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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 (출 33:17~23, 롬 12:9 ~15,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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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종화 목사

구약의 말씀: 출애굽기 33:17 ~ 2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12:9 ~ 15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서 2:1 ~ 11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였다.  그런데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물 두세 동이들이 항아리였다.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로 변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 그래서 잔치를 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 하였다.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징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많은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작은 사건에서부터 큰 사건까지 수많은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인간의 이해와 인간의 계획을 벗어난 이른바 초자연적인 사건을 접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크게 당황하게 됩니다. 그 경우에 우리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인간을 뛰어 넘는, 세상의 지혜를 뛰어 넘는 뭔가 초자연적인 것 또는 이 세상을 뛰어넘어 하늘에 있는 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지진과 해일로 엄청난 참상이 벌어진 뒤에, 신앙인이든 아니든, 신은 계신가,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런데 신은 있느냐는 질문을 할 때 공통적인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신은 항상 좋은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만 행하시고 항상 공의로우시며, 또한 사랑이 충만하시므로 훌륭하고 선한 일만 행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동안의 오랜 역사는 그만두더라도, 예수가 오신 이후에 이천 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그 역사는 믿는 자들에 의해서나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신이 난도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오염을 당하고, 악용을 당하고, 인간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활용을 당한 역사입니다. 인간은 신을 모신다면서도 늘 중심에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놓고 있었습니다.

수 백 만의 사람이 포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계신데도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울부짖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죄로 물든 유대 민족의 멸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뻐한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서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참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이든 아니든, 신은 계시느냐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저도 솔직하게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은 던질 수도 있지만, 지금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엔 너무나 급박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읽던지 간에 지금 우리는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헐벗은 사람 먹여주고 갇힌 사람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오늘 봉독한 출애굽기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매사에 불평불만을 일삼자, 모세가 화가 나고 괴로워서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출애굽도 좋지만, 모래땅 사막에서 우리를 이렇게 고생을 시키다니,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찌 이러냐고 한탄하고 항의하고는 급기야 하나님이 없는 거 아니냐고 합니다. 그것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제게 당신의 모습을 영광을 한번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얼굴은 볼 수가 없다. 나를  정면으로 볼 수는 없다. 그 대신에 그렇게 원한다니 내 뒷모습을 보여주겠다. 너는 바위틈에 숨어라. 숨어서 내가 지나갈 때 얼굴을 가렸다가, 내가 지나간 다음에 눈을 떠서 내 등을 보아라.” 등을 보면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영광은 못 보여주니, 영광의 그늘진 곳, 영광의 뒤만 보라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동산의 얘기로 연결이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욕구는 하나님을 보고 싶다,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은 초월적인 것 신적인 것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준 것은 뱀입니다.

뱀으로 표상된 사탄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 뒷면에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신성함,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취할 수 있다는 유혹이 깔려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인간이 유혹에 넘어갔다는 얘기만 기록되어 있지만, 욕구가 없다면, 욕망이 없다면 왜 뱀의 욕구에 넘어갔겠습니까?

