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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재물 (마 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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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그 동안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주기도문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이 주기도문과 함께 마 6장에는 이른바 “경건(영성) 훈련”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훈련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경건의 훈련을 위한 것으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제시하면서 이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구제할 때에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 많은 곳에서 행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구제할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많은 곳에서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금식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금식하는 표시를 내려고 슬픈 기색을 내지 말고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경건 혹은 영성 훈련의 목적과 그 내용에 대해서 사람에게 보이려하지 말고, 오히려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보이도록 은밀하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이러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세 가지 영성훈련은 곧 “관계의 훈련”이기도 합니다. 구제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훈련이라 할 수 있고,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훈련이며, 금식은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훈련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제를 통해서 바른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으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져나갈 수 있으며, 금식을 통해서 나 자신을 바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영성 훈련을 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영성 훈련 뿐 아니라, 모든 훈련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훈련의 효과가 실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훈련을 해도 실제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훈련받은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의 효과를 알 수 있는 장소는 바로 현실인 것입니다.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이 훈련의 효과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훈련을 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훈련의 효과와 현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6:19-24는 세 가지 훈련에 대한 가르침 다음에 나옴으로 인해서 이러한 경건 훈련이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이 훈련의 결과를 실제 삶에서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6:25-34는 이러한 훈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결론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두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적 훈련, 즉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 나타나야 할 효과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현실적 인식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당연히 하나님을 섬겨야지” 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그러한 개념적인 인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재물’이란 말은 아람어로 ‘마몬(Mammon)’이란 말의 번역입니다. 그리고 이 “재물을 섬긴다”는 표현으로 예수님은 이 ‘마몬’을 인격화시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우리들의 현실 삶에서 이 ‘마몬’은 실제로 경배되어지고 있음을 말씀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하여도 예수님의 눈에는 이 마몬이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고 있는 현실이 보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경건 훈련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 “내가 과연 하나님만 섬기고 있는가?”하는 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좀 더 실질적으로 제시하는 말씀이 21절의 말씀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이란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이 보물이란 ‘내가 가치관의 기준으로 삼는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즉, 성공과 실패의 기준, 행복과 불행의 기준, 심지어 경우에 따라선 복을 받았느냐, 아니면 못 받았느냐 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가름하기도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보물이란 상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보물과 마음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물과 연결된 마음을 우리는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욕망이란 “욕심과 희망”이 합쳐진 말이라 하겠습니다. 욕심이라고 하는 다분히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와 ‘어떤 무엇을 바란다’는 소원의 마음이 어우러지는 모습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욕심으로 쏠리면 도덕적으로 잘못되기 쉽고, 바라는 것으로만 쏠리게 되면 구체적이거나 현실적인 모습이 상실된 정신적인 가치로만 나타나게 되어, 이 둘 다 바람직한 모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망에는 어느 한 편으로 쏠리지 않을 수 있는 긴장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욕망에 대해 몇 가지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고대 교부(Church Father) 중에 “황금의 입술”이란 별명을 가진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욕망은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욕망의 일시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유에 대한 충족은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욕망의 계속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욕망은 더 큰 욕망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은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욕망을 그냥 두지 말고 거룩하게 성화(Sanctification)시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욕망을 성화시킨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먼저 우리 크리스천은 욕망을 두려워하거나 거절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 욕망 자체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즉 욕망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을 스스로 알게 해 주는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선적으로 이러한 마음과 자세를 가지게 될 때에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욕망의 제한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욕망이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욕망이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도 다 쓰지 못하고, 지식도 다 사용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욕망의 도덕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욕망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욕망에 대해 감사할 줄 알고, 제한성을 인식하고 도덕성을 지니는 것이 바로 욕망을 성화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욕망을 물질과 같이 여겨도 되리라 봅니다. 즉, 우리들의 물질관도 이렇게 성화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욕망 혹은 물질에 대한 성화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이 해 보도록 하십시다.

우선은 물질에 대한 우리 기독교의 관점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에서는 물질 자체에 대해서 죄악시 하거나 멸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옛말에 “사람은 고생해보아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흔히 사람을 평가할 때 “가난할 때, 어려울 때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평가 방법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칭찬해 주고 그 사람에게 돈을 주어 보라”고 합니다. 그 돈을 어디다 쓰는가? 그리고 그 사람이 칭찬 받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평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21절 말씀을 이렇게 확대해서 풀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신앙도 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인격도 있다.”

이런 점에서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기독교는 가장 물질적 종교”라고 말합니다. 또 종교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 역시, 자본주의의 정신은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막스 베버나 윌리엄 템플의 말은 기독교의 정신은 “물질과 정신을 따로 나누어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모습 자체가 물질적인 모습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들을 육신이라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로 우리 인간들에게 보내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요 1:14).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이렇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나누지 말고 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정신적으로만 하시지 않으시고, 외아들이라는 육신을 통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으로 19절과 20절을 보도록 하십시다.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좀은 옷에 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시간이 가면 자연히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동록은 가죽이나 구리에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시간과 함께 변질된다는 뜻입니다.
도적의 도적질이란 상황에 따라 없어지거나 이동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 말씀은 땅에 쌓아두는 보물은 언젠가는 나의 곁을 떠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이 말씀은 “내 손에서 떠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일종의 절대적인 장소를 말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란 장소가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품안에”라는 장소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은 “네게 맡겨진 물질을 너의 품을 떠나도록 사용하라”는 물질에 대한 주인이 아닌 관리인의 자세를 지니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나에게 맡겨진 것이지, 내가 소유하여 움켜쥘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소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르게 가져야 하겠다고 봅니다.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이 진정 나의 소유인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소유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진정한 소유란 내가 사용할 때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내가 쓸 때” 그것만이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사용할 때에만이 나의 소유성이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쓴 것만이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유란 사용하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내가 쓴다는 말에는 자유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즉, 소유에는 자유가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가 깃든 소유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쓴다”는 것은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준 것은 진정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빼앗기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빼앗긴 것과 주는 것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내가 줄 때만이 나의 물질에 대한 자유가 확인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은 곧 “내 것을 다 쓰되, 온전히 쓰며, 선하게 쓰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빼앗기는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쓰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쓰는 것이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요, 그럴 때, 거기에 내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일에 쓸 때 나의 의가 거기 있는 것이고, 선한 일에 쓸 때 나의 선함이 거기에 있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물질에 대한 이해와 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눈이 성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이 성하지 않으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그리고 그 결과는 얼마나 비참한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우리 사람들의 경우, 물질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한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물질이 가져다주는 현혹 때문에 물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엄청난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얼마만큼 비극적인 상황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물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데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스스로 여기지만은, 실제로는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물질에 대한 이해를 성화시킬 수 있는 신앙의 성숙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매주일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경도 공부하고, 기도생활도 하는 모습의 효과는 우리들의 현실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도 우리들의 현실에서의 물질에 대한 자세와 태도에서 그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을 섬겨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들의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뵙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배운 것처럼, 우리 앞에 놓여진 재물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물질에 움츠리거나, 자유함이 없이 물질을 사용하거나, 물질을 가지고 남을 이용하거나 억압하는 모습들이 바로 물질을 섬기는 모습임을 알게 하시고, 저희가 물질을 얻는데 선한 수고를 하며, 이 물질들을 선한 청지기로서 온전히 그리고 선하게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주의 성령께서 늘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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