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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자(사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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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자

본문: 이사야 40: 1절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어려서부터 위대한 음악가의 꿈을 키우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6세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청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음악가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가 깊은 절망과 좌절 속에 빠져 있을 때 어머니의 격려의 말 한 마디가 그에게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너는 청력을 잃었지만 아직 시력이 남아있다. 사람의 입술을 보고 말을 파악하는 독순술(讀脣術)을 익혀라. 그러면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단다.” 그녀는 독순술을 배웠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과의 대화는 물론 비올라 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엘리자베스 바를로가 바로 그녀입니다. 영광은 이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신체장애를 극복한 그녀에게 자랑스러운 영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프랑크상을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를 주는 한마디의 격려가 아닐까요. 어릴 적 부모님의 따스한 한마디, 선생님의 신뢰어린 격려 한마디로 용기를 얻고 인생의 좌표를 굳게 설정한 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비록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용기를 주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와 선생님의 용기를 주는 격려 한마디가 우리 인생 진로에 미치는 영향력은 참으로 지대합니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어릴 때 공부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수학 과목을 제외하고 모든 과목에서 낙제 점수를 받았으니까요. 실망한 담임 선생님은 가정 통신란에 이렇게 적어서 보냈습니다.
"이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공부로는 희망이 없으니, 아예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넌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어. 다른 아이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비범한 인물이 될 거야."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은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세기의 과학 이론으로 평가되는 상대성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오늘, 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용기를 주는 격려의 말 한마디쯤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모의 격려는 자녀에게 다른 무엇보다 큰 힘이 됩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이민 5년차의 교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재미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하나 있는데 학교에 흥미를 잃어 큰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체육 시간이 있는 날이면 학교에 가기 싫어했습니다. 1학년은 주로 달리기를 많이 하는데 같은 또래의 미국 아이들은 그 아들에 비해 다리도 길고 전반적으로 체구가 크기 때문에 아들은 번번이 꼴찌였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기가 싫어진 것이었습니다.그때부터 학교 보내느라 혼이 났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들이 상장 하나를 들고 오면서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무슨 상인가 받아 본 부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장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위의 학생은 달리기 대회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뛰어 다른 학생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이 상장을 드립니다’.
그러니까 꼴찌에게 준 상이었습니다. 1등으로 달린 학생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 잘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는 학생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교육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칭찬 한마디를 전해 다른 이들의 용기를 북돋웠으면 합니다.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어떤 장로님 한 분이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안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괴로운 마음에 하루는 밤늦게까지 배회하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집 안팎 불을 환하게 켜놓고 미소로 남편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 말을 건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나는 당신의 진실을 믿습니다. 비록 부도가 나서 많은 빚을 졌지만 당신의 진실은 부도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그 옛날 욥이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일어난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우리 애들은 변함 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당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합니다.”
장로님은 아내 앞에 목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그 날 이후 다시 용기를 얻어 마침내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질책이나 원망 대신 따뜻한 말과 사랑은 한없는 위로와 하나님의 평강을 전해줍니다.
어떤 기관에서 남자 수백 명에게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남자들이 살아가는 동안 살맛나는 때가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제일 신나고 살맛나는 때는 아내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이고 두 번째는 직장에서 동료와 상사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칭찬과 격려는 사람들을 신나고 즐겁게 하고 용기를 줍니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호오도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정직 성실하였고, 감수성이 특히 예민하여 작은 일에도 늘 다정다감한 반응을 보이는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가끔씩 남들은, 그가 남자로서 너무 소심하고 유약하지 않는가 하는 평을 몰래 수건거리기도 하였으나,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그의 부인만큼은 남편 호손을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유능한 남자로 존경하기를 마지않았습니다. 호오도온의 직업은 세관의 관리로서 샐러리맨이었습니다. 맡은 바 직분에 늘 충직하게 일하면서 퇴근 후 밤에는 독서와 글공부를 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었습니다. 그의 부인도 남편이 어차피 활동적, 사교적인 인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손 일가에게 뜻밖의 불행이 닥쳤습니다. 별로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상사와의 사소한 갈등이 조금씩 누적되다가 어느 날 그만 직장인 세관에서 면직되고 마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월급에 의존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오래도록 하다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사실을 고했습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살아갈 앞날이 캄캄하기는 부인이 오히려 더했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절망에 빠져 있는 남편을 그냥 놓아두지 않고 오히려 간절한 사랑의 눈빛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여보, 너무 잘된 일이에요. 이제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마음놓고 집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신 거예요. 자, 힘을 내세요. 당신은 얼마든지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훌륭한 남자라구요." 그러면서 부인은 한 뭉치의 원고지와 펜을 남편의 무릎 위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호손은 결연한 표정으로 아내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사실은 벌써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몰래 익혀 두었던 작품의 소재가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튿날부터 직장으로 출근하는 대신, 그는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심혈을 기울인 집필은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작품을 탈고시켰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주홍글씨》였습니다. 그 작품은 곧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 나다나엘 호오도온의 등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부부가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랑이야말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개척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됨을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불행스런 현실을 용기로 뛰어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이웃의 마음속에 용기를 심어주는 사람입니다. 절망을 주면 죽음을 주지만 용기를 주면 삶을 줍니다. 절망을 주면 불행을 주지만 용기를 주면 행복을 줍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용기를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용기를 줄 수 있는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던 아브라함과 잉태하는 힘을 잃었던 사라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은 용기의 씨앗입니다. 오늘의 시대처럼 절망케 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용기를 주는 사람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24)
혹 실패하고 절망에 빠졌더라도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용기를 내세요. 틀림없이 그들 중 누구에게 당신은 정말 희망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한 마디 말과 작은 행동이 그 사람에게 커다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행동하나가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태풍 피해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 직장 일로 힘들어하는 친구, 병마와 싸우는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아파하는 친구... 그들에게 내가 기쁨이 되고 용기를 주며,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체구가 몹시 작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은 자기 자녀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벤 후퍼와 함께 노는 것을 원치 않았고, 친구들도 그를 놀리며 멸시하였습니다.
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벤 후퍼는 그때까지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젊은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교회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시간에 좀 늦게 예배당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 벤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잠시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에 예배가 끝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벤 후퍼도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벤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하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벤 후퍼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당황하여 빠져 나가는 벤 후퍼의 등을 향해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주지사 벤 후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시31:24)

