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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3) : 하나님이 갚으시는 금식기도 (마 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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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기독교 밖의 금식전통

‘단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음식을 끊는 것을 뜻하는데 세계에서 단식을 제일 오래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까지는 중국의 한의사이자 기공수련생인 천젠민(陳建民)이라는 사람이 세운 7주의 기록이 최고였습니다. 그는 이 7주간의 단식으로 몸무게가 20킬로그램이나 줄었다고 합니다. 자고로 다이어트에는 단식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신문을 보니 고속철도가 천성산을 관통해서는 안 된다며 단식을 했던 지율이라는 승려가 이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무려 100일 동안 단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했던 단식은 음식만 끊고 물은 매일 마신 것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단식이라기보다는 금식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단식을 한 것일까요? 뭔가 목적이 있으니까 그 어려운 단식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단식이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음식을 끊는 것이기에 그야말로 내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하고 절박하다고 생각하면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단식원까지 다니는 분들이 많은데 이것은 생명을 걸고 살을 빼겠다는 뜻입니다. 흔히 정부나 어떤 정책에 반대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단식을 합니다. 북아일랜드 저항군 중에 영국 감옥에서 단식으로 항의하다가 60여 일만에 죽은 사례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감옥에서 저항의 의미로 단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도 단식이나 금식의 습관이 자주 눈에 띕니다.

하지만 단식은 이런 일반적인 경우보다 아무래도 종교적인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앞서 언급한 지율이라는 승려가 100일 단식을 했는데 이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교에서 단식은 13가지 실천 수행의 하나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므로 이 승려는 평상시에도 단식으로 단련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일생에 18번이나 단식투쟁을 하였고 그 날짜를 모두 합하면 145일에 달하는데 그 역시 힌두교의 관습에 의해 단식을 했던 것입니다. 힌두교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때문에 단식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수행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은 단식을 하곤 합니다. 이들은 음력으로 매월 11일에 단식을 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또 몇 주 전 설교 때 언급을 했습니다만 이슬람교에도 단식을 매우 중요시 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바로 ‘라마단’이라고 부르는 한 달 동안의 금식기간입니다. 라마단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이슬람 달력 아홉 번째 달을 뜻하는 말입니다. 라마단 기간에는 한 달 내내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이 지평선에 여명이 비치기 시작할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먹거나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라마단의 관습은 또한 유대교에서 온 것입니다. 지난번 설교에서 산상수훈 6장 말씀은 유대교의 3대 신앙행위인 자선, 기도, 금식의 순서를 따른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유대교의 금식은 이와 같이 기도나 자선에 못지않게 중요한 신앙의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 중에 바리새인들은 한 주일에 두 번, 즉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는데 이들은 민족을 위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또 특별히 속죄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1년에 한번 7월 10일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저들을 위해서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지성소로 들어가는데 그날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의무적으로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대제사장만 혼자 들어가서 제물을 바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을 백성들 모두가 함께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위기가 다가온다든지 하는 경우에도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좋은 모델이 됩니다. 유대인들처럼 바리새인들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금식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통회자복 해야 할 때 금식이 필요합니다. 민족이나 나라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혹은 개인이나 가정이 큰 위기를 맞을 때 금식이 특별히 필요합니다. 교회나 가정, 개인이 너무도 중요한 일을 할 때 금식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금식의 모범을 보인 셈입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심을 무조건 비난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들에게도 좋은 신앙의 전통이 있다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금식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이들이 올바른 목적으로 금식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과시하기 위해서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금식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이러한 금식을 책망하고 바른 금식을 하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금식이 잘못된 것이며 어떤 금식이 바른 것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금식

제일 먼저 올바른 금식의 개념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금식이라는 것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다 금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 금식이며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경건을 위해서 스스로 일정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금식입니다. 음식이 없어서 먹지 않는 것은 금식이 아니라 굶주림입니다.

