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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막 9: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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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 1
오늘 주신 본문, 마가복음 9장 38절을 보니, 요한이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께 나아와, 무언가를 보고합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그런데, 이 보고 중에 <우리>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군요.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를>,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다는 보고인데요. 무슨 뜻인가? 이 일에 대하여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다 같은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건 배후엔 또 다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 전에 귀신 쫓아내는 일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14절 이하를 보면,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그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지 못했고, 그 일로 예수님께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제자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 내어 쫓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지요. 우선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명색이 제자들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저들은 스스로 나서서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그 사람에게 달려가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 명령을 내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지금 주님께 보고 드리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먼저 제자들의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들은 제자들만이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만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문제는 이런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로 이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 내어 쫓은 사람을 만났을 때, 반갑게 저를 영접하거나 칭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일을 하지 말라고 금했던 것입니다. 금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귀신을 내쫓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4절을 보시면, 노중에서 저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다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의 최대 관심사는 <누가 더 크냐?>는 것이었습니다. 더 큰 자리가 저들의 관심사였던 것이지요.

더 심각한 문제는, 저들이 자리다툼하던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를 들은 직후였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9장 31절을 보면, 우리 주님, 이제 곧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32절을 보면,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주제에 저들 제자들은 자기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는 겁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은 애초에 귀신 내쫓는 일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차지할 자리가 더 중요했던 겁니다.

# 2
그런데 오늘 본문, 마가복음 9장 38절을 읽어보면, 요한과 제자들은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하여 칭찬 받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아주 당당하게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보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저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39절인데요, 첫 문장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제자들이 <금하였나이다!>라고 보고 드리니 그 즉시 <금하지 말라!>고 답변하신 건데요, 무슨 뜻입니까? <그가 누구이든 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금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 이름으로 하는 한, 괜찮다는 겁니다. 오히려 저가 하는 일을 금하는 너희 제자들의 독선이 틀렸다는 겁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옳고 귀한 일 하는 사람을 금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해서 우리 주님,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아멘!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제자들만의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거룩하다 자부하는 자들만의 구세주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선택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만의 그리스도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특정한 민족, 특정한 계층, 특정한 지역,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자기들만이 주님을 독점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오, 그 누구라서 예수님을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예수님을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저 높고 넓은 하늘을 나 홀로 독점할 수 없듯이 우리 예수님도 나 홀로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저 넓고 깊은 바다를 나 홀로 독점할 수 없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 홀로 독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는 모두 <우리>라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맡겨진 일을 행하는 한, 그는 우리와 한 형제자매라 하십니다. 해서 주신 말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으로 옳은 일 하는 저들의 일을 금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너에게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을 금할 자격을 준 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 3
사랑하는 여러분, 살다가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내 대신 해 내는 사람이 나타나거든, 그를 금하는 대신,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방법이십니다. 내가 하지 못한 일을 저가 해 냈으니 오히려 고마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요, 문제를 일으키는 분들, 대개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일을 방해하곤 합니다.

<자네가 왜 이 일을 하는 거야? 이건 목사가 하는 일이지! 어떻게 자네가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이건 장로가 하는 일이야! 자넨 권사도 아니고, 집사도 아니고, 제직도 아닌데, 안 돼, 그러는 거 아니야, 하지 마, stop! 자네는 그런 일을 하면 안돼!> 그리곤 주님께 달려와 금하였나이다, 자랑스레 보고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 내쫓은 어떤 사람에게 쫓아가서 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분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저들은 자기가 한 일은 다 옳고, 다른 사람이 한 일은 틀렸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합니다. 또한 자기가 없으면 일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에 자기가 나서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꾸 다른 사람의 일을 금합니다. 자꾸 못하게 합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그러다 보니 그 분과 함께 하면 되는 일 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믿어도 별반 내 놓을 만한 믿음의 결실이 없습니다. 못하게만 하고, 금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으니, 일 보다는 자리에 더 민감하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일 보다 자리의 크고 작음을 먼저 따집니다. 자리의 높고 낮음을 더 따집니다. 그래서 두 번째 수난 예고를 들은 직후인데도 저들은 주님을 뒤를 따라 걸어가면서까지 자기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런 분들, 선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만 주고, 그런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사탄의 일을 하게 되는 거죠.

해서 우린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직분의 무게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무언가 <장>자로 끝나는 직분을 맡으신 분들,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 자칫하면 나로 인해 주님께로 다가오던 영혼 하나가 실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 4
그랬습니다. 여기까지만 말씀하시고 수업을 끝내주시면 그런대로 회개하고 돌아설 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다음 순간, 아주 살벌한 말씀을 주십니다. 살벌하다는 극단적 단어가 오히려 약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정말 살벌한 말씀인데요, 여기서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 9:42 / (읽기) / 거기 <실족>이란 단어에 표시하시고요, 내용인즉 남을 실족케 하느니 그 전에 내 먼저 죽는 쪽이 낫다는 겁니다. 믿는 소자 중 하나만을 실족케 해도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들어가는 쪽이 더 낫다는 겁니다. 주여!

