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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싸움 (딤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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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전쟁을 할 때 함께 싸워 줄 자기편을 많이 확보해 두는 일은 결국 그 전쟁의 승패에 직결됩니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저 유명한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이겼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상 그는 그 전투에서 거의 패전지장이 되기 일보직전이었다가 프로이센군 원병이 적시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을 협공하게 됨으로써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테러 국가들과 대치하고 있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어찌하든지 이 ‘악의 축’들과의 싸움에 자기편이 되어 줄 우방국들을 가능하면 하나라도 더 얻고자 애쓰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자신의 전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위해 다 바치고 이제 순교를 목전에 두고 있던 사도 바울 역시 그런 동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후배 목사 디모데가 지금까지 자기가 싸워온 ‘선한 싸움’을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그리고 또한 자기의 뒤를 이어 계속 싸워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 디모데후서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총회 직영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고 전파하는 복음 사역’을 위하여 세워진 학교입니다. 그리고 본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과 같이 우리가 그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일은 바로 이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는 싸움에 동지가 되는 일이며 우방으로서 협조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영적 전투입니까? 오늘 우리는 고려신학교 주일을 맞이하여, 옛날 사도 바울이 싸워 승리했고 디모데가 뒤따라 참전했던 싸움, 오늘날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우리 역시 함께 계속 싸우고 끝내 이겨야만 할 ‘선한 싸움’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성경의 신앙진리’를 지키며 이단을 대적하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본문 디모데후서 4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후배 목사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은 한 명령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왕국된 교회’를 두고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는’, 실로 엄중한 명령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짜로 두려워하는 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재림하셔서 사람들을 천당과 지옥으로 갈라놓으실 것을 정말로 기다리고 있는 신학교수, 그리고 지상교회야말로 그 주님의 영광스러운 왕국임을 실제로 믿고 있는 신학생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라는 것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최고 사명인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고 절대적인 사명인가 하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정도의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 전파에는 ‘적절한’ 시기나 기회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뜻입니다. 적당해 보이는 때나 좋은 결과가 예상되는 경우에는 물론이지만, 혹 부적당하게 보이는 때나 오히려 역효과가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역시 힘써야 함에는 전혀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시기나 조건이라는 것이 아무리 불리하고 어렵다 할지라도 전도자는 그저 「오래 참음」으로써, 즉 인내하면서 무조건 복음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뿐입니다. 경우와 상황에 따라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훈계로, 때로는 격려와 권면으로, 하여튼 말씀은 언제 어디서든지 계속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쳐지고 전파되어져야만 할 뿐인 것입니다. 이 말씀 전파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단으로부터 진리를 지켜내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 전파를 명령하면서, 그 사명에 최대의 장애가 될 일이 무엇인지를 또한 미리 경고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에서 떠난 허탄한 이야기’, 즉 이단의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허탄한 이야기들은 마치 사람의 가려운 귀를 긁어 주듯이 사람의 구미에 딱 맞는 소리들이 될 것이며, 그런 비진리를 가르치는 가짜 ‘스승’들도 많이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진리에서 돌이켜」 떠나서, 거짓 교훈을 즐겨 듣고 좇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진리란 것은 항상 대중 앞에서는 비인기 종목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바른 교훈’과 ‘진리’만을 전파하고자 하는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다수의 냉대와 비난을 받더라도 일단 이단만큼은 철저하게 구별해 놓고 시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와 전도자의 제일 사명인 ‘말씀 전파’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이단으로부터 진리를 구별해 내고 수호하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진리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단 역시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씨를 뿌려 놓으신 세상 밭에, 사단이 밤에 이단의 가라지를 또 몰래 뿌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을 이단이라 하지 않고, 진리와 비진리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가 오늘날 기독교 내에 조성되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하면 성경 말씀을 제멋대로 어떻게 해석하든지 아무 상관없이 꼭 같은 신앙이라고 서로 인정해 줍니다. 그저 예수를 사랑한다고만 하면 천당과 지옥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아무 다를 것 없는 같은 기독교인으로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악을 악이라고 말하지 않고 적을 적으로 규명하지 않으려 하는 이런 괴상한 회색분자들이 오늘날 기독교 내에, 목사들 중에, 신학교들 중에 정말 많이 퍼져 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그 출발부터 진리와 비진리를 정확하게 구분했던 신학교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가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1938년에 폐교 조치를 당했었습니다. 