또 경건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하는 것은 금식이 아닙니다. 어떤 여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는 매일 하루 한 끼씩 금식합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그럼 언제 금식을 하십니까?” “예, 아침에 금식을 합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남편이 한 마디 거듭니다. “‘아휴 목사님 말도 마세요. 이 사람은요 아침 금식한답시고 점심때가 되면 다른 사람의 두 배 세 배 먹어요. 그래서 금식을 해도 살이 안 빠집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믿음 때문에, 기도하려고 금식하는 줄 알았는데 살을 빼려고 금식을 합니다. 요즈음 이런 것을 금식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있는데 다이어트를 위한 것은 금식이 아닙니다. ’굶식‘입니다. 그래서 밥만 굶는다고 다 금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식도 바르게 해야지 잘못 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먼저 주님은 16절에서 잘못된 금식의 예를 드신 것입니다. 방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특별한 경우 말고도 평상시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금식을 했는데 문제는 그 금식을 할 때 “나 금식합니다”하고 티를 내며 사람들에게 과시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금식을 주님은 ‘외식하는 금식’ 즉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겉으로 꾸미는 금식이라고 책망하시는데 그 구체적인 사례가 16절에 나옵니다. 먼저 ‘얼굴에 슬픈 기색’을 냈습니다. 금식을 하면 자연히 배가 고프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배고픈 표정을 한 번 지어보기 바랍니다. 일단은 얼굴을 찌푸리게 되어 있지요? 지금 배가 고파 죽겠는데 웃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연히 얼굴을 찌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게 됩니다. 하지만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표정, 너무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 지금 금식하느라 너무 힘들어”라고 알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금식을 하면서 회개도 하게 되는데 이 때 정말 슬픈 것이 아니라 억지로 슬픈 표정 지으며 금식을 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금식일 수 없습니다. 또 이들은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안 그래도 찌푸린 얼굴인데다가 금식을 알리기 위해 분장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5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펴서 그 위에 앉았는데 나아가 이 먼지와 재를 머리에 뒤집어씀으로서 거의 분장 수준으로 원래 얼굴을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잠깐 TV를 보니 연기자들이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훌륭한 연기자들은 연기할 때 감정을 잡으니까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연기가 안 되는 사람이 억지로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려니 정말 힘듭니다. 눈에 침을 찍어 바르지를 않나, 눈에 인공눈물을 집어넣지를 않나 정말 가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 얼굴을 찌푸리고 한없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얼마나 가관이었겠습니까? 문제는 이렇게 겉모습으로는 금식을 나타내고 자랑하되 그들의 속마음에는 참된 금식의 마음과 자세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금식을 하면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고 칭찬 받을지 모릅니다. “저 집사님은 금식을 참 자주 해, 벌써 사십일 금식을 몇 번이나 했대. 와, 대단하다.” 이럴지 모릅니다. 실제로 저는 종종 이런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목사님, 저 요즈음 금식기도 합니다.” 여러분, 금식한다고 목사나 성도나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혼자 금식하세요. 말하면 능력이 떨어집니다. 더군다나 “저는 40일 금식 여러 번 했습니다. 저희 목사님은요 40일 금식 몇 번 한 신령한 분이예요” 하는 분들도 계신데 이렇게 자랑하지 마세요. 목사도 나 금식한다, 40일 금식 중이다 이런 이야기 성도들에게 할 필요 없습니다.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저는 가능한 한 40일 금식은 하지 말고 최대 39일만 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40일 금식한 분들이 가는 곳마다 “나 40일 금식했다”고 마치 자신도 예수님처럼 40일 금식 했으니 예수님과 동격이라도 되는 양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금식기도는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은 앞서 자선이나 기도의 경우에서 하신 말씀과 똑같이 16절에서도 이런 금식은 외식하는 금식이며 이런 외식하는 금식을 하는 사람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우리의 구제나 기도나 금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티가 안 나야, 사람들이 몰라줘야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상급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칭찬 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칭찬이 없다,” 이것이 칭찬 상대성의 원리입니다(제가 붙인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상급이 줄어든다.” 이게 바로 상급 상대성의 원리입니다.

