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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은 희망의 시작입니다.(고후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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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지난 주간에 우리는 설 연휴 때문에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며느리들만큼이나 바쁘게 보낸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니까 '맏며느리 타령'이라는 의미 있는 글이 있어서 조금 요약해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턴 가부좌네 다섯시간 전부치네.
허리한번 펴고싶네 한시간만 눕고싶네
남자들은 티비보네 뒤통수를 노려봤네.
주방에다 소리치네 물떠달라 난리치네.
꼬치꿰다 손찔렸네 대일밴드 꼴랑이네
내색않고 음식하네 말했다간 구박이네
꼬치굽고 조기굽네 이게제일 비싸다네
맛대가리 하나없네 쓸데없이 비싸다네
음식장만 내가했네 지네들은 놀았다네.
절하는건 지들이네 이내몸은 부엌있네.
이제서야 동서오네 낯짝보니 치고싶네.
윗사람이 참는다네 안참으면 어쩔거네.
바리바리 싸준다네 내가한거 다준다네
아까워도 줘야하네 그래야만 착하다네
남자들도 일한다네 병풍걷고 상접었네
무지막지 힘들겠네 에라나쁜 놈들이네
명절되면 죽고싶네 일주일만 죽고싶네
이십년을 이짓했네 사십년은 더남았네"

우리가 설 명절에 먹는 한끼 음식의 칼로리가 보통 1000칼리를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살을 빼기 위해서 30분 동안 운동을 하면 100칼로리가 빠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30분 운동한 것보다 몇 배의 운동 효과를 주는 것이 웃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살을 빼기를 원하신다면 호탕하게 웃으십시오.

지난 1월에 도서출판 이레에서 미국의 꼬마 시인이었던 매티 스테파넥의 시집을 엄선해서 [하트송]을 펴냈습니다. 그의 시집은 일약 밀리언셀러가 되었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시집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희망에 관한 메시지 때문일 것입니다.
매튜 조지프 태디어스 스테파넥이 본명인 그는 '매티'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990년 7월 17일 워싱턴 D.C.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근육성 이영양증'이라는 희귀병을 앓아왔습니다. '신경 근질환'의 하나인 이 질병은 신체 근육이 점점 퇴화되어서 걷고 움직이는 데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도 약 1만 5천여 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초기에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은 근육에 힘이 서서히 빠지면서 걸음걸이가 이상해지거나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지거나 자주 넘어지게 됩니다. 병이 더욱 진행되면 근육운동은 물론 호흡, 심장 박동, 소화 기능 등 모든 신체 기능이 서서히 마비됩니다. 아쉽게도 현재까지는 근본적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매티라는 어린 소년이 바로 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 형과 누나도 같은 병으로 이미 잃었습니다. 이제는 그의 엄마마저 같은 병이 발병했습니다. 매티는 어린 시절부터 휠체어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야 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신장 투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병세가 악화되어서 그의 나이 13살이던 지난해 2004년 6월 22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신변을 둘러싼 이러한 암울한 사연들이 센세이션의 주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미국 전역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신 가장 큰 이유는 매티라는 한 인간이 보여준 '희망의 힘'이었습니다.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그의 병이 아니라 "어떤 폭풍우 뒤에도 웃으면서 신나게 놀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던, 단순하지만 힘있는 그의 메시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근 우리 한국 사회가 과거에 비해서 아주 현격하게 달라진 것이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자살율의 급격한 증가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20대와 30대의 젊은이들의 사망자 중에 자살을 통한 사망이 두 번째 원인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40대의 자살율은 현재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살자들의 자살 동기 중에 80%는 모두가 우울증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생기 발랄하게 희망을 말하고, 희망을 노래하고, 희망 앞에 자신의 열정을 드려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해외 이민 신청자의 증가입니다. 지금 이 땅의 젊은이들이 더 이상 이 땅에는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외의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전문가들이 말하는 일치된 진단 가운데 하나는 우리 한국 사회가 희망을 잃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있는 사회, 이런 사회에 과연 우리는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이런 사회 속에서 동일하게 절망하고 있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절망은 오늘 이 시대 우리들에게만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살고 있던 시대에도 절망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도 한때 깊은 절망을 느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졌다" 어떤 번역에서는 살 희망을 잃어버렸다고 했고, 삶의 절망에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 소망이 끊어지면 절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은 절망했지만 절망 속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저와 여러분도, 우리도 과연 바울처럼 우리의 절망이 희망의 새로운 시작이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절망의 현실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한국 사회가 좀더 밝은 사회, 미래 지향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정직하게 자기의 감정이나 아픔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웃들이 그런 표현을 할 때에 그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성숙함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잘 안됩니다. 우리 민족은 안타깝게도 감정 표현이 가장 서툰 민족입니다. 아니 우리는 감정 표현은커녕 그 감정을 서둘러 억누르며, 은폐하는 일에 더 익숙합니다. 한국인들의 의식을 연구하고 많은 글을 써낸 이규택 씨는 이런 한국인들의 의식구조를 가리켜 '은폐 의식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드러내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그 감정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미덕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배울 때에 나타납니다.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배울 때에 제일 힘들어하는 것은 'yes', 'no'라고 하는 자신의 분명한 생각을 말하는 일에 있어서 아주 어려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영어를 배우면서 yes와 no를 말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배고프세요?" "Are you hungry?" 그러면 배고프다고 "yes"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물으면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할 것 같습니까? "배고프세요?" "Are you hungry?"라고 물으면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no, no, no" 서양에서 그런 식으로 대답을 하면 저 사람은 no를 몇 번씩 말하는 것을 보니까 정말 배고프지 않는가 보다. 그래서 아주 쫄쫄히 굶어서 돌아가실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Are you hungry?" "배고프세요?"라고 물으면 "yes"라고 분명히 대답을 해야 합니다.