인간은 본래부터 신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신의 영광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신의 심판의 능력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욕구를 부추기는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이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사회생활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사탄이란 인간의 한계, 본분을 넘어서 신적인 것을 가지라고 유혹하는 사람, 체제, 제도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권력 좀 쥐었다고 신처럼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게 유혹하는 것 그게 사탄입니다. 돈 좀 있다고 나눌 생각은 안하고 그걸로 사람까지도 사서 마음대로 하려는 것, 그게 사탄의 유혹입니다. 지능과 기술과 지식이 있다고 신처럼 군림하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입니다. 사탄은 검은 얼굴을 하고 검은 망토를 둘러쓴 뿔이 달린 괴물이 아닙니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신처럼 행세하라고 유혹을 하는 그것이 사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보겠다는,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면 도리어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강한 요구에, 하나님은 얼굴은 보여 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선악과 대신에, 생명나무를 포함한 수많은 나무의 과실을 따먹게 하신 것처럼, 얼굴을 앞에서 보려고 하지 말고, 신처럼 되려고 하지 말고, 신의 뒷모습을 보고서도 영광을 보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인간으로서 최고의 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해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가를 묻자는 것입니다. 충실하게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앞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뒷면을 통해서, 등을 통해서 우리한테 새로운 희망과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 저지른 잘못들은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고 겸손하게 복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듯이, 하나님에게 무한대 권력을 받은 듯이 교만하고 오만해서 빚어진 결과들입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요한복음서에는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라는 곳의 한 혼인잔치에 어머니와 함께 가셨습니다. 가나라는 말은 ‘갈대밭’이라는 뜻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있는 가나에는 갈대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식에는 항상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유대나라에서는 포도주 없이는 축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아마 결혼 잔치가 거의 마감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어떻게 해보라고 예수께 청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어머니. 나하고 포도주 떨어진 것하고 무슨 상관입니까?“고 묻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청을 못 어겨서,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고는 손님들에게 떠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시는 사람들 말이 나중일수록 더 좋은 포도주가 나오니 웬 일이냐고 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은 하나의 표징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의 사건은 예수가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등을 보여주셨는데, 요한복음서에 보면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보고 싶은 사람은 예수를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의 행한 일을 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새로운 표징입니다. 결혼 축제에 모인 사람들은 이전까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고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포도주가 나왔습니다. 복음의 포도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유대 백성에게 주셨던 모세의 포도주가 아닌, 예수를 통한 새로운 포도주를 주십니다.

이전에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바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동물의 피를 안받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피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죽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아들로 하여금 대신 피를 흘리게 해서 그 피만 받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포도주 사건은 이것을 미리 예시해주는 표징이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의 보혈을 마시면서 새로운 희망과 복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피를 마시는 순간, 그 포도주를 마시는 순간부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표징, 증거, 기적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사람이란 여러 사건에 부닥치면서 사는데, 사건이란 대개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서 생기는 것이고, 그런 사건을 겪을 때는 우리 마음이 뒤집어 지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하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건을 만들어 내는 시간은 짧은 시간일 수도 있고 긴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직 내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릴 시간이 아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어머니의 말씀은 그때를 앞당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때, 순간을 뜻하는 성서 헬라어 중에, 아토모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순간을 뜻합니다. 이 아토모스라는 단어의 어미 ‘os’을 떼어내면 아톰이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원자라는 뜻입니다. 왜 헬라 말에서 결단의 시간, 사건이 생긴 순간을 아토모스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아톰이라고 부르는 원자는 물질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가장 짧은 시간, 가장 작은 공간, 우리 인간의 한순간, 이것이 아토모스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원자는 가장 작은 단위이면서도 가장 큰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자 폭탄은, 핵무기는 어느 폭발물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사건이 가장 큰 사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가 만드신 포도주 한 잔에는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주신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작은 것 하나를 마셨지만 사실 십자가를 통한 엄청난 변화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작은 기적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를 완전히 변화시킨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지만 큰 위력을 가진 아토모스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새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의 시간을 헬라 말로는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카이로스는 결단의 시간, 의미로 가득 찬 시간입니다. 인생살이에서 맞닥뜨린 사건을 통해서 결단하고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는 순간에 아토모스가 카이로스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통해서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큰 사건이어야만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사건서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그 뜻을 깨닫고 결단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죄 짐 때문에 곤하고 힘들 때, 하나님께 아토모스를 달라고 간구해 보십시다. 진실한 친구가 없어서 외로우면, 친구를 찾을 수 있는 사건을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새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런 계기를 경험케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얼굴은 보이시지는 않지만, 당신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도록 등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필요한 사건을 주실 것이고 그것을 통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2005년을 맞아서 이제 이런 사건들이 여러분에게 하나씩 하나씩 추가되고, 그 사건들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귀한 뜻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까 처음에 한 이야기를 다시 드립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까?”를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우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서 남아시아 사람들에게 하나님 우리에게 준 복을 나누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현학적인, 형이상학적인 질문, “신은 계시는가?” 하는 질문이나 던지면서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비성서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얼굴은 볼 수 없다. 나보고 존재하느냐고 묻지 마라. 다만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 그것을 보고 내가 어떤 신인지를 깨달아라. 나는 불쌍히 여기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그걸 보고 내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깨달아라. 나를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사건을 통해서 나의 뜻을 깨달아 알라.”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니 하면서 하나님이 계신지만 질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그분이 어떻게 계시는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는다면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가운데 어떻게 계신지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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