올바른 금식

그래서 주님은 17절에 이론 유대인의 금식과는 완전 반대되는 금식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 반대되는 금식이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금식하는 티를 내고 속으로는 금식의 자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그와 완전히 반대로 겉으로는 금식하는 티를 전혀 내지 말고 마음속으로 금식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7절을 보세요.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머리를 단장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금식할 때일수록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목욕도 하고 화장도 더 예쁘게 하고 더 좋은 옷 입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네가 금식하는지 모르므로 칭찬도 안 할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께 상급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절에 그토록 은밀한 금식을 강조하십니다. 구제도 은밀하게 해야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이 갚아주시고, 기도도 은밀하게 해야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이 들어주시듯 이 금식도 은밀하게 남모르게 티내지 말고 해야 하나님이 보시고 갚아주신다는 말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또 한 가지 올바른 금식에 있어 꼭 필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특히 구약에 보면 잘못된 금식은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8장은 특히 금식에 관한 가르침으로 유명한 장인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일들을 한다고 비판합니다(사 58:4). 이어서 6절과 7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아가 예레미야 14장 12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금식을 열심히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가랴 7장 5절 역시 이스라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이 그토록 부지런히 금식하고 애통하였지만 과연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질타가 나와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구약의 말씀이나) 오늘 함께 나눈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된 금식이란 기도나 구제와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남이 어떻게 봐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마음, 그 진심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 금식에 관한 두 가지 극단주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금식만능주의로서 금식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키워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애들이 뭔가 사달라고 할 때,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금식투쟁을 하곤 합니다. 엄마 아빠가 안 해주면 “나 밥 안 먹어” 하며 떼를 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에도 금식을 통해 하나님을 굴복시키고, 금식만 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정반대로 금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냥 기도도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 뭐 그렇게 요란하게 금식까지 하며 기도를 하느냐는 금식 무용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금식은 만능이 아닙니다. 그저 나의 간절한 소망을 겸손하게 아뢰는 방법일 뿐입니다. 또 금식이 필요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냥 간절히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게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필요한 것도 다 포기하고 그야말로 내 생명까지 걸고 기도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이 너무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 되어서도 안 되고 너무 길게 무리하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평생 신앙생활 하면서 단 한 번도 금식기도를 해보지 못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 첫 부분에 불교에도, 힌두교나 이슬람교에도, 그리고 유대교에도 금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종교와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의 소신을 주장하기 위해 금식을 하고 단식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정말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 정말 시급하고 위급한 일이 있을 때 금식 한 번 못해본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특히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동참하는 기간인데 이 때야말로 금식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금요일(올해는 3월 25일)에 한 끼 금식을 하는데 이 정도가 아니라 한번 마음에 작정을 하고 며칠동안 계속해서 혹은 하루에 한 끼 정도 금식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금식할 때 해야 할 일

그러면 우리가 금식할 때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금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밥만 굶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할 때 금식과 더불어 꼭 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가 바로 기도입니다(눅 2:37). 밥만 안 먹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그것은 금식기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의 자복이 있어야 합니다(느 9:1~12). 금식을 하는 가장 큰 목적 중 하나가 회개입니다.

세 번째는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욜 2:12). 회개는 “하나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은 진정으로 내 마음 속에 애통하는 심정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겸손해야 합니다(대하 7:14). 금식을 해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금식 때 꼭 해야 할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꼭 성경을 읽으면서 금식기도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안 읽고 금식기도를 하면 그 금식이 바른 길로 인도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금식기도 다녀와서 이상한 헛소리를 하거나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 심지어는 이단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금식해야 할 때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떤 경우에 금식을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통회 자복할 때입니다.

둘째로 국가나 민족적인 위기가 닥쳐왔을 때입니다.

셋째로 개인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큰 걱정이나 슬픔이 있을 때입니다.

넷째로 나 자신뿐 아니라 친구나 다른 성도나 이웃이 어려울 때 금식기도가 필요합니다. 시편 35편 13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남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니 그 기도의 효과가 내게 되돌아옵니다.

다섯 번째로, 교회에서 사역자를 임명하거나 성직을 줄 때, 교회가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먼저 광야에 나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고(마 4:1~2).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 온 교회가 먼저 금식한 후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냅니다(행 13:2~3). 이 말씀은 다른 경우도 중요하지만 특히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금식기도 안하고 파송하니까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서 다른 길로 이탈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온 금식의 때를 살펴보니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지금이 바로 금식해야 할 때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와 민족이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우리 개인에게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준비 중이며 더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 큰일들을 준비하고 있는 때입니다. 이 때가 아니라면 언제가 금식할 때이겠습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바로 지금이 금식의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식기도에는 분명히 크나큰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바른 금식기도, 적절한 금식기도를 통해 기도의 응답을 받고 능력과 은혜가 넘쳐흐르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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