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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산으로 가는 성도들 (막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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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

변화된다는 것보다 신기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이 변하는 것들에 대해서 무한한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술 같은 것들을 좋아합니다. 마술사의 손에서 종이가 비둘기가 되고, 우산이 나오고, 지팡이가 나옵니다.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마술을 즐기는 것입니다. 변형되는 것들에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변화없이 그대로 있는 것에 지루함을 느낍니다.

요즈음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들을 살펴보면 변화되지 말아야 될 것은 변화되고, 변화되어야 할 것은 변화되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있습니까? 세상도, 역사도, 문화도, 학문도 다 변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좋게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쁘게 변하기도 합니다. 성도도 좋게 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쁘게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다니지만 예수 믿기 전보다 더 교활해 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서 신앙생활을 하려 하지 않고 세상의 잔꾀로서 신앙생활을 하려할 때 그는 참으로 더 못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찰스다윈은 모든 생물은 가만있지 아니하고 항상 변화하는데, 그 변화는 바로 자연환경에 의하여 새로운 종이 기원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변화하지 못하면 그 종(種)은 멸종되거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찰스다윈의 이론은 전적으로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분 옳은 이론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보면 변화할 때 변화하지 못하면 믿음이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환경에 대하여 도전을 받으면서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믿음이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에 물 흘러가듯, 아무런 의식 없이, 고민없이, 몸부림 없이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죽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도전을 받으면서 자기 변화의 역사가 부단히 이어져 가야합니다. 그 변화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는 변화하는 세계입니다. 기독교은 변화의 종교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종교입니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쓸모없는 사람이 변하여 쓸모있는 사람으로 변하고, 별 볼일 없던 사람이 변하여 별 볼일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어 겸손한 자가 되고, 어떤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는 깡패 김익두가 변하여, 이기풍이 변하여 목사가 되게하는 종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해야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변해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새 사람이란 변화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변한 사람들입니다.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변한 것입니다. 만일 시몬이 시몬으로 살았다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나 잡아먹다 죽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사울로만 살았으면 당시 지도자급으로 그냥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을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로마의 황제 앞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는 복음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성품까지도 변화시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 변화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제자로서 남달리 쓰임을 받은 세 사람의 체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수천 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70인이 있었고 또 그 중에서 열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 두 제자들조차도 모두가 제자다운 사역을 감당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세 제자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주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변화산에 오르고, 감람산에 오릅니다. 주님은 그때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가십니다.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면 이상한 감정이 생기는가 봅니다. 산을 바라보면 경외감이 들기도하고, 영감을 얻게 되기도 하고 시상이 절로 떠오르기도하고 . . . 웅장한 하나님의 창조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보잘 것 없슴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산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산에는 많은 사찰이 있습니다. 속리산, 계룡산, 지리산 . . .등에 많은 암자들이 있습니다. 기도원들도 많이 있습니다. 산은 아무래도 종교적인 영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가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산에서 하나님을 느끼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연이나 그 산 자체를 숭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시는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이 산에 올라갔을 때에 갑자기 이상한 현상들이 벌어졌습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났습니다. 세상에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빨 수 없을 정도로 희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살아서 하늘 나라로 승천했던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고, 죽었던 모세가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있었던 주전 1527년경에 태어난 사람이고, 엘리야도 역시 구약시대에 있었던 주전 870년경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미 옛날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그들과 대화하셨다는 것은 놀랄 수 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꿈울 꾸는데 죽었던 시어머니가 나타난다거나, 죽었던 친구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무섭습니까? 베드로는 무서우면서도 너무나 황홀하기도 했습니다. 황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체험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자고 제의 합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 . . 여기서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1. 우리는 날마다 변화산에 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변화산에 올라야 합니다. 날마다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폐지들도 제지 공장으로 들어가면 얼마 후 멋진 새 종이가 되어 나옵니다. 재활용 . . .쓸모 없는 쇠붙이들도 용광로 속에 들어가면 값비싼 철강재가 되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안에 들어가면 새 피조물들이 되어 나와야 합니다. 기독교의 힘은 변화시키는데 있습니다. 그 힘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변하여 새사람 되면 가정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는 겁니다. 우표를 최초로 만들었던 로우랜드 힐은 “회전목마는 조금도 전진하지 못하는 기독교 신자와 비슷하다. . .” 신앙은 한 발자국씩이라도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날마다 조금씩. . . . 단 1센티라도 믿음이 자라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조금씩. . . (찬양, he's changing me . . .)

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주님을 대적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영접하지도 않았고 따르지도 않고 오히려 대적하고 비난하다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추종하기는 했지만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들은 군중들입니다. 열심히 몰려다녔지만 그저 그대로입니다. 기적을 구경하고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도 따르고 변화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맡기고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활이 변하고, 주님의 교훈대로 살려고 애씁니다. 주님의 삶을 모방합니다. 그분의 인격을 닮아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무식하고 천방지축이었지만 날마다 점점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성질이 너무 급해 ‘천둥 번개’라고 불리던 야고보와 요한도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변화산에 와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는 바로 변화산입니다. 변화산에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은혜가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체험하셔야 신앙생활이 힘이 나는 것입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올 때마다 변화산에 올라간다는 믿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는 예배를 드릴 때에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요4:24)고 했습니다. 노래를 불러도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엡5:19)고 했습니다. 생각을 해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평안이요 생명이기 때문에(롬8:6) 영의 생각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2. 변화의 힘은 기도였습니다.