한국 조선 말기의 고종 시대에 초기 외교관 공사이면서, 동시에 선교적 사명을 부여받고 왔던 알렌은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yes'가 'no'요, 'no'가 'yes'라는 것을 알기까지 나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만일 우리가 우리 속에 감추고 잠재시키는 이런 은폐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국제 사회에 적응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 당시 직면하고 있었던 어려움을 조금도 은폐하지 않습니다. 아주 솔직하게 틀어놓습니다. 본문 8절에서 그는 아시아에서 그가 당한 환난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여기에서 아시아는 아마도 지금의 터키의 에베소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가 힘에 지나도록 고생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을 합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얼마나 솔직한 표현입니까?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절인 9절에 보면 "나는 사형 선고를 받은 심정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우리는 정확하게 바울이 직면하고 있었던 그 당시의 환난이 어떤 환난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도행전 19장에 은장색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의 사건에 바울이 연루되어 그가 겪었던 고생에 대한 술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 보면 바울이 "내가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면"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이 살고 있던 당시에 어떤 심한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형벌 가운데 하나가 체포되어 콜로새움 경기장에서 야수들과 격투를 벌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사건을 앞에 두고 그가 느꼈던 일종의 심리적인 절망감의 토로였을지 모른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가 당한 환난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바울은 지금 자기 가슴을 억누르는 이 처절한 절망감을 숨김없이 그대로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은 매우 건강한 사람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절망을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그는 치유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해야 치료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병은 자랑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중독증세를 치료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마련되는데 그 중에 가장 효과적인 소위 알콜 중독을 치료하기 위한 AA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소위 Alcoholic Anonymous라는 한국에서도 익명의 알콜 중독자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알콜 중독을 가장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모임으로서 이미 심리적으로 검증된 결과를 얻어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모였을 때 치료하기 위한 소위 12개의 스텝을 따라서 그들이 어떤 일을 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스텝은 알콜 중독자들이 모였을 때에 반드시 이런 고백을 하고 시작을 합니다. "저는 그 동안 알콜에 대해서 무력했으며 그리고 제 스스로 제 삶을 수습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컨트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알콜 중독자 가운데 "나는 알콜 중독이 아니야, 조금 그냥 과하게 마셨지" 이런 사람은 절대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정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태, 상처받은 현실, 절망스러운 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치유의 시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치료를 원하십니까? 희망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나 자신의 절망감을 은폐하지 마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절망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십시오. 아프다고 말하십시오. 괴롭다고, 답답하다고, 죽을지경이라고 말하십시오. 괜찮습니다. 그 절망을 시인하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십시오. 그렇다면 그 절망의 순간이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절망의 현실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 둘째로 해야 할 일은 우리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뢰할 줄 아셔야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절망을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본문 9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때때로 아주 아픈 절망을 경험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바울도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저를 부르셔서 이렇게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쓰고 계시는데 어째서 저에게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십니까?" 그것도 조금 어려움이 아니라 절망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대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그런데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그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적당한 고난, 적당한 어려움을 만나면 내 지혜로, 내 꾀로, 내 방법으로 그 절망을 돌파해 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커다란 사건을 만나면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내가 잡을 수 없는, 내가 다룰 수 없는 그런 커다란 위기가 찾아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포기하는 것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절망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때라는 것을 말입니다. 