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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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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미국의 선교사인 [스탠리 존스]의 이야기입니다.
스탠리 존스는 일평생을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산 사람입니다. 인도에서는 그를 성자로 추앙합니다. 하루는 그가 쓰러졌습니다.
중풍에 걸린 것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89세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중풍인데
90세 가까운 나이에 쓰러졌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미국 보스턴으로 후송이 되었는데,
그는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보실 때마다 '스탠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이렇게 외쳐주십시오."
의사가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아니, 선교사님! 저는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고
또 부흥사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외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스탠리 존스가 억지로 강권하니까
의사는 어쩔 수 없이 볼 때마다 그렇게 외쳤습니다.
"스탠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때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있다가
큰 목소리로 "아멘! 아멘!"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놀랍게도 6개월만에 완쾌가 됩니다.
그리고 선교지로 다시 돌아가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90세에 가까운 노환자가 중풍에서 완쾌될 수 있습니까?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자에게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의 이름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자에게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아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에 전혀 힘쓰니 성령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감격적이며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성전 미문에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의 사건이 우리 교회에도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럼 이런 기적이 우리 교회에도 나타나기 위하여 <2>
우리가 먼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의 시작은
1절에 베드로 요한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가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기도로 시작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교회나 교인들을 보면 대부분 너무 걱정스러울 정도로 열광적입니다.
그들은 새벽기도, 철야기도, 전도 그리고 섬김에 있어서
보통 교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면이 있습니다.
특히 성령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 특징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오전 9시, 오후 3시, 그리고 해질 무렵 등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면서 하루 종일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다는 것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루를 시작하며 아침에 기도하고, 일을 마치며 저녁에 기도하는 것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하다가 중간에 오후 3시에 기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후 3시에 기도했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 속에 날마다 하나님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구약에 이렇게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입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단6:에 보면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한다고 매대 방백들이 모함하여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죽이려고 할 때에
6: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그럴 때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털어 막아 다니엘을 구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기적을 준비합니다.
저는 근간에 우리 교회 철야기도회를 인도하면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 같은 믿음이 들어요.
그래서 오늘 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기도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기도하는 교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베드로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기적은 바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베드로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3>
기도하다가 만난 사건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수백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만들어내는 발전소로부터 각 가정까지는
전력을 공급하는 전선으로 일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발전소가 아무리 크고 또 엄청난 양의 전력을 공급한다 해도, 전선이 끊어졌다거나 가정에서 스위치 하나를 올리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은 성도의 기도라는 파이프 라인을 통해
우리의 삶에 공급되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동력선인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기 전까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앉은뱅이를 소개하면서
2절에 [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우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언제부터인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며 구걸하다가
오늘 베드로 요한을 만난 것입니다.

만남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우연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의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앉은뱅이가 베드로 요한을 만납니다.
3절 [ 그가 베드로 요한으로 더불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
앉은뱅이가 무엇을 구걸합니까? 동전 한닙입니다.
그것은 습관적인 요구였습니다.
그는 이 습관적인 것 때문에 큰 것을 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습관적으로 살지 않습니까?
본능적으로 살지 않습니까? 먹고살기 위하여 살지 않습니까?
그런 이가 어느 날 베드로 요한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습관적으로 구걸을 했지만
오늘 베드로 요한의 만남은 전혀 다른 만남이 되어
자신의 생애가 변화되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이 누구입니까? <4>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전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제자들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받아 기도하는 사람 만나면 나의 삶에도 놀라운 변화를 맞이할 것입니다.
저는 제 생애에 이와같이 성령 받아 기도하는 한 분을 만났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목회할 수 있는 것 감사드립니다.
이 분은 나환자 출신 집사로 당시 은사 집회를 인도하는 부흥강사였습니다.
저는 이 분을 만났기 때문에 제가 변화를 받았습니다.
금번에 충무 나환자 정착촌에 부흥회 가서 생각이 나기를 물어보았더니 삼천포에서 같이 집사로 한 교회를 섬겼다는 장로, 성가대 지휘자를 만났어요.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한때는 곽집사 하고 참 술도 많이 마셨다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 믿고 수지 만난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요.
