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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인생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법 (요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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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권영국 목사
   
  1. 여러분 혹시 살면서 하나님에 대해 실망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왜? 하필 내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셨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하나님이 내게 이러실 수가 있어?>
지금까지 사랑했고 믿어왔던 하나님에 대한 실망으로 오늘 아침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은 없습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그동안 내 인생의 장애물로 여겨왔던 것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놀라운 축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내 성공을 방해했다고 생각한 그 장애가 오히려 나를 나 되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인생에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시각 장애인의 처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했을 것으로 본다면 그 사람의 인생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냉대와 조롱 속에서 자라다가, 커서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보면서 자기를 낳은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을 냉대하는 세상에 대해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는 사람들마다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이냐?> 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고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더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는 앞만 못 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가 어둠에 휩쌓였습니다. 처음에는 남들이 자신을 가두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자신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나는 실패작이야. 이 세상에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지.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 뿐, 이제 내 인생은 끝장이야>

그런데 앞을 못 본다는 인생의 장애 때문에, 삶의 목적과 용기를 잃고 살아가던 이 사람 앞으로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맨 처음 보인 반응은,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 사람이 틀림없이 무슨 죄를 지었다> 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해졌습니다. 저 소경이 저렇게 된 것은 필시 죄 때문일 텐데, 그런데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니 금방 나온 아기가 무슨 죄를 지을 수는 없고, 그렇다면 태중에 있을 때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 사람들에게 이것은 참 호기심이 당기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인생의 장애를 보는 두 가지 질문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런 사고와 질병과 재난을 만난 사람을 보면, 제자들처럼 묻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무슨 죄 때문일까?” 그러나 우리가 저들이 무엇 때문에 저런 고통과 불행을 당했을까? 그 이유를 묻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느낄 수 없으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 소경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소경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항상 사람들은 불행을 당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소?> 라고 물을 뿐,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보이는 불행을 자신들의 호기심 거리로만 삼을 뿐 그 불행으로 상처받고 울고 있는 한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가진 인생의 장애에 대해서 계속해서 왜? 라고 질문하는 동안에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인생에 일어난 불행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동방에서 제일 가던 부자가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물을 잃고 한 푼 없는 알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모여 생일잔치를 하던 집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 한 자리에서 열 명의 자녀가 다 죽었습니다. 자신의 몸에는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기와장으로 헌데를 긁게 되었습니다. 그 불행한 상황에서 옆에 있어주어야 할 아내마저 남편을 욕하며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욥은 왜?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를 하나님께 질문하며 그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주시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갑자기 인생에 찾아온 고통의 원인을 알면 고통이 줄어들거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자기가 왜 소경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면 고통이 줄어듭니까? 아니면 고통을 더 잘 참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소경에게 필요한 것은 왜? 라고 소경된 이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듣는 것입니다.

인생에 장애물을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왜? 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지식적인 어떤 대답을 찾는다 해도 그 장애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왜? 라는 질문이 아니라,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이 고통의 원인에 대해 침묵하시는 것은, 설명해 주어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앞에서 인간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한 작은 벌레와 같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의 비밀을 설명하는 것은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색깔을 설명하는 것과 같고, 귀머거리에게 모차르트의 음악을 설명하는 것이며, 원자도 모른 사람에게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인간은 4차원 안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만 인식할 뿐, 5차원 6차원 그 이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대답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인간이 경험한 가장 무섭고 처절한 고통이었습니다. 누가 십자가에서 일어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당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인간이 되신 하나님보다 더 자신 있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인간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며 불행입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진 인생의 모든 장애물과 우리가 당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십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기 문제의 답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장애가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라는 관점으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의 비참한 삶이 무엇인가의 <결과>가 아니라 무엇인가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은 <이것은 죄가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불행을 죄의 결과로 본 제자들의 생각을 뒤엎으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3절)

그 순간 지금까지 소경의 몸을 얽어매고 있던 모든 사슬이 풀어졌습니다. 그를 가두웠던 어둠이 걷히고 대낮보다 더 환한 빛이 그의 인생에 들어왔습니다.

- 내가 소경이 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 이 소경된 내 인생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 쓰레기 같이 버려진 내 인생도 하나님이 쓰신다고?

