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육신의 법을 좇아 사는 사람 (롬 7:1-25)

  • 잡초 잡초
  • 309
  • 0

첨부 1


- 설교 : 임정석 목사

오늘 설교하는 로마서 7장과 다음 주 설교하게 될 로마서 8장은 아주 중요한 장(章)으로서
7장이 육신의 법을 좇아 사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면
8장은 성령의 법을 좇아 사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기에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이 두 장은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닌 교인들은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잘 압니다.
율법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성경은 이처럼 율법이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몽학선생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아직 거리도 잘 모르고 길도 잘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등하교를 책임지는 선생님을 가리켜 몽학선생이라 할 수 있는데
율법의 기능이 마치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죄인된 인간 스스로는 그리스도에게로 잘 나아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때로 간다고 할찌라도 가다가도 종종 옆으로 빠져버리기 때문에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이를 때까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가는 몽학선생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목사님은 율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이란 죄인된 인간이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는 것이 율법이므로
  율법이란 자신의 죄만 발견하게 되는 기능인 거울이나 X-ray와 같다.

저는 이 말도 율법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7절 중간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율법을 알기 전에는 죄를 죄로 알지도 못하고 제 멋대로 살던 사람이었지만
율법을 받고 율법을 알게 된 이후에는 무엇이 죄인지도 알게 되고
어떻게 살면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어떻게 살면 하나님께서 노하시는지 알게 되기 때문에
죄인된 인간은 율법을 알게되면 알게 될 수록 죄만 알게 될 따름이며
도저히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깊은 죄의 굴레 속으로.. 때론 깊은 죄책감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만 가게 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설명한 것이 오늘의 본문 1절에서 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淫婦)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율법이 우리 죄인된 인간들에게 무엇과 같은가를 잘 설명한 것으로
인간의 생활 중에 가장 보편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결혼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가 가부장적 사회이고 남성위주적 사회인데
본문은 이러한 가부장적 사회와 남성위주적 사회 속에서의 결혼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그 여자는 완전히 그 남자에게 매이게 되고
그 남자에게 예속된다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어떤 여자가 일단 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그 남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며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간음이며 그 여자는 음부(淫婦)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것은 죄(罪)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그동안 매였던 남편에게서 풀리게 되고 자유하는 여자가 되어
다시 마음대로 결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죄인된 인간과 율법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남편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짓고 사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러한 죄를 짓고 살아가기에 다 죄에 매여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죄에 예속(隸屬)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남편이란 것은 율법도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몰랐을 때는 설교 서두에서도 말씀드린바 처럼
모르기 때문에 죄의식도 없는 죄인으로 살아가게 되지만
율법을 받게 되고.. 율법을 알게 되면 될 수록 점점 율법의 굴레에 예속되면 예속되었지
거기서 헤어나올 수는 도저히 없기 때문에 이 남편이라는 것이 율법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라... 그 다음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죄라는 것이 만일 죽기만 한다면!!..
또 만일 죄가 안죽으면 그 죄 앞에 있는 인간이라도 죽기만 한다면... 그 인간은!!
그 인간이 산 인간이든 죽은 인간이든 간에... 그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 죄라는 것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볼 때 어떤 존재가 되는가 하면
더 이상 그 죄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이러한 관점에서 만일 인간과 율법을 본다면...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인간을 끊임없이 얽어매고 굴레를 씌우고 점점 빠져만 들게 하는 그 율법이 죽든지!!..
아니면 그 율법 앞에 서 있는 인간이 죽든지!!
어느 한 쪽이라도 완전히 죽기만 한다면!!
그 율법 앞에 서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그 율법에게
더 이상 매여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존재로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으셨으므로!!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인 죄인도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가 되어!!
죄에게서 완전히 해방된 존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자유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대하여서도 완전히 죽으셨으며
본문에 기록된 표현대로 말하자면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제물로 드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셨으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된 존재가 되었고!!
완전히 자유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4-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어떤 존재냐?

