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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벤에셀 (삼상 7:12-17, 벧전 5:5-6, 마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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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우리가 은혜롭게 부르는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2절 가사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의 크신 도움 받아 이때까지 왔으니 / 이와 같이 천국에도 이르기를 바라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에 빠진 우리를 / 예수 구원하시려고 보혈 흘려주셨네”.

이 찬송가의 영어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의 에벤에셀을 세우나이다 / 여기까지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왔음이니이다. 주의 많은 즐거움으로 / 본향에 무사히 가게 되기를 내가 바라나이다. 하나님의 우리(fold)를 떠나 방황하던  / 나그네였던 나를 주께서 찾으셨도다. 위험에서 날 구하시려 / 주의 귀한 보혈로 중재해 주셨도다”

우리가 생각 없이 부르는 소절 “주의 크신 도움 받아 이때까지 왔으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벤에셀”의 표현입니다. “여기까지, 이 순간까지 주님이 나를 도와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볼 때 우리 각자의 나이만큼 주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삶은 바로 에벤에셀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날마다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아니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도우심이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28장은 나중에 목사가 된 Robert Robinson이 처음 예수 믿고 3년 만에 지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또 믿은 지 불과 3년 만에 이런 훌륭한 성경적인 찬송을 지었다고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은 성령의 역사요 또 믿고 난 후 신앙을 위한 자신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한번은 이 찬송의 작사자인 로버트가 영적으로 매우 침체되어 방황하게 되었을 때였는데, 승합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함께 동승한 한 여인이 시집을 꺼내 읽다가 로버트 목사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실례입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이런 훌륭한 시를 읽어보신 일이 있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이 펼쳐 놓은 것을 보았더니 자기가 지은 “복의 근원 강림하사” 바로 그 가사였습니다. 로버트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화제를 돌리려고 하였으나 여인은 끈질기게 이 가사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마음에 동요가 있어 방황할 때 이 찬송을 통하여 평화와 안정을 얻었다고 하면서 계속 그 가사를 읽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남이 읽어주는 자기 찬송 가사를 통하여 로버트는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천하의 학자들이 모이는 캐임브릿지 대학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에벤에셀의 기념비적 일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사무엘상7:에는 중요한 3개의 지명이 나옵니다.

(1) 기럇여아림이 있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잘못 취급하여 무서운 재앙을 만난 후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그 거룩한 여호와의 궤를 자기들에게로 모셔갔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럇여아림 사람들로 인하여 비로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 임하시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 되는 나사로를 살려주셨더니 그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 있기 때문에 여기 안동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일, 그리스도인인 내가 있기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일, 이것이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다름 아니라 바로 여기 안동의 기럇여아림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2) 미스바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기도의 위대한 힘입니다.

영국에서 신교도들을 박해하여 “피의 여왕”이라 일컬음 받던 메리가 무서워하던 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종교 개혁자 존 낙스였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 존 낙스야말로 일개 사단의 병력보다 더 무섭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사무엘 한 사람의 기도가 강적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 사무엘이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과 그 백성을 구해냈습니다. 이만하면 기도의 능력이 어떤가를 우리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예수께서도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결코 과한 말씀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요청됩니다. 이런 기도와 기도하는 사람이 가정에도, 사회에도,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절실하게 요청되어지는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일에 바로 여러분이 나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3) 에벤에셀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백성들의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 힘으로 적을 물리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그대로입니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아노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과 그 천사들 앞에서 너희를 아노라 시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 충만 받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불덩이 같은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복음이 번져갔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그리고 오늘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은 증거 되어 지고 있습니다. 믿은 사람들이 저마다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워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기럇여아림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우리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우리도 미스바 에서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에벤에셀처럼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3. 사무엘 당시 즉 사사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징은 조상들의 전승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잘 시키지 못했습니다. 땅은 물려주었는데 신앙은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들은 땅은 물려받았는데 신앙은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결국 주변의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혜성 같은 영적 거인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에벤에셀의 장본인인 사무엘입니다.

(1) 무엇보다 사무엘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귀한 자세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말씀을 듣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시 1편에 누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성경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 한다”고 했는데 과연 여러분은 말씀,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이런 영적 갈증이 있습니까? 육신을 위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갈증을 가지고 주님과 그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지자에게 요구하기를 “무슨 말씀이든지, 즉 그것이 듣기 좋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상관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내 귀에 부드럽고, 내 마음에 맞는 말씀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 원하는 말씀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씀 앞에 더욱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2)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 사무엘이었습니다. 그 이름 자체가 기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다른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오직 기도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내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위 교회가 여러분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자녀, 배우자, 부모 형제가 여러분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나라와 이 민족, 아니 온 세상이 여러분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박한 현실에서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가 위기의 이스라엘을 구했다면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위기에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15절에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스렸다고 한 것은 당시 왕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해서 억압하고 착취하여 혼자 호사를 누린 것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사무엘은 마치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그 백성들을 위하여 섬김으로 봉사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섬기는 종이셨다면 우리들이 섬김의 도를 익혀야 할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섬김이 있는 곳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섬기는 성도가 주님께 인정받는 종이며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라”. 누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인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세상뿐이니까 세상 법칙에 따라서 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선악과입니다. 버리고, 낮추면서 섬기는 종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높여주십니다.

4. 여기 에벤에셀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결과를 13-14절에서 보십시다.

(1) “블레셋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마귀가 놀라서 물러가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 원수 마귀는 놀라서 물러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잘 믿는 성도는 교회나 가정, 그리고 이 땅의 방패가 됩니다.

(2)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땅을 “회복” 하였다. 이스라엘 절기 가운데 희년이 있습니다. 이 희년은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희년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자녀의 명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회복시키시는 역사로 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평화가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샬롬이 이루어졌습니다. 샬롬은 모든 것이 다 잘되어 온전한 평화가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 안에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 사이에도 평화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온전한 평화는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중심에 모신 여러분에게 결론적으로 주시는 이 놀라운 평화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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