지금까지 누구도 그렇게 자기에게 다가와 그처럼 마음을 만져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경이라는 자신이 가진 장애만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속에서 상처받고 부서진 그러나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영혼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죄 덩어리라고 비난하였지만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자신의 장애를 더 이상 장애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이 하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철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 다른 전문가들이 뭐라고 따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인생의 장애를 던져 버리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질문은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장애를 던져 버리시는 분이시고, 내 문제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상처의 원인은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을 죄의 결과로 설명해서는 풀리지 않습니다. 죄와는 관계없이 오는 불행도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인간의 불행에 대한 <왜?> 라는 질문에는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왜?> 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으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사는 우리는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제부터는 왜 나는 이런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묻지 말고,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이 장애를 내게 허락하셨을까? 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장애 속에 감추어진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인생
예수님은 소경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냅니다.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면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더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은 너는 이제부터 보냄을 받은 인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냄 받은 인생임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예수님 자신이 보냄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언제나 <나는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잃지 않았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면 보내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그 보내신 분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6:38)

또 요5:3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5:30)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왜? 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앞에 섰을 때에도 결코 왜? 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보냄 받은 인생은 왜? 라고 묻지 않습니다. 다만 사명만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실로암으로 내려가는 소경도 이제부터는 보냄 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실로암으로 보내시면서 그도 보냄 받은 인생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내가 보낸 인생이다. 이제 더 이상 왜? 냐고 이유만 묻지 말고, 왜? 하필 나만 그러냐고 원망 하며 주저앉아 있지 말고, 네 인생에도 할 일이 생겼다. 아직은 소경이고 어둠 속에 갇혀 살지만 가라! 내가 너를 보낸다. 실로암에 가면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곳에서 너는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의 보냄 받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그것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 맡기신 일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좇기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하나남이 주신 목적을 좇아가는 인생입니까?

보냄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대신 보내신 분을 기쁘게 하는 인생을 삽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8:29)

여러분은 지금까지 누구를 기쁘게 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그리고 남은 생애는 누구를 기쁘게 하는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보내신 분입니까? 보냄 받은 자신입니까?

우리 인생의 최종 결산은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판단이나 칭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보내신 분 앞에 섰을 때 진정한 칭찬과 상이 있을 것입니다.

보냄 받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보냄 받은 사람은 순종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치료행위였습니다.
그게 과연 될까? 그러나 소경은 그대로 가서 행했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은 따져서 이해하고 그 다음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해되고 안 되고는 보내신 분의 책임이고 보냄 받은 자의 몫은 가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우리의 순종에는 어떤 때는 이해하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아도 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명령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명령 자체는 이해되지 않아도 명령을 내리시는 분에 대한 신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보냄 받은 자들은 환경에 집중하지 말고, 자신에게도 집중하지 말고, 오직 나를 보내신 분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보냄 받은 자에게 중요한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보냄 받은 자를 평가하는 것은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오직 순종만이 그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둘째, 보냄 받은 인생은 때를 압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기까지 일생동안 일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의 생애를 보면서 나태, 게으름, 대충대충, 핑계 이런 말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왜요? 십자가에 못 박힐 자신의 때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4절)

일해야 할 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일할 수 있고 아무 때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변화하며 끝이 있습니다. 시간도 건강도 재물도 잃어버릴 때가옵니다. 기회도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갑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일할 수 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아는 사람은 핑계대지 않습니다. 내일로 미루지도 않습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몫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죄의 정체는 내일 일이 내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살아있는 동안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지체하지 말고 신속히 행하시기 바랍니다.

모르긴 하지만 이곳에 오신 많은 분들이 일 때문에 상처받고 일하다고 시험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당분간 일도 맡지 않고 숨어서 지내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교회는 교인수는 많지만 교회학교, 순, 제직회 부서등 구석구석에 너무나 많은 일꾼들이 부족합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인생이 가진 상처나 장애가 자신을 묶어두는 사슬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통이 나를 나 되게 만들어 갑니다. 그것을 내 인생의 걸림돌로 여기지 말고 끌어안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체험하고 그 속에서 하나의 더 깊은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보냄 받은 사람은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있는 동안은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셨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는 한에는 세상이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걱정할 것이 없다.
예수님이 모든 문제의 답이니까. 소경의 장애조차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동안 내 인생에 일어날 어떤 장애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에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빛을 우리를 통해 비추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있는 동안은,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고통과 상처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고 있습니까?
과연 이 민족과 이 나라는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를 믿고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삶의 용기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빛의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 때문에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활의 새 인류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인생의 장애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왜라는 물음에 매달리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나와서 그 장애물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보냄 받은 자로 살아가십시오.
어떤 장애를 가졌다할지라도 여러분은 이제부터 보냄 받은 인생입니다.

내가 보냄 받은 인생임을 깨달을 때 여러분의 고통은 영광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인생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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