젊은 시절의 고민과 방황으로 삶을 아프게 느끼며 생활하던 한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가을, 그 날도 쓸쓸히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전도지를 건네 주었습니다. 다음 주일, 그는 기찻길을 건너 산꼭대기에 있는 작은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께서 그에게 다가와 손을 꼭 잡아 주셨습니다. 그 손길은 너무나도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손을 잡은 그 학생은 '나도 이분처럼 목사가 되어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희망을 잃고 쓸쓸하게 걸어가던 이 학생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습니까? 함께 울어 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눌 이웃은 사라지고 숨가쁘게 밀치고 달려가야 할 경쟁자들만이 득실거리는 세상, 그러나 우리에겐 우리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며 힘과 용기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날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 형제 친구 등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서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함께 있을 때 용기와 사기를 북돋워주는 사람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동력입니다. 실망과 낙심하게 하는 것은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보다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한편으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습니다. 새로운 힘을 얻고 용기백배해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서로 위로하며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온 나라가 상식을 초월한 정치인들의 부정한 돈놀이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교회들이 앓고 있는 심한 무력증,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종 질병들의 기승 등으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 위로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여러 환난을 당하면서도 용기를 갖고 살아가는 것은 수수방관하지 않으시고 늘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라는 말은 본래 고대 헬라어에서 ‘곁으로 가까이 불러서 정답게 용기를 돋우어 주고 도와준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 위로라는 말을 10회나 반복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의 능력이 어떠한지, 위로의 목적과 방법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다른 이름은 ‘보혜사’인데 그 뜻이 ‘위로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실 때 위로자로 보내신 것입니다(요 15:26).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 앞에 계신 ‘대언자’라 했는데(요일 2:1) 그 말 역시 ‘위로자’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그런 공포의 신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인생길에 고난은 마치 길동무와도 같습니다. 고난없이 산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위기를 당하고 절망하며 좌절합니다. 연약한 실존이기에 항상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며 사모해야 합니다. 바울은 환난 핍박 시험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실로 그의 삶은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로와 자비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위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났고 위로를 받아 승리하고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극한 고난 중에 있을 때마다 찾아오신 하나님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환란 중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옥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은총은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 죄를 사하고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는데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위로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며 그 분량은 고난만큼 충분하여 모든 고난을 능히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 위로해 주고 같이 있어 주고 세워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정한 위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혼자 괴로워하는 분이 있다면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마음의 상처를 내보여 위로와 온전한 치유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위로로 갖가지 환난을 이겨낸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은 서로 위로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위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환난에 직면해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 오뚝이처럼 제기하였다면 이제 이웃을 위로해줄 차례입니다.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건강하게 치유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싸매어 줌으로써 적극적인 치유 공동체, 위로의 공동체로서 그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서 우리 서로 위로하며 용기를 주면서 삽시다.
예수를 10∼20년 믿으면서도 인격과 성품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주위에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과 언어가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나는 과연 변화된 그리스도인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해봅시다. 긍정적인 말 한 마디부터 시작해봅시다.
“오늘 참 멋져 보이십니다.” “당신을 만나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 되신 주님, 가뭄 속에 단비처럼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게 하소서. 누군가 실패하고 실수했을 때 질책이나 원망대신 따스한 사랑과 위로와 하나님의 평강을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제 입술에 권세를 주셔서 남을 세워 주고 격려하는 말을 하게 하소서. 좌절과 침체에 빠진 자를 위로하게 하시고, 주저앉아 있는 이들에게 용기와 도전을 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묵상 및 토의
0 나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사람인가?
0 나는 모든 사람을 격려하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0 드보라는 바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격려한 적이 있습니까?
0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격려한 적이 있는가?
0 다른 사람의 위로와 격려로 용기를 얻은 경험이 있으면 이야기 해보세요
0 나는 주의 사역자들에게 격려자인가? 근심자인가?
0 나는 슬퍼 낙심하는 이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는 자인가?
0 오늘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하며 아픔과 슬픔을 나눌 성도는 누구입니까?
0 부활의 진리로 내가 위로해줄 사람은 누구입니까?
0 나는 불의를 보고 대항해 싸울 용기가 있는가? 나는 진리로 인해 담대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0 나는 어떠한 계획을 이루어나갈 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까?
0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연약함에도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합니까?
0 용기와 사랑은 새로운 도전의 추진력입니다. 나의 삶에 용기와 사랑이 있습니까?