이 분 때문에 지금 많은 청년들이 은혜 받아 신학교 가서
지금 목회자가 되어 목회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럼 베드로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어떤 사람 만났습니까?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이 사람을 메고 성전 미문에 두었다고 합니다.
미문이라면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문입니다.
그 곳에 이 앉은뱅이를 날마다 데려다 놓는 이유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사람들의 자비로움에 호소하여 구걸하기 위함입니다.
그 누가 보아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몇 가지 상황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1) 그는 가지가 원하는 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어디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마치 날개 없는 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독수리처럼 비상해야 할 새가 오리나 닭처럼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갈 곳에 가야합니다.
기도하러 가고, 전도하러 가고, 봉사하러 가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있지만 몸이 말이 듣지 않습니다.
이런 교인도 성령받으면 벌떡 일어나 갈 길을 간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입니다. <5>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고가 생겨서 장애자가 된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중증 장애자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모두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않으려고 해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해도 살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선한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롬7:25절에서 탄식합니다.
[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우리를 건져 주실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3) 그는 자기의 불행한 불구가 자기 인생의 밥벌이 수단이었습니다.
불구인 것만으로도 불쌍한데 그것으로 사람의 동정을 사서 밥벌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남다른 미모, 특별한 재능, 명철한 두뇌, 건강, 이 것 가지고 어디에 씁니까?
이것을 자신을 위해 밥 벌어먹는데 쓰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쓴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앉은뱅이나 나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 물질, 건강인 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먼저 쓸 줄 안다면 그 인생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를 위해 사용한다면
돈은 벌고 지위는 올라가지만 그기에 평안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목마름과 끊임없는 허무감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인간은 자기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는 것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뭔가 미치고자 합니다.
술에 오락에 아니면 돈버는데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 앉은뱅이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절망감입니다.
그에게 내일이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일이 없는 사람, 미래가 없고 꿈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 믿고 성경 찬송 들고 교회는 나왔지마는
영적으로 나의 모습이 앉은뱅이 모습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십니까?
얼마나 내 발로 스스로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합니까?
내 속에 얼마나 선한 생각이 떠오르고 있습니까?
나는 내게 주신 재능과 물질과 건강으로
지금 밥벌이하는 데만 열심히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베드로 요한을 보자 <6>
전에 하던 습관대로 한 푼 얻고자 구걸을 합니다.
베드로 요한을 만나서 구걸한 것은 영생이나 구원이 아니라
자기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은과 금이었습니다.
아니 작은 동전 한 닢이었습니다. 그것은 습관적이고 본능적인 요구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교회에는 나왔지마는
앉은뱅이 같이 성전 안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자신의 육신적인 욕구만 채우려고 하는 교인은
다분히 습관적 그리고 본능적인 행동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성전 안에 들어와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예배를 드리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예배드리고 본능적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제의 삶이나 오늘의 삶이나 또한 내일의 삶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내일 가족 여러분 ! 분명히 아셔야 할 것 한가지 있습니다.
습관적이고 본능적인 삶의 결과는 항상 무능과 허무함만 남습니다.
한 상담센터 전화에
어떤 중년 남자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청해왔습니다.
한 평생을 한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했는데
어느 날 문득 바라보니 자기가 무능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래 부하직원들은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위에서는 짐스러워하면서 은근히 사표 쓸 것을 강요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허탈하고, 한편으로는 분하고 억울하기도 한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울적한 마음으로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피곤에 지쳐서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는 늦게 들어왔다고 구박을 하면서 억지로 밥상을 차리더랍니다.
그러다 아내가 밥상을 차리는 동안에
식탁에 있는 과일 하나를 무심코 집어들었는데,
하뿔사 ! 그 순간 아내가 호통을 치면서 하는 말이
[ 그건 내일 애들 간식으로 싸 보낼 거예요...! ]
그래서 그냥 내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무리해도 잠이 오지 않아 전화를 했다는 거였다.