여기 연자 맷돌은 사람이 아니라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걸 목에 걸고 바다에 들어간 사람, 영락없이 꼭 죽게 된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이것은 당시 아비를 죽인 패륜아나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문란케 한 악질 흉악범을 사형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한 일이 최소한 아비를 죽인 패륜적 범죄만큼 심각한 범죄라는 뜻이군요. 얼마 전 연쇄 살인 사건으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머씨와 버금가는 흉악범이라는 거지요.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함이 그러할진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돌아와 말씀을 받는 제자들의 지금 마음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주님은 계속해서 살벌한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43절, 45절, 47절의 첫 문장에 경고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43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는 겁니다. 45절,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는 겁니다. 47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는 겁니다. 왜? 사지 멀쩡해서 지옥에 가느니, 손 하나, 발 하나, 눈 하나 없더라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43, 45, 47절의 경고문 속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한 단어가 있으니, <범죄>군요. 그런데 이 단어에 세 번 모두 각주 번호 1번이 붙어있군요, 1번 각주의 설명을 찾아보실까요? <실족>이하 하는군요. 손이나 발이나 눈을 빼버려야 할 정도의 심각한 범죄, 그 범죄의 내용이 무엇인가? 곧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손이 실족케 하거든 손을, 발이 실족케 하거든 발을, 눈이 실족케 하거든 눈을 찍어버리고, 그리고 천국으로 가라는 겁니다. 상상할수록 끔찍하고 살벌한 말씀인데요, 왜 그러셨을까? 그만큼 실족케 하는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중대 범죄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실족케 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이기에 이토록 충격적인 요법으로 경고하시는 걸까? 9장 48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 9:48 / (읽기) / 실족케 하는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 하는 점을 미루어 짐작케 해 주는 말씀인데요, 대상이 소자이건 나 자신이건 어쨌든 실족케 하는 자, 어김없이 지옥으로 던져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각한 범죄이지요. 변론의 여지도 없고요, 보석이나 가석방도 불가능합니다. 일단 유죄 선고를 받고 지옥이란 감옥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날 이후 그는 영원히 거기서 살아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손이나 발이나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차라리 그 하나를 버리라 하셨던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옥이란 감옥이 보통 감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옥이란 어떤 곳인가? 거기 48절에 보니, 지옥에는 죽지 않는 구더기와 꺼지지 불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여러분, 먼저 기억하실 것 지옥은 꼭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있어도 구더기와 불이 죽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는 그런 지옥이 꼭 있습니다.

그런 지옥에 내가 던져진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때 터져 나오는 가장 절실한 기도는, 차라리 죽여 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죽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 해서 죽지도 않은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내 몸을 온전히 맡긴 채, 그 고통 속에 영원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해서 사지 멀쩡해서 지옥 가느니, 뭐 하나 없어도, 더러운 것 찍어 버리고, 천국을 가는 쪽이 낫다 하신 것입니다. 옆의 분과 인사하며 우리 다짐합시다.

<천국에서 다시 뵙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 5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한단 말씀인가? 꼭 손 하나, 발 하나, 눈 하나를 내 손으로 찍어버려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씀인가? 정말 그렇다면 우리 주님, 너무 혹독하신 분 아닌가? 이런 인간적 반문이 생기는 것 사실인데요, 그러나 조금만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오늘의 말씀은 겁주시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복주시기 위한 말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정말입니다. 이제 곧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감하신 주님, 제자들과 영영 헤어지기 전에, 어떻게 해서라도 복 받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믿었던 제자들이 수난 예고가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하지요, 거기에 누가 크냐며 서로 자리다툼만 하고 있지요, 해서 다급해진 주님, 안 되겠다 싶어, 좀 충격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해서 주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인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 바로 9장 41절 말씀입니다. / 마가 9:41 / (읽기)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번 함께 읽으며 마음에 새깁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경고의 말씀이 살벌한 만큼 축복의 말씀 역시 강력한데요,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는 이 말씀 속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상을 빼앗기지 말라는 당부가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결단코 이 상을 잃거나 빼앗기지 말라, 꼭 이 상을 차지하도록 하라는 건데요, 여기서 우리가 결단코 받아야만 하는 상의 내용은 무엇인지 먼저 확인하고 갑니다.

43절에 중간에 <영생>이라 단어에 동그라미, 45절 중간에 또 <영생>이란 단어에 동그라미, 그리고 47절 중간에 보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표시하시고요. 무슨 뜻인가? 우리 성도들이 결단코 받아 누려야 할 상의 내용은 다름 아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단코 이 상 다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옆의 분과 인사하며 다짐할까요?

<주 안에서 영생복락 누리시기 바랍니다.>

# 6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하면 이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주님은 제자들의 놀란 가슴을 어루만져 주시며, 놀랍게도 가장 쉬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41절 중간에, <물 한 그릇!>이란 단어에 동그라미 하시고, 별 표 다섯 개 하시고, 정말 은혜가 되는 말씀이요, 안심이 되는 말씀이요, 축복의 말씀이요, 그래서 복음인데요, 존경하는 여러분, 물 한 그릇만 대접하면 영생을 주신다는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있는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목이 갈한 영혼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여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 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예비해 두신 복을 받으라 하셨던 것입니다.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뿐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들을 향해서는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하십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물 한 그릇이 아까워 소자 하나를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해서 그 날, 오른 편 사람들은 영생에 들어가는데, 왼편 사람들은 영벌에 들어가게 된다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 한 그릇이면 우린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 한 그릇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꼭 손 하나, 발 하나, 눈 하나를 찍어버려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 한 그릇만 가지면 손도 발도 눈도 다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어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라는 거지요. 어서 주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를 영접하라는 거지요.

저는 우리 동광 교회가 항상 물 한 그릇 들고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특히 물 한 그릇이 없어 목이 갈하여 신음하는 이 땅의 백성들을 찾아가, 주의 이름으로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의 빛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여 우리 모두 결단코 예비하신 상을 받아 누리며, 주와 함께  영생복락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 삼아 주님께 바치며, 오늘의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 고전 8:8-13 / (읽기) /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아멘!>

잠시 명상 기도하며 주신 말씀 마음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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