* 찬송: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 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

* 힘내그라

여고 2학년 때 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 집은 밥도 겨우 먹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1년치 공납금이 밀려 서무실 직원에게 불려 다니며 창피를 당하던 나는 견디다 못해 담임선생님께 자퇴를 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얼굴색이 검고 입술이 두툼해 깜쌍이란 별명을 가진 담임선생님은 묵묵히 내 말을 듣더니 다음날 엄마를 모셔 오라고 하셨다. 이튿날 엄마와 얘기를 끝낸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는 얼굴이 홍시처럼 발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니 밥 굶어 봤나?" "아니요." "엄마는 계시제?" "예."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배곯아 가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교까지 졸업해 고등학교 국어선생이 된 청년이 있다. 그게 바로 내다. 가난한 거는 죄가 안 된다. 힘내그라. 알았제?"
'예'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그 날 선생님은 나만 울린 게 아니었다. 교무실에서 거친 우리 엄마의 두 손을 꼭 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고등학교는 꼭 졸업시켜야 한다는 바람에 엄마는 아무 말씀도 못하고 눈물만 찔금거리다 나왔노라고 하셨다. 그 뒤로 졸업 때까지 선생님은 당신의 월급을 쪼개어 공납금을 대주기도 하셨고 공부도 그리 썩 잘하지 못하는 나를 ’학비감면 대상자’로 처리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정말 열심히 일해, 선생님 말씀처럼 내 밥벌이는 물론이고 어린 동생 셋과 엄마를 돌보며 우리 집 가장 역할도 충실히 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니 밥 굶어 봤나?" "엄마 계시제? 힘내그라"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결혼해서 몇 년 동안 어려움 없이 살았다. 그런데 얼마 전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들을 부둥켜안고 울다가 문득 잊고 지내던 그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살 수 있다. 내 가슴속에 선생님이 켜 주신 호롱불이 있는 한 나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 낙제답안 보여준 룸메이트

10월19일은 나의 절친한 친구인 레이턴 친(Leiton Chinn)이 생각나는 날이다. 19일은 그의 생일로 내가 그와 알게 된지 꼭 25년이 되는 날이다.25년전 미국 컬럼비아 선교대학원에 유학하고 있던 나는 도무지 영어가 제대로 되지 않아 크게 낙심하고 있었다.레이턴은 그때 나의 기숙사 룸메이트였다.나보다 훨씬 나이가 아래인데도 그는 어른스럽게 나의 고민을 물어왔다.영어가 힘들어 공부를 그만둘 생각을 한다고 했더니 “미국 사람인 자신도 철학이나 신학을 공부하는 게 어려운데 외국인이야 오죽하겠느냐”면서 격려를 해주곤 했다.그런데 어느 날 방에 들어오니 얼마전 치른 중간시험 답안지가 그의 침대 위에 던져져 있었다. 그의 점수는 40점으로 낙제 점수였다. 나는 놀랐다. 미국의 유명한 조지아대 교육학과 출신 미국인도 저렇게 고생하는데 나에게 이 정도 힘든 것이야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레이턴이 내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낙제점수가 보이도록 답안지를 올려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남을 배려해주던 그 친구의 얼굴이 오늘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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