나 자신으로는 어쩔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절망을 극복하는 새로운 희망의 역사가 창출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자신에 대해서 죽는 그 순간이 바로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자식을 두지 못한다는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요즘은 자식을 안 둘려고 젊은 커플들이 몸부림을 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구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자식을 많이 두는 것이 축복이었고, 자식을 두지 못한다는 것은 최대의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자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 속에 처했을 때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본 그 순간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기적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나중에 로마서 4장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한 번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2절에 보면,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생육하게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은 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절망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십시오. 새로운 생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한 기적이었습니다. 절망 중에서 붙들었던 믿음,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이런 역사적 믿음의 조상들의 경험을 되새겨보면서,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믿음의 여정을 돌이켜 보면서 과거에 나를 도우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도우실 것이다. 아니 훗날에도 내 미래에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어떤 절망이 찾아와도 그분은 나를 도우신다. 이것을 견고하게 믿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의 고백으로 시작했던 오늘의 텍스트는 바울의 입을 통해서 희망의 고백이 선포되기 시작합니다. 이 희망의 고백을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건지실 것입니다.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실 것을 나는 믿기에 그를 의지하여 새로운 희망의 미래를 바라본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더 이상 절망의 고백이 아닙니다. 그의 고백은 희망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희망의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존 F. 케네디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큰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큰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큰 사람으로 만드는 기회이다" 커다란 위기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커다란 희망을 붙잡기 위하여 커다란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라고 그는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커다란 위기가 있습니까? 조그만 위기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정말 힘들다, 나는 어쩔 수가 없다, 이런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습니까? 절망하십시오. 그러나 그 절망 속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그 절망 속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뀔 것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할 일 세 번째는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 주는 도움을 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할 때에 이것이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소중한 축복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우리 주변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작지만 소중한 축복의 도구가 되어 주는 삶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우리 주변에 고통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 때에, 작은 도움과 작은 격려를 베풀었을 때에 그것이 비록 사람에게 행한 작은 일일는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너희가 나에게 한 일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어려움이 찾아올 때 이웃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기도를 요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이 말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얼마나 커다란 사람입니까? 바울은 영적 거인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우리를 좀 도와달라, 나를 좀 도와달라,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기도했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저는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여러분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시면 하나님의 은사가 제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 은사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은사를 통해서 저는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여러분이 저를 도운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축복이 되어 주는 새로운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를 통해서 은사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물론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그 은사를 통해서 이웃들을 격려하고 붙들어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의 은사를 주셨다면 그 기도를 통해서 이웃들에게 기도의 도움을 베풀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말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따뜻한 말로 이웃들을 격려해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질의 여유를 받은 분들은 그 은사를 가지고 이웃들을 물질로 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어떤 특별한 달란트를 주셨다면 그 재능을 가지고 우리는 이웃들을 격려하는 일에 사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이런 희망이 되어주는 마음들이 존재하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나누고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절망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경이 사탄을 묘사할 때 사탄을 '아볼루온', '파괴자'라고 묘사합니다. 사탄은 파괴자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희망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사탄 마귀는 우리에게 희망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는 희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는 새로운 생명, 새로운 희망을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희망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희망이 필요합니까? 