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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울어야 할 때 (시 7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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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피영민 목사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2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3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4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5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6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8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9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10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11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서론

위대한 솔로몬은 전도서 3장 1절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살이에는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가 있고 대학을 다닐 때가 있고 군대갈 때가 있고 장가갈 때가 있고 직장생활을 할 때가 있고 장례를 준비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4절에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교회 부흥회를 하루 앞두고 우리가 지금 웃어야 할 때인가 아니면 울어야 할 때인가 우리가 지금 춤춰야 할 때인가 아니면 슬퍼해야 할 때인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울어야 할 때 웃는다면 그 사람은 기한을 잘못 생각한 사람입니다. 슬퍼해야 할 때 춤춘다면 그 사람은 때를 잘못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먼저 이 질문에 결론부터 내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교회가 웃고 춤출 때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먼저 가슴을 찢고, 우리가 먼저 울고 기도해야 될 때가 바로 이 때라고 생각하고 이번 부흥회를 통해 여러분이 참으로 울며 통회하며 기도하고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때로는 우리를 웃고 춤추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때로는 울고 슬퍼하는 그런 역사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를 따라 합당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편 74편은 그 앞에 '아삽의 마스길'이라 하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아삽의 집안은 다윗임금 시대로부터 대대로 성가대장을 지낸 시에 능하고 음악에 능한 집안입니다. 이 아삽집안의 한 사람이 마스길을 썼는데 마스길이라고 하는 것은 후대에 교훈을 주기 위해서 쓴 교훈적인 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기자 아삽은 지금 어떤 시대적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예루삼렘은 황폐하고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영구히 파멸시킬 것처럼 성전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원수는 쳐들어와서 대 승리를 거두었고, 하나님의 백성은 원수의 침공 앞에서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였으며 그들은 지금 울면서 통회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사단의 활동은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기자인 아삽은 우리가 지금은 울며 통곡하며 기도할 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삽은 여기서 세 가지 예를 들어서 애통할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Ⅰ. 울어야할 세 가지 상황

첫째로 아삽은 하나님의 백성을 연기에 그을리는 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절 후반을 보시겠습니다.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이 질문은 주님이 직접 양육하시는 양떼들에게 어찌해서 하나님께서는 연기로 질식시키시고 연기로 죽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기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1절 후반에 진노의 연기(smoke of wrath)라고 했습니다. 연기는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삽이 파괴된 성전에서 연기만 올라오는 것을 볼 때에 아삽의 마음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지금 분노를 발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회를 하루 앞둔 이 시점에 조용히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나의 삶에는 하나님을 진노케 하시는 것은 없는 것인가? 나의 삶에는 성령님을 근심시켜드리는 것은 없는 것인가? 우리의 교회에 현실에는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진노를 격발케 하는 것은 없는 것인가? 우리 국가의 상황은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국가가 지금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는 것인가?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 이런 질문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대답이 나온다고 한다면 우리는 웃을 때가 아닌 것입니다. 시편 기자처럼 마음에 통회하고 눈물의 애절한 기원을 가지고 울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는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우리에게 그런 기도가 있길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는 4절 말씀에 보니까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한다고 했습니다. 훤화한다(roar)는 것은 사자가 포효한다, 사자가 으르렁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삽은 지금 바벨론의 군대를 사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자 같은 바벨론 군대가 와서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4절에 보니까 “자기의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깃발은 꺾어 버리고 자기의 우상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5절을 보면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철퇴로 성소의 모든 기물들을 부숴버린다는 말입니다. 7절에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의 엎었나이다.”하는 말은 그들이 성전을 다 엎고 더럽히고 모독하였으며, 더 나아가서 8절에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이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성전을 파괴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가르치는 회당을 뒤집어 놓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사자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가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우는 사자는 바로 마귀입니다. 여러분 마귀의 실제를 믿으십니까? 우리가정을 훼파하고, 우리의 영혼을 훼파하고, 우리교회를 훼파하고, 우리국가를 멸망시키려고 마귀가 도끼와 철퇴를 들고 있는 모습이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가정에 알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여러분 심령에 알지 못하는 이길 수 없는 그런 유혹이 끊임없이 있습니까? 죄와 악한 습관이 여러분을 끊임없이 넘어뜨리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악한 마귀의 끊임없는 공격인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 영혼을 넘어뜨리고자 온갖 절망감을 주고,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가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좌절감을 주며 우리의 참 소망을 빼앗아버립니다. 또 마귀는 우리 가정에 역사해서 부부가 싸우게 하고 사업이 안 되게 하고 망하게 하며, 자녀를 타락시킵니다. 교회마다 싸우도록 만들고 성도들이 일어나 싸우게 합니다. 더 나아가 마귀는 국가를 삼키고자 일어나서 정치도 지배하려 하고 언론도 지배하려 하고 교육도 지배하려 합니다. 이렇게 활발하게 역사하고 있는 마귀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마귀는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 웃고 춤출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아버지여 마귀가 이렇게 역사하는데 하나님의 역사는 어디에 있으십니까? 하나님 우리를 도우시는 구원의 손길은 어디 있으십니까? 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과 그 도우심을 구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믿습니다.

