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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이 아말렉을 이기다 (삼상 30: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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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벌써 새해가 시작된지 2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열달 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어서 마음이 설렌지가 엊그제 같은데, 두달이 지나고 나니까 많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10달이나 남았다라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주시는 시간들을 선용하면서 2005년이 부끄럽지 않은 그러한 복되고 귀한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공동체를 블레셋 진영에 두셔서 여러 가지 수모를 당하고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29장에서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는 일에 다윗 공동체는 블레셋과 연합군이 되어서 불행하게도 이스라엘과 싸우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지금 다윗의 공동체가 지금의 본거지 시글락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씀의 편의를 돕기 위해서 이스라엘 지도를 머리 속에 담겨져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이쪽을 지중해변으로 생각을 하시고, 그 위에 갈멜산이 있고, 쭉 내려오면서 가이사랴, 이집트까지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위에 갈멜산부터 생각하면 바로 그 위에가 아벡이라고 하는 블레셋과 다윗의 공동체가 연합해서 싸웠던 이스라엘과 싸웠던 장소가 있고, 블레셋의 수도인 가드라는 도시가 있고, 그 밑에 이스라엘의 공동체, 다윗의 공동체가 기거했던 시글락이라고 했던 도시가 있습니다. 그 밑에는 남방 애굽이 있습니다.

지금 이 아벡이라고 하는 곳에서 연합작전을 하고, 그리고 나서 블레셋공동체는 가드로, 다윗의 공동체는 좀 더 내려와서 시글락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시글락에 도착했을 때, 전해온 소식은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아말렉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동편에 머물고 있는 한 이방민족이 다윗의 공동체가 아벡에서 블레셋과 연합작전을 하는 동안에 시글락을 침공해서 도시를 불태우고, 여자와 아이들을 사로잡았다고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얼마나 다윗의 공동체에 충격을 받았는지, 울 기력이 없을만큼 소리내어 울었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잃었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와서 그것도 믿지 않는 이방나라에 와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다윗의 공동체로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자기 민족과 대적하는 아픔을 겪고, 돌아오면서 우리가 꼭 이렇게 해야하나 그런 갈등을 다윗과 공동체는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글락으로 돌아왔는데, 아말렉이 그들을 모조리 사로잡아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백성이 자기 자녀를 위하여 마음이 슬펐다고 그랬습니다. 아마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보다 더 큰 관심사는 없을 것입니다. 부부에게 있어서는 배우자요,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녀일 것입니다. 배우자와 자녀 중에 누가 더 중요하냐 그러면, 젊었을 때는 아무래도 자녀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남편들이 자식을 얻고나서 아내의 사랑에서 멀어짐을 힘들어하고, 심지어는 바람도 피는 그런 상황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부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요즘도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커서 저녁 늦게 들어오고 그럴 때, 둘이 앉아서 그래도 의지할 것은 우리 밖에 없어. 그리고 이제는 노인티를 내기 시작을 합니다. 뿔뿔이 나가면, 열한시, 열두시에 들어오면 부부 밖에 없는 거지요.

이제 정말 자녀도 둥지에서 다 떠나고 나면 부부 밖에는 서로 의지할 때가 없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배우자보다 자식이 우선이지요. 경제적인 지출도 시간적인 할애도 자식이 먼저입니다.

지금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식과 아내가 포로로 잡혀갔는데, 본문을 보면 자식들로 인해서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식들로 인해서 마음이 슬펐는데, 그것이 이상한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렀습니다. 그 이스라엘 공동체 중에서 이런 저런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자식 때문에, 아내 때문에 울면서 슬퍼하면서 그들이 고통 속에 있다가 누군가가 한 두마디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누군가 이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 책임론이 대두하기 시작을 하다가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까지 분위기가 됐습니다.

나중에 성경 후반에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 중에는 비류와 악한자들이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공동체가 600명이라고 그랬는데, 좀 아둘람굴에 있을 때 다윗 혼자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피난 다니기도 힘든 상황이었는데, 환란당한 자, 빚진자,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로 몰려왔습니다.

순수하고, 정직하고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원통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좋아서 남에게 돈을 떼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빌려주기는 하지만, 달라고 못하는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요? 오히려 더 빚진 사람이 큰 소리치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도 가끔씩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순수하고, 순전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그래서 원통하고, 빚져서 다윗에게 온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중에는 아주 못된 인격과 심성을 가진 사람들도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견디지 못해서 그러면 생각한 나머지 다윗에게나 가보자. 다윗에게 몸을 의탁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저 다윗이 보호해 주고, 인도해 주는 것만 해도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죠.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그들의 공동체가 불에 타고, 포로로 잡혀간 이 극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들이 자식을 위해서 울 기력도 없을 만큼 소리내서 울다가 도대체 이 책임을 누구에게 지어야 할 것인가? 그럴 때 비류들과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의견들이 돋보이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돌로쳐 죽이자고 이야기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습니다. 흔히 먹을 때, 운동할 때, 여행할 때 이런 경우에 사람을, 속마음을, 인격을, 심지어는 신앙을 알 수 있다고 그럽니다. 여행도 며칠 정도의 여행으로는 안되지요? 적어도 열흘 이상이면 이제는 버스 타는 것도 귀찮아지고, 비행기 타는 것도 귀찮아지고, 집에 갈 생각만 나고, 그 쯤되면 이제 기본적인 매너는 다 소진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정말 그의 속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을 합니다. 1달러 가지고 싸우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짜장면 한 그릇, 설렁탕 한 그릇 사주는 것 쉬웠는데, 해외 나가면 1달러 가지고, 천원 가지고 막 싸웁니다. 운동을 해 보면 그 사람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어요. 여러분들 집에서 음식 먹는 일도 그렇지만, 식당을 가서 음식을 먹을 때 여러분들은 좋은 매너를 가지고 먹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1.1.2 태신자 기도운동을 합니다만은, 많은 식당에 종업원들이나 주인들이 우리의 태신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식당에서 가져야할 매너들이 많이 있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나서 돌아가는 그 자리를 한번 물끄러미 쳐다보세요. 하나님의 자녀가, 집사님이, 권사님이, 아니면 장로님이, 목사님이 먹고 간 자리는 어떤지, 여러분들 먹고난 자리는 어떤지 돌아다 보세요.