인생이 허무하고 도대체 왜 사는지 모르겠고,
더 답답한 건 분명히 열심히 살았는데,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그런데 결과가 이토록 처참하다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나라 남자들, 참 안됐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남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7>
습관적으로 본능적으로 사는 삶의 결과는
바로 오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삶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꼭 소유해야할 자산이 있습니다.
무능이 아니라 허무가 아니라 허탈감이 아니라
생의 기쁨과 행복과 의미를 앉겨다 주는 꼭 소유해야할 자산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에게 4절에 우리를 보라 하니
앉은뱅이는 5절에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습관과 본능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단지 전에 하던 대로 무엇을 얻을까 하여, 아니 꼭 얻겠다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믿져바야 본전인데 하는 기대 반 실망 반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어떤 기대를 갖고 나옵니까?
오늘 설교에 좀 다른 것이 있을까?
아니면 전에 하던 대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 와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만나야 합니다.
기대를 가진 예배를 통하여 느낌과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인 성령의 감동과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확신 가지고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교회 나오시기 바랍니다.

비록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을까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지마는
그러나 베드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6절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
이 세상은 은과 금 이야기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가치를 금으로 평가합니다.
돈 이야기 빼면 세상에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심지어 전쟁도 돈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금 이야기하는 곳이 아닙니다. <8>
금의 위력을 나타내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의 위기와 유혹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도 세상처럼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마저도 세상의 문제를 돈 문제로 바라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입니다.
교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소유하며
그 능력을 나타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여기에 교회의 본질이 있습니다.
교회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는 절대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된 것도
바로 저들이 성령 받아 가는 곳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2001년.9월7일 뉴욕의 한 메디칼센타 외과의사가
7,000km 대서양 건너 프랑스 한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의 담낭을 떼어내는 수술에 성공을 했습니다.
광섬유로 연결된 아주 작은 수술칼을 이용해
미국에 앉아서 프랑스에 누운 환자를 수술했다는 겁니다.
이 원격수술은
시간차가 0.15초에 불과해 실제 수술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수술의 이름을
1927년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했던 찰스 린드버그의 이름을 따,“린드버그 수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과학의 힘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대단한 것 같지만 아직도 아니 영영토록 현대 의학이 감당할 수 없고 고칠수 없는 분야가 더 많습니다.
나아가 현대과학이 감당할 수 없는 분야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의 힘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 그 이름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일찍이 초대교회는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
이 말씀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 이름의 능력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9>
사람들에게 배척 당하시고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빌2:9-11절 이하
[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요 소망인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지금도 우리에게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사망한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게 하는 이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세상의 힘을 가지지 못해도 세상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신령한 힘이 있습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 그 이름의 능력이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권투 왕 무하마드 알리를 잘 아시지요.
그는 현재 파킨스씨 병에 걸려 투병중에 있습니다.
지난번 애틀란타 올림픽 때 마지막 주자로 성화 점화를 위해 단상에 올라섰는데 점화를 제대로 못할 정도로 손을 덜덜 떠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전성기 시절
"나는 이 땅의 힘의 제왕이다"라면서 큰소리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그가 떨리는 손으로 겨우 경우 점화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느냐고 안타까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가 이 병에 걸렸습니다.”
천번 만번 옳습니다. 인간의 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이 만든 힘은 다 유한합니다.
정보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세월이 흐르면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10>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능력은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그럼 구걸하던 앉은뱅이의 변화받은 모습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7-8절에 보니
[ 베드로가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
소설가 임옥인 권사의 간증
중풍으로 쓰러져 온 몸에 전신마비가 왔습니다.
병원에 전혀 치료도 안되고 소망이 없다고 해서 퇴원하여 집에 있었습니다.
친구 권사가 심방을 왔습니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옥인아 일어나!」그러더랍니다.