그 후에 소위 조선신학교라는 것이 세워졌는데, 이 신학교는 조선총독부의 비호를 받을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동이 된 신학교였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 남한의 장로교회들이 모여 ‘남부 총회’를 결성했을 때, 당시의 총대들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한상동, 주남선 목사님 같은 분들은 일제 때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해방 후 한국 장로교 재건을 구상하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그 한상동 목사님께서는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출옥 이후 이북에서 교회를 섬기다가 남한에 와서 보니 신학교가 있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일제 때 일본식 기독교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학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의 주인이 되어 신학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교회를 저들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결론뿐이었습니다.’(한상동,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 남한의 장로교 전체가 하마터면 도매금으로 자유주의 이단에 넘어가려 하던 차에, 진리와 비진리를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았던 소수의 목사님들이 바로 이 고려신학교를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그때의 그 조선신학교는 바로 요새 매년 석가탄신일만 되면 신학교 정문에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합니다.’라고 커다랗게 플래카드를 달아 놓고 있는 한국신학교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이미 ‘선한 싸움’은커녕, 백기를 흔들면서 원수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신학교인 것입니다. ‘화목’이라는 미명으로 비진리와 타협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천주교 역시 오래 전부터 자행했던 일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중이 무슨 환경보호를 위한 투쟁 단식에 들어가니까 우리나라의 추기경이 직접 찾아가서 병문안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진리 사수라는 개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백주에 ‘적과의 동침’을 공공연하게 행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고려신학교는 이런 비겁하고도 줏대 없는 다수의 조류에 편승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오직 성경을 절대 주권자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가르치고 전파하면서, 이단과 자유주의를 대항하여 진리를 지키는 싸움을 그 설립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많은 신학교가 있지만, 복음 진리, 성경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진리를 생명처럼 여길 줄 아는 신학교,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선한 싸움 싸우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학교는 더욱 아쉬워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오직 성경’에 근거한 진리, 천주교 이단과 대항해서 싸웠던 종교 개혁자들이 지켰던 진리, 바로 이 진리를 지키는 전투에 같은 편이 되어 줄 교회와 성도가 정말 너무나도 절실한 오늘날입니다. 우리 모두가 고려신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며 후원함으로써, 바로 이와 같은 진리 수호의 ‘선한 싸움’의 대열에 합류하여 함께 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순교자적 신앙생활’을 지킴으로써 영광의 상급을 얻게 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5절 이하 8절까지의 말씀에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자가 겪게 될 어려움을 디모데에게 예고해 주면서도, 「그러나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여기 「근신」이란 말은 ‘정신을 차려서’라는 뜻입니다. 어떤 반대와 고난을 당하더라도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고생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말씀 전파라는 전도자의 직무를 완수해야만 한다고 독려하는 말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또한 불가능한 일도 아닌 줄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관제」란 ‘포도주 따위를 부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란, 사도 바울 자신이 바로 그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살다가 이제는 자기 목숨까지 이미 내어놓은 자리에까지 와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떠날 기약」 즉 순교의 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세상을 떠날 날이 이미 지척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저 남에게 설교만 한 전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생 전체를 복음의 최전선 전투에 완전히 내던지고 싸웠던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말로만 믿음을 지킨 전도자가 아니라, ‘일, 직무, 달려갈 길’에 자기 몸부터 투입시켜 ‘선한 싸움을 싸웠던’, 실전을 통하여 자기의 믿음을 지킨 야전 사령관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순교적인 충성이 사도 바울에게 가능했겠습니까? 또 어떻게 사도 바울이 그처럼 사랑하고 아끼던 후배 디모데에게 바로 자기처럼 꼭 같이 ‘고난을 받으며’ 죽기까지라도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정말 인간적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비장한 엄명을 내릴 수 있었겠습니까?그것은 바로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자기에게 상급 베풀어 주실 장면을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에게 확실하게 예약되어 있는 천당, 오직 이것만을 결승점으로 삼고 바울은 자기의 전 인생을 한눈팔지 않고 달려왔었습니다. 자기 머리 위에 씌워지도록 정확한 사이즈로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영광의 면류관, 이것을 받게 될 기쁨에 겨워서 그는 아무리 힘든 싸움이라도 거침없이 싸우고 이기면서 달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사도 바울은 그 영광스러운 상급이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꼭 같이 주어지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디모데를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이었습니다. 