4절 말씀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또 그 다음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를 죄에서 구원하여 해방시키고
율법에서 구원하여 해방시키시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구원하여 자유하는 존재가 되게 하였으며
율법에서 구원하여 자유하는 존재가 되게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중요한데... 이미 함께 읽었던 말씀 4절에 그 해답이 씌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죄에 대하여 자유하는 존재가 되게 하였고
율법에 대하여 자유하는 존재가 되게 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존재가 아닌 사망을 위한 열매맺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자유하는 존재가 되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4-6절 말씀을 한번 더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런데 여기 나오는 말씀 중에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열매와 관련된 행위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게 하는 비법과
사망을 위하여 열매 맺게 하는 비법이 소개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두 가지 열매와 그 두 열매 맺는 비법의 차이점을 자세히 알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 맺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4절에서 말씀한 대로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그런 존재가 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그런 존재가 틀림없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와 죄와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또 율법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나면 반드시 의문이 생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필요없는 것이며 쓸데없는 것이기에.. 혹시 율법이란 죄가 아닌가?

본문 7-8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명확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 말씀에 대하여서는 크게 왈가왈부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다음 둘째로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이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것은 혹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율법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일 수 있는가?
성경은 단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일 뿐이라고만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율법은... 그리스도인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 맞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은 아주 좋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잠시 그 비유를 인용하여 소개하겠습니다.
단,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둘 다 죄인된 인간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율법은 죄인된 인간들이 출발점에서부터 천국이라고 하는 목적지까지
  가야할 길과 그 과정을 그리고 각 지점을 명확하게 표시해 놓은 지도와 같은 것으로서
  그 지도대로 가기만 한다면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며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율법이란 지도를 보고 가야 하는 인간이
  눈뜬 장님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를 가졌고 또 지도를 보면서도 목적지에 바르게 가지 못했는데
  왜 그들이 율법이라고 하는 지도를 가졌고 보았으면서도 바르게 잘 가지 못했는가 하면
  그들이 그 지도를 볼 줄 모르는 장님이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 어느 민족도 가지지 못한 율법이라고 하는 지도를 가졌고
  그래서 그 율법이란 지도를 가졌다는 자부심과 교만 속에 살았지만
  문제는 그 지도를 제대로 볼 줄 몰랐기 때문에
  그 지도대로 걸어갈 수 없었으며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걸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장님이란 아무리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
먼저 눈이 떠져야 하고 그 떠진 눈으로 밝히 볼 수 있을 때에라야
그가 가지고 있는 지도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듯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먼저 선행되야 할 작업은
우리의 눈을 밝히는 작업인데... 그렇게 눈을 밝히고 눈을 뜨게 하는 작업을 무엇이 하느냐?
복음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어 눈이 떠지고 나면
그 눈뜬 자가 보고 가야 하는 것이 율법이라고 하는 지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율법이라는 지도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아주 필요한!! 쓸데있는 것으로서!!
문제는 아무에게나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눈을 뜬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며!!
그때 그 지도라고 하는 율법은!! 눈뜬 사람에게 있어서의 율법은 10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그에게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가 아무리 천국에 이르는 지도이며 생명에 이르는 지도인 율법을 가지고 있다 할 찌라도!
그것이 그를 생명에.. 천국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본이 죄인이기 때문에 10절 처럼 도리어 사망에.. 지옥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자 이렇게 다각도로 죄와 율법, 죄와 율법과 인간을 살펴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12-13절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해서
이젠 율법을 버려도 되겠다... 율법을 무시해도 되겠다.. 이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히 율법과 죄와 인간 그 관계에 대하여 명확한 이해를 가졌을 뿐 아니라
복음을 영접하고 복음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할찌라도
그 다음 문제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연약한 존재이고..
현실적으로 볼 때는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갈등이 생기는 것인데.. 본문 14-19절입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지만 마음 속에 항상 이런 갈등이 있기에
24절 말씀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러면서 갈등하게 되는데... 비록 이런 갈등은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마음 속에 갈등도 있고 그래서 갈 지(之)자 걸음으로 때론 걷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오늘도... 복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생명에 이르게 하는 율법을 가지고 그 지도를 보고 걸어가고 있으며..
저 천국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