「아니 친구 간에 이럴수 있나 왔으면 안수기도라도 해주지
누가 누워있고 싶어 누워 있는줄 아느냐?」 싶더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니 행3:이 기억나더랍니다.
앉은뱅이도 일어났는데 그래서 마음 속으로 외쳤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하며 손을 확 잡았는데 손이 움직여 지더랍니다. 그래서 왼손을 움직여 보니 손이 움직입니다.
그랬더니 친구 권사가 또 「옥인아 일어나라」하더랍니다.
그래서 벽을 잡고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 건국대학교 제자들이 병문안 왔었는데
인사도 안 받고 밖으로 뛰쳐나갔답니다.
그런데 임권사님은 벽을 짚고 돌다가 손을 떼고 돌았습니다.
그때사 할렐루야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후 임옥인 권사님이 < 새손 >이란 시를 썼습니다.
[ 걸레같은 내 손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손이 새 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손을 안다, 십자가에 못밖힌 손을 ]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단 걸어보고 나면,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보고 나면,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억만금을 주어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난 과거의 헛된 세월이 안타까울 만큼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11>
거의 평생을 성전에 출근했습니다만 늘 그 문밖에서 성전을 등지고
실상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왔습니다.
가장 성전에 가까이 있는 듯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하여는 한번도 돌아서본 적이 없고
오직 세상을 향하여만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성전 안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들어갑니다.
걸으며, 뛰며 웃으며, 울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이제 살아 있습니다.
거듭난 생명의 환희가 넘칩니다. 그가 부르는 찬송의 소리는
괜한 목구멍의 울림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미입니다, 간증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된 모습을 본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9절 [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의 찬미함을 보고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고 합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한 사람이 변하니 세상이 변합니다.
나 은혜 받고 변화되면 세상이 변한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부자도 권력자도 지식인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잘 생긴 연애이이나 스타도 아닙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병들고 별 볼일 없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초대교회 지진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대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몇 사람만 하면 됩니다.
아니 성령 받아 신앙의 체질이 바뀐 그리스도인 몇 사람만 하면 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난 기적의 사건이 <12>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도전을 주고 있습니까?

성전 미문 앉은뱅이가 한 푼 달라고 구걸할 때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은 금은 없지만 한가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름을 가진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할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피카소의 이름과 싸인이 있는 그림 하나의 값이
집 한 채의 값보다 더 비싼 것을 아십니까?
록펠러의 이름 싸인을 한 종이 한 장이
무려 백 만 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나 이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게 하는 기적의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기적을 보고 몰려온 무리들에게 그 능력의 이름을 소개했습니다.
행3:16절에
[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
행4:10절에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완전히 낫게 한 능력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기이히 여기는 무리들에게 그 이름의 진정한 위력은
병 고치는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행4:12절을 보십시오.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세상에 구원을 얻을만한 유일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이 없을지라도 자신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야말로
그의 인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확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13>
영적인 구원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구조와 실제적인 삶까지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우리는 더 이상 내게 없는 은과 금을 한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내게 없는 자격증과 권력과 능력과 외모와 은사로 인해 절망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왜냐고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적과 같은 능력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와 같은 능력을 우리도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나도 믿고 너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위대한 구원의 능력,
변화의 능력을 일으키는 원동력입니다.
이 능력과 힘을 체험하려는 자는 베드로와 같이
앉은뱅이 된 자와 같이 그 이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없는 것에 절망하지 말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더 이상 돈이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는 앉은뱅이 같이
믿음을 가지고 나도 변화고 세상도 변화시키는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내일교회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도 이 시간 다같이 함께 기도 드리면서
구세군 창시자 윌리암 부츠 대장의 절규를 이 땅에 외치고 싶습니다.
오~ 하나님!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전도의 감격과 기쁨, 그 보람을 상실했습니다.
전도의 영광도 부담도 잃어버린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이제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주옵소서.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옵소서. 지옥의 고통과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옵소서.
사탄의 사악함과 하나님의 구원의 열망을 보여 주시옵소서.
예수 - 그 이름의 능력을 칠배 더 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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