세 번째로 시편 74편에서 아삽은 9절 말씀에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없다”고 했습니다. 표적의 기근, 선지자의 기근현상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할 때는 하나님이 온갖 기적적인 싸인(sign)을 보내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을 주시고 또 만나를 내려 고픈 배를 채우게 하셨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했던 왕정시대에도 하나님은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엘리야도 보내시고 엘리사도 보내셨으며 그들을 통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느브갓네살이 와서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을 다 파괴하는 지금, 예전의 그러한 표적은 어디 있는가? 그 외치던 선지자들이 어디에 남아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와 표적의 기근은 바로 영적인 기근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끔 간헐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대대적인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대각성, 대부흥을 본 적이 있습니까? 최근에 들어서 이 사회는 대각성, 대부흥이 사라졌습니다. 영적인 기근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여 나 혼자 은혜 받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이 여 미국의 제 1차 대각성 운동처럼, 제 2차 대각성 운동처럼 위대한 대각성 운동이 이사회에서 이 한국에서 다시 한번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외치며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리 조지 휫필드가 감리교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그때처럼 우리에게 다시 한번 복음의 부흥이 일어나는 때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대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심령도 대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대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슬렁거리며 놀고 웃고 춤추는 그런 마음으로 대각성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왔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기력하고 무방비할 때에 악한 사단이 횡횡하며 역사하고 있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영적인 나태로 말미암아 영적인 가뭄이 이 땅에 초래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다시 우리에게 부흥을 보내시고, 다시 성령의 초자연적인 표적을 보여주시고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진지하게 울며 가슴을 치며 기도해야 될 때 인줄 믿습니다.

Ⅱ. 두 가지 질문

아삽은 이 파괴된 성전과 이런 세 가지 현실 앞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첫째 질문은 어찌하여(Why)입니다. 74편 1절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왜 그러십니까? 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때에, 내 가정에 이유 없는 괴로움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에 우리는 질문해야 됩니다. 하나님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악한 사단의 역사가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흔들어 놓을 때에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영적인 기근이 들어서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되지 아니하고 도리어 줄어들며 죄를 통회하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영혼의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할 때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내 삶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무엇인가가 있습니까? 내 삶에 하나님이 좋아하지 아니하시는 악한 습관이 있습니까? 우리교회 생활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왜 소망이 보이지 아니합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찌하여(Why)의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얻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불신자들을 탓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이 어찌 그러느냐 어찌 정치를 그렇게 하느냐 당신들 같은 사람이 어찌 국회의원이 되었고 어찌 당신들 같은 사람이 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는가? 라고 탓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하나님의 복의 통로인 우리가 져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면 우리가 복의 통로가 되어 이 사회의 악인들도 복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서 이 사회에 어려움이 임하고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 찬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옵소서.” 하며 기도할 때가 바로 지금인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는 아삽은 언제까지(how long)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0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how long)의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도 우리에게 영원히 진노하지는 않으십니다. 시편 30편 5절 말씀에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화를 내도 어떻게 영원히 낼 수 있습니까? 잠깐 내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도 지나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역사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개입되면 마귀의 역사는 당장에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기근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의 때에 7년의 기근이 있었다 할지라도 기근이 지나면 다시 풍년이 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울며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이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때가 속히 지나게 하시고 마귀의 역사가 속히 물러가게 하시며 영적인 기근의 때가 속히 지나가고 영적인 풍성한 은혜가 그때가 오게 하여 주옵소서.” 울어야 할 때 울면 웃어야 할 때도 오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울며 기도해야 될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울며 기도하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하는 기쁨의 때도 오는 것입니다. 울 때 울지 아니하면 웃을 때 웃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울어야 할 때에 웃음으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Ⅲ. 상황의 해결

성경은 두 번이나 정확하게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역대상 16장 11절 그리고 시편 105편 4절에 글자하나 틀리지 않게 반복된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무엇을 구하도록 했습니까?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주의 진노가 임했다는 것은 주님이 얼굴을 돌리신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 사람이 얼굴을 돌린다면 우리는 아 저분이 진노하셨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얼굴을 다시 우리에게 돌리시고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되겠습니다. 시편 기자들도 그런 간구를 여러 번 했습니다. 시편 80편 3절에도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무얼 비춰달라는 것입니까? 주의 얼굴빛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무얼 기도해야 됩니까? 마귀의 역사가 강한 것은 주께서 손을 품에 두고 손을 거두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손을 안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74편 11절에 무엇을 기도합니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우리는 “하나님이여 다시 한번 품에서 주의 오른손을 빼어주시고 마귀의 머리통을 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습니까? 마귀가 도끼와 철퇴를 들고 대한민국을 멸망시키자 이런 역사가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눈에는 안 보이십니까? 마귀가 도기와 철퇴를 들고 서서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마귀의 깃발을 세워보고자 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여호와여 다시 품에서 손을 빼어주사 그 오른손으로 마귀의 머리통과 목을 쳐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물리쳐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마귀의 진영은 요동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결국은 마귀의 진영은 수그러지게 되고 그 힘은 사라지게 되고 결국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영적인 변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절에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영구히 파멸된 것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주님이 다시 오시고 주님이 다시 발을 들여 놓으시면 그 가정은 살아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발을 들여 놓으시면 그 교회는 부흥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발을 들여 놓으시면 그 국가는 다시 번창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세 가지를 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고 하나님이여 주의 손을 빼사 마귀를 쳐주시고 하나님이여 주의 팔을 돌이키사 우리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 다시 들여놓아 주시옵소서.” 우리는 지금 웃고 어슬렁거리고 놀 때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침체로 인해 기도도 한마디 안하고 말씀도 묵상하지 않으며 살 때가 결코 아닙니다. 지금은 울며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그래야 웃어야 할 때가 올 때 우리는 웃는 대열에 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맞이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울어야 합니다. “주여 그 동안에 우리에게 허물이 많았습니다. 주여 그 동안에 우리에게 죄가 많았습니다. 여호와여 우리 국가와 교회와 우리민족을 향하여 진노하셨나이까? 이제는 얼굴빛을 비춰주소서 이제는 그 오른손을 빼주소서 이제는 그 발을 이 성전에 들여놔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서 큰 은혜와 응답을 받는 부흥회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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