천당 믿는 신자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두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영벌 영생 심판을 믿지 않는 목사들은 절대로 그런 순교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 가지고 금세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니, 왜 그 아까운 자기 목숨을 예수님 때문에 내어 놓겠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자유주의 목사들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해서도 아무런 갈등이 없었고 순교할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목사들이 오늘날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아무런 비판을 한 마디도 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동족 화합 따위의 미명을 내세우면서 뻔질나게 북한에 드나들고 김일성 동상 앞에서 절하며 광복절이 되면 김정일 만세 따위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어느 천주교 신부가 개신교계의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운동에 대하여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미숙한 것이고 무지해서 나온 행위’라고 공식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국보법을 옹호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문자적 맹종’과도 같은 것이며, ‘인간을 법체계에 예속시키는 현대판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논리의 허술함은 일단 제쳐 놓고라도, 그 말은 자기네 추기경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우리나라의 추기경은 국보법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입장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그 신부 말대로 자기네 추기경이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미숙하고 무지해서’ 나온 말이었는지 참 궁금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산주의에 대하여 전혀 경각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 나라의 교계를 보면서, 저는 만약 북한이 또다시 남침해 오는 일이 혹시라도 생긴다면, 남한의 기독교계가 과연 어떻게 그들을 대할지 의심스럽습니다. 옛날에 일제와 손잡은 목사와 교단이 있었으니, 아마 공산주의와 손잡고 아니 그들에게 굽실거리며 어용 목사가 되어 어용 기독교를 만들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니 남북한이 평화 통일된다 해도, 정치적 자유를 내세워 공산당에 가입하고 공산주의 운동에 앞장 설 목사들도 수두룩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미 ‘회색분자’의 단계를 넘어서서 ‘적색분자’가 되어 있는 목사와 신부가 수두룩한 이 나라가 앞으로 이 악한 공산주의를 과연 어떻게 대항하겠습니까? 정말이지 이 민족이 혹시라도 또 한 번 공산주의와 정면 육탄 대결을 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과연 어떤 목사가, 어떤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이미 부어진 관제’처럼 여기고 순교의 각오로 맞서겠습니까? 현대 최악의 무신론자이며 명백한 적그리스도 세력을 대항하여 과연 어느 신학교가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그 믿음을 지켜 내겠습니까? 오직 천당 믿는 목사만이 그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사모하는 신학교수와 신학생들만이 조금도 겁내지 않고 그 싸움의 대열에 나란히 설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생 구원 영벌 심판을 믿는 교회만이 죽을 때 다같이 죽더라도 그 전열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끝까지 함께 싸울 수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순교자적 신앙생활을 평소에 연마해 두었다가 때가 될 때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이끌고 ‘선한 싸움’을 지휘할 야전 사령관들을 양육하는 이 고려신학교 운동의 대열에 지금부터 함께 나란히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16절에 사도 바울은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라고, 정말 가슴이 찢기는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제일 처음 체포되었을 당시에는 그와 함께 서서 그를 변호해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울이 순교당할 즈음에 와서는 그 중에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그의 곁을 떠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이미 자기의 선한 싸움을 다 싸웠고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는 외로웠습니다. 정말 복음의 동지로서 끝까지 자기 곁에 함께 서 줄 사람 한 명이 참으로 더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디모데에게 이 복음 전선에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동지가 되어 달라고, 또 자기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계속해서 이 선한 싸움을 싸워 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고려신학교의 교육 이념이 바로 그런 복음의 정통을 지키고 선한 싸움의 의리를 발휘하는 전도자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습니다. “1.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본분에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그대로 가르치며, 2. 또한 장로교 원본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도 개요서의 교리대로 교리와 신학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며, 3. 신전인격자로서 신학 및 생활을 순결케 할 교역자 양성을 설립 이념으로 한다.”개혁주의 신앙의 최고 부동산에 해당되는 진리를 사수하고, 개혁주의 신앙의 최고 동산에 해당되는 순교자적 생활을 지키는 일, 그리하여 신행일치에 굳게 선 개혁주의 신앙의 교회를 조국에 세우고 땅끝까지 확장해 나가는 일 - 정말 참된 전도자들과 성도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이 시대의 감격적인 사명이 아닙니까?일천 년 동안 계속되었던 영적 암흑기를 깨뜨렸던 개혁주의 신앙으로 시작되었던 신교가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천주교가 주도하는 종교혼합주의에 미혹당하여 걷잡을 수 없이 퇴색되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백 년 전에 그 종교 개혁자들의 직계 후손이라 할 만한 청교도들이 전해 준 깨끗한 신앙으로 시작되었던 이 나라가 그 가장 귀중한 유산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일제의 신사 참배에 항거하고 공산주의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아니했던 그 순교자 선배들 앞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오늘날 조국의 기독교계에 자유주의는 물론이요 공산주의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정말 참된 동지 한 사람이 극히 아쉬운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단과 싸우는 성경 중심의 진리 운동, 천당 소망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하는 생활 운동을 위하여 함께 싸울 우방 신자, 우방 교회가 정말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이 고려신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며 후원함으로써, 바로 이 개혁주의 신앙의 깨끗한 색깔을 지키고 그 알찬 내용을 채우는 ‘선한 싸움’의 대열에, 끝까지 나란히 서서 함께 싸우고 끝내 함께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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