변화산은 주님을 만나는 산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 곳에서 변형되신 주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신령한 주님으로 변형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난 세미나에서 어떤 집사님을 만났는데 이분은 모태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기는 믿지만 뭔가 분명치 못한 것이 많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참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세계를 본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 아닌 너무나 다른 . . 그래서 얼마나 힘이 솟는지 . . . .
우리가 기도하러 산에 오를 때 혼자만이 올라가지 말고 주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산이야 말로 기도의 능력을 최대한 경험하게 되는 현장이 될 것입니다. 산을 오를 때는 힘이 듭니다. 기도의 산을 오를 때도 힘이 듭니다. 거기에 삶의 문제, 가정 문제, 자녀문제, 직장문제 등을 가지고 갈 때 주님고 함께 가지 않으면 쓰러질 수 있습니다. 주님과 변화산에 오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생애야 말로 기도로 일관된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도, 골방에서도, 빈들에서도, 산에서도, 금식하시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서도 기도하셨고, 밤을 세우면서도 기도하셨고, 십자가를 앞에 두고 심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지름길이요, 성령의 능력을 받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주님께서 기도하셨듯이 기도함으로 큰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고 모든 꼬인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열쇠인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 기도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신 기도하십시오. 염려는 불신이요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맡깁니다.
기도는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는 비결이고 기적을 이루는 비결이며 모든 염려를 해결하는 하는 비결입니다. 주님과 함께 기도의 동산에 오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변화의 힘은 주의 음성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7절)
세상에는 소리도 많고 말도 많습니다. 인간의 소리, 세상의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낙망과 실망의 도만 높아 간다.
그리고 기계소리, 사람소리 . . 전자음 소리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휴대폰 소리가 비슷해서 무슨 소리만 나면 호주머니를 만져 봅니다. 다 그런 소리에 민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까?
아침부터 TV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TV소리가 안나면 불안해 합니다. 보든 안보든 TV를 켭니다. 병입니다. TV를 끄고 성경을 읽으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성공의 길이 열립니다. 이사야 55:3에 보면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와 허물 많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굶주린 심령에는 양식이 되고, 고갈한 심령에는 생수가 되고, 실망한 자에게는 소망이 되고, 슬픈 자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이 음성이 불방망이 같이 임하여 죄악의 아성을 쳐부수기도 하고, 좌우의 날선 검과 같이 임하여 범죄한 심령을 찌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목자가 양을 이끄는 것처럼 인자한 음성으로 들려오기도 합니다.
소돔, 고모라 성에는 천사가 들어가 말했어도 구원을 못 받았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사람(요나)이 회개를 외쳤어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민감하게 들려져야 됩니다. 신령한 음성이 들려지는 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꿈에도 주의 음성이 들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때 성령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4. 성도는 주님처럼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 형상이 본래 에덴동산의 범죄 하기 이전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 용서와 사랑으로 . . . 이것이 구원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집니다. 우리의 겉사람이 벗겨지면 속사람이 나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내 속사람이 겉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복입니다. 이 복은 말씀과 함께 받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롬10:17)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납니다.
외형만 변하고 내면적인 변화가 선행되지 못하면 외식이요, 가식이요, 오히려 큰 문제라 할 것입니다. 마음에 변화가 없는 사람은 그 얼굴이 살기와 독기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은 용모가 변화되었는데 해같이 빛났습니다. 성도는 우리의 발은 죄악의 도성인 세상을 밟고 다니지만 우리 성도들은 항상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얼굴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는 의복에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어떤 빨래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나고 희었습니다. 이것은 순결이요, 승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계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우리 성도들이 입을 옷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 깨끗이 씻은 화려한 세마포입니다. 우리 성도는 바로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행실의 옷, 순종의 옷, 사랑과 봉사의 옷 . . . 이 예복을 입지 아니하면 혼인 자리에서 쫒겨나서 이를 갈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 물로는 그렇게 깨끗하게 빨래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빨아야만 깨끗하게 빨 수 있습니다. 기도와 회개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변화산에서 체험한 사람은 산 아래 세상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로운 집회를 하다보면 너무 은혜롭고 좋아서 이대로 계속 밤 새 찬양하고 그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세상의 온갖 죄악과 더러운 것에 물들 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유혹으로 인해 무너질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산에서 초막을 짓고 살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변화산위에서의 체험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으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인 세상에서 변화산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위에는 황홀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 산 아래는 처절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산 아래에는 산위에 오르지 못한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해서 쩔 쩔매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현장에는 승리가 있고 능력이 있었지만 기도가 없는 산 아래는 처절한 실패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이가 쓰러져 거품을 흘리는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변화산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변화산 아래에 남아있던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하였습니다.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은혜받는 목적은 어지에 있는 것입니까? 산 아래 가기 위함입니다. 산 아래에는 지금 거품을 흘리며 거꾸러지며 이를 갈고 파리하여 넘어져 가는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의 말대로 변화산이 좋아서 세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산 아래서 고생하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누가 고쳐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변화산에 올라야 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산의 체험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가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그들을 치유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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