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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원하느냐 (눅 18: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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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이봉 목사
 
□ 무엇을 원하느냐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
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
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
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
니라) (누가복음 18장 35절-43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 당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는데, 그 중에 소경된 자를 고치신 기록입니다.
단순한 하나의 기적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고 돌려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 소경이 고침 받기까지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여러분! 신앙은 왜 필요합니까?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이 근본적 질문에 대하여 그렇게 심각한 생각도 해보지 않고, 수년 동안 믿어왔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은 나의 것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즉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공생애가 거의 끝마칠 때쯤에 “세상 사람들이 날 보고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물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의 여론을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반복되어 물어질 질문입니다.
아무개, 아무개야, 너는 지금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무슨 대답이 있어
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신앙의 의미는 무엇이냐? 고 물을 때 대답할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사람들은 제각기 누구에게나 원하는 바가 다 있습니다.

각각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원함도 다 다르다고 봅니다.
돈이 필요한 상황에 있는 사람은 돈을 원할 것입니다.
건강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건강을 원할 것입니다.
무엇인가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연구가 성취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요즘, 고3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각각 처한 환경에서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더 절실한 요구가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필요하고 원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그 중 에서도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그런 문제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우치게 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거지 소경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 지르며 동정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꾸짖고, 그의 요구를 묵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소경은 더욱 소리 높여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적중하여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묻기를‘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하였
습니다.
‘보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럴 때 네 원대로‘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영적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2. 우리는 모두 인생길에서 영적 맹인들입니다.

요즘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육신의 것만 채워지면 인생문제가 다 해결되는 줄 알고 영적 눈이 감겨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로지 육체적 향락에 눈이 멀어 자신의 미래를 통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맹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욱이 여기 이 소경은 경쟁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걸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즉 거지 생활을 하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남에게 동정을 구하며 채워지지 않는 한푼 두푼 떨어지는 동전에 의지하여 그날 그날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습
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보아도 딱한 처지였습니다.
누가 소경이 되고 싶어서 되었겠습니까?
누가 거지가 되고 싶어서 거지가 되었습니까?
남이 갖고 있는 두 눈을 가지고도 볼 수 없으니 소경이 되었고, 소경이 되다보니 일할 수 없어 거지가 된 것 뿐
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도 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
몸에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경쟁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
모두가 바로 이런 경우에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살면서도 아마 예수에 대한 소문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예수란 사람은 기적을 행하고, 병자들도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가난한자들, 노숙자들, 장애자들에게 예수의 소문은 들려집니다.
현재도 노숙자들이나, 장애인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구제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도 예수에 대하여 다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저 한 끼의 식사로 배고픔을 채울 뿐입니다.
만일 이 소경도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영원히 눈을 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달랐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지나가느냐? 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은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태평양 바닷물이 아무리 많아도 뚜껑을 막아놓은 병에는 한 방울에 물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도 마
찬가지입니다.
닫아버린 마음에 예수, 예수, 아무리 해 보아야 예수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들을 돌면서 한푼 두푼 동냥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느냐 하면 대부분 그렇지 못합니다.
몇 푼의 동전으로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이 소경의 다른 점이 또 있었습니다.
큰 소리로 지나가는 주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한 것을 보아서 유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이었다면, 다윗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고,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관하여도 몰랐을 것입
니다.
그런데 이 소경이 예수님을 호칭할 때,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른 것을 보면 틀림없이 유대인이었다고 봅
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교훈이 또한 큽니다.
이 소경은 지금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믿는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인
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믿은 지도 오래 되어 성경을 공부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세주라는 것을 다 듣고 알고 있는 우리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리 지른다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을 만나게 된 이유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낙심하여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예수를 만나지 못합니다.
이 소경처럼 더욱 큰 소리로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외쳐야 합니다.

3.‘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었습니다.

이 소경은‘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주님이‘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하면,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정작 <보기를 원하는 것> 보다, 예수를 통하여 무엇인가 얻기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 소경이 그런 것에서 그쳤다면, 그는 영원히 주님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통해 가장 근본적인 것을 구해야할 것입니다.
한두 푼의 물질보다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구해야 하겠습니다.
소경에게 몇 푼의 동전도 필요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보게 해 달라는 요구는 인생일대의 운명을 좌우하는 요구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본다’는 것은 시각적으로만 이해 할 것이 아닙니다.
‘본다’는 것은 경험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생활환경 속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께 대한 소문만 듣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라는 근본적인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체험적이어야 합니다.
반 기독자 사울이 길에서 예수를 만난 것처럼, 우리도 인생길에서 만남의 체험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만남에서라야 예수에 대하여 증거 하면서 살게 됩니다.

눈뜬 소경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전도, 전도, 합니다 마는 왜 전도가 안됩니까?
소경이 눈을 뜨지 못한 상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43절에“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고 하
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는 어떤 존재라고 보십니까?
참으로 내 인생길에서 주님을 만났다고 보십니까?
아직도 주님을 통하여 몇 푼의 떨어지는 동전을 바라고 있습니까?
보다 근본적인 것을 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적 맹인의 상태에서‘내가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고 할 것입니다.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순간, 이 말씀 속에 임재 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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