하신 기적적인 일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입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 그 자체를 두고서도, 그 영광은 오로지 ‘이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신’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림이 지극히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귀중한 고백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지극히 사랑해 주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네가 복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으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정확한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어느 쪽 하나라도 잘못되거나 결핍되어서는 완전한 신앙고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을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시며, 이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이것만이 완전무결한 신앙고백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더러는 ‘4대 성인 중의 하나’라 하고, 더러는 ‘수퍼 스타’라고 하고, 더러는 ‘100년에 한번쯤은 나올 수 있는 위인들 중의 하나’라고 할지라도, 우리 각자는 오직 “저는 주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습니다.”라고만 고백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이 정확한 신앙고백을 할 줄 아는 성도만이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이 바른 신앙고백뿐이며, 이 신앙고백을 전도하고 선교할 때마다 음부의 권세를 연속 타파하는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는 백성의 일원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결코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부나 교황이 선포하는 희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의 신앙고백 여부에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빗나간 해석들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성경이 가르쳐 주는 그대로 ‘정확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만이 신자의 구원을 완성시켜 줍니다. 이웃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불신 남편과 불신 부모가 무엇이라 하든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사람이 무엇이라고 발표하든지, 이단이 예수님을 어떻게 오도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 무슨 새로운 연구라는 것을 발표하든지 간에 조금도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된 자에게만 알게 해 주시는 이 정확한 신앙고백, ‘주님은 나의 구세주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이 고백을 통하여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구원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 각 사람에게 꼭 같이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세상은 권력과 돈만 있으면 하나님도 필요 없다고 자만하고, 불신사회는 그 찬란한 문명을 뽐내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 신앙고백을 비과학적 구시대의 산물로만 생각하느냐? 아니면 나를 영원한 참된 구세주로 믿고 있느냐?”라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단들과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제멋대로 믿고 한 사람으로만 취급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너도 내가 사람의 연구의 대상, 비판의 대상,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나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고 있느냐?”라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더 중요한 말도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과연 그 교회가 세상을 이길 힘을 얼마만큼 보유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며, 이 질문에 대한 각 사람의 대답이 바로 그 개인의 구원 여부를 바로 그 자리에서 확정짓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말고 ‘당당한 신앙고백’을 선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신앙고백만이 교회가 불신사회를 압도할 수 있는 최첨단의 정보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오직 ‘정확한 신앙고백’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신앙고백만이 신자가 소유하고 있는, 신자가 세상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최대의 보화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이 주님의 ‘신앙고백문답’ 앞에서, 비록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어디까지나 당당하게,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하더라도 끝까지 정확하게, 오로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함으로써, 튼튼한 교회를 함께 세우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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