십자가 앞에 오십시오. 거기 우리의 죄, 우리의 절망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절망하게 만든 죄를 짊어지고, 고통과 질병과 상처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 그분이 우리의 절망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절망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장사한지 삼일만에 부활하는 순간에 바로 우리의 희망이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희망, 흔들리지 않는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그는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앞에 직면하고 있는 어떤 고통이든, 어떤 절망이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절망 속에 빠지지 마시고, 그 절망 속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던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절망이 끝났다는 사실과 우리의 희망이 시작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 이 복음을 믿는 사람, 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망은 결코 마지막 끝이 아닌 것입니다. 절망은 희망의 시작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던 매티의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피부,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튜브들, 깡마른 몸. 2000년 여름 어느 날, 워싱턴 국립 어린이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던 매티에게 의사들이 물었습니다. "죽기 전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이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보렴." 의사들은 매티가 이제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매티의 병세가 2000년 여름 들어서 더욱 악화됐기 때문입니다. 결국 의사들은 매티가 짧으면 이틀, 길어야 닷새밖에 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마지막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 매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선은 시집을 내고 싶어요. 내 글 속에 담긴 생각과 느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 두 번째 소원은 나의 영웅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거예요. 세 번째로는 내 책이 정말 나오게 된다면,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소개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장난감을 갖고 싶다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답할 줄 알았던 의사들도, 그리고 아들이 며칠 살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매티의 엄마 제니도 모두 함께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언젠가는 매티의 시집이 꼭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해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의 기도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6월 병원에서 자원 봉사 활동을 하던 출판사 사장 셰릴 반즈가 우연히 매티의 사연을 듣고 매티의 첫 번째 책 [하트송](Heartsongs) 200부를 처음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집은 일약 밀리언셀러가 되었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습니다.

매티의 두 번째 소원은 두 번째 책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매티의 소원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병원 관계자들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매티라는 소년이 그를 얼마나 만나고 싶어하는지 전한 것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과 처음으로 인사하던 날을 매티는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나는 병원 침대에서 죽어가고 있었죠. 어느 날 간호사 누나들이 '매티, 5분 뒤에 전화를 받게 될 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로 전화가 왔고 나는 전화를 받았어요. 그러고는 '안녕, 나는 지미 카터란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이후 지미 카터 대통령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지미 카터 대통령은 매티의 두 번째 책에 추천사를 써주었습니다. 세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던 소년이 드디어 명실상부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2001년 10월, 매티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가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세 번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스스로 '수염줄'이라고 부르는 산소 공급 튜브들을 달고 휠체어에 앉은 모습으로 방송에 출연한 매티는 그 동안 늘 생각해오던 자신의 믿음을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폭풍을 겪어요. 하지만 풀이 죽어 슬퍼하면서 다음 폭풍이 또 다가와 우리를 날려버릴 때까지 마냥 기다려서는 안 돼요. 함께 힘을 모으면 그 폭풍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뻐해야 해요."

매티의 책을 읽고 매티를 '희망을 가르치는 나의 꼬마 스승'이라고 부르게 된 오프라 윈프리는 방송 도중 눈물을 글썽이며 카메라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해야 한다면 그것은 매티의 책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책을 사러 가시는 길이라면 저는 매티의 책을 권해드릴 거예요. 이게 바로 그 책입니다, 여러분."
어떤 신문에서는 매티의 시를 가리켜서 절망 속에서 움튼 희망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이제 저는 끝으로 매티의 시집인 하트송에서 '하나님 보세요'라는 시를 읽어드리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마지 아줌마네 꼬마 아기가 어젯밤 죽었다고 엄마가 말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저는 기도를 참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매일 밤마다 기도했습니다.
매일 낮마다 기도했습니다.
"꼬마 아기를 살려주세요"라고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죽었다고 엄마가 말했습니다.
화가 나서 저는 소리쳤습니다.
"기도해도 소용없잖아! 하나님은 듣지도 않아.
기적을 내리지도 않고,
아기를 살려주지도 않고 아무 것도 안 해."
엄마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다 들어준다고.
하지만 기도를 듣는다고 해서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하는 건 아니라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게 기도는 아니라고.
아기는 천국에 가서 제일 키가 작은 천사가 됐으니
그게 기적이 아니겠냐고.
매일 매일 기적은 일어나고 있겠지요.
그런데도 또 다른 기적을 바라니까
그런 기적이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나 봐요.
하나님,
매일 매일 기적을 베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 아줌마네 아기 일은 너무나 슬프지만,
하나님에게 화를 내지는 않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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