그리고 스스로 평가해 보세요. 이것은 아닌데, 식당을 운영하는 어떤 분이 그럽니다. 저는 목사님만 왔다가면 은혜가 된대요. 그 분은 교회 다니시는 분이 아닌데, 제가 왔다 가면 은혜가 된대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제가 무슨 복음을 선포한 것도 아니고, 그 분과 특별히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목사님이 왔다간 자리만 보면 자기는 은혜가 되고, 기분이 좋대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대요.

손을 닦으라고 준 그 물수건 가지고, 발가락까지 후비고, 코를 풀어대고, 정말 더럽기 짝이 없는 모습들, 우리들 모습 아닙니까? 음식을 먹고 나서 이제 한 두 젓가락 남았는데, 김치를 새로 시키는 사람들 있지요? 그리고 한 두 젓가락 먹고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주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미웁겠어요? 그런 분들도 정말 우리들이 절제하고, 조심해야할 부분들입니다.

내가 주인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를 한 번만 생각한다면 그렇게 경솔한 행동들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어나서 방석을 가지런히 하고, 의자가 있다면 의자를 가지런히 넣어주고 가는 일도 작은 일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가끔씩 식당에 갔다가 돌아올 때 보면 의자도 뒤로 쭉 밀어둔 상태로 그냥 가고, 방석도 제멋대로 된 대로 그냥 가는데, 가끔씩 정리하다가 눈에 띄게 정리하면 본인들이 미안해 할 까봐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자기거 그냥 방석 똑바로 놔주고, 의자 똑바로 넣어주고 가면 주인이 얼마나 고마워 하겠어요.

그런 고마운 마음이 싹 트인 상황에서 우리 교회 가실래요? 라고 선포가 되어질 때 그 틈새가 복음이 들어갈 여지가 있는 것이지, 저것들도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 오히려 반감이 더 가득한 가운데, 전도지를 주고 복음을 전해봐야 이미 우리는 생활 속에서 태신자를 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음식을 시킬 때 짜증나게 소리 내면서 시키지 말아요. 종업원들 부를 때, 여러분들 자기 종 부리듯이 그렇게 부리면 안 됩니다.

죄송하지만 우리 장로님 중에도 고쳐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권사님, 집사님 중에도 고쳐야 할 분들이 계십니다. 고칠건 고쳐야지요. 부끄러운 부분들은 고쳐야합니다. 우리 목사님들도 죄송하지만 어떤 모임에 식당에 가면 부끄러운 모습들이 있어요. 얼굴이 뜨거울 때가 있습니다. 저 분들이 우리가 목사라고 ‘참, 부끄럽다.’ 그럴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 논리는 세상 속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평상시에 은혜의 생활에서는 하나님을 향해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위기가 왔습니다. 아내를 잃었고, 자식을 잃었습니다. 성경은 아쉬움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다윗을 돌로 치자는 어처구니 없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저는 가끔씩 장마철에 운동장을 생각해 봅니다. 평소에 운동장을 잘 깔아 놓으면 운동하기가 좋습니다. 넘어져도 다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고 나서 그 다음주 운동장을 가보면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낍니다.

흙들이 다 씻겨져 나가고, 그 속에 감쳐두었던 바위들, 돌맹이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어요. 이 운동장에 이렇게 돌맹이들이 많았는가 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은혜로울 때, 형통할 때는 덮어져 있던 우리의 모습이 비가 오고 나면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다윗의 공동체 속에서도 어처구니 없이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늘어가게 됐습니다.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다. 잘 사용하려는 표현은 아닙니다. 굉장히 난처하고, 견디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받았으나, 여호와로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

어떤 선배 목사님이 그럽니다. ‘황목사, 황목사는 교인들을 믿나?’ 저는 그 질문을 받고 상당히 놀랬습니다.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시나? 저는 아주 보편적인 대답을 했어요. ‘당연하지요. 교인들을 믿어야지요.’ ‘그래, 황목사는 아직 순수하구만.’ ‘나는 교인들 안 믿어.’ 10년 이상 선배가 되는 그 분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 목사가 교인들을 안 믿으면 누구를 믿나요?’ 그 분은 교인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은 분이셨어요. 뒷통수를 많이 당한 분이었어요. 더 이상은 교인들을 믿고 싶지 않다고 그러셨어요.

만약에 이 상황이라면 다윗 같으면 자기가 정말 고단하고, 힘들었을 때, 오히려 자기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움을 받겠다고 찾아온 그 아둘람의 400명의 공동체, 그래도 그들을 챙겨주고, 이끌어 주고, 먹이고, 입히면서 사랑해 주었는데, 배은망덕해도 유분수지, 다윗에게 위기가 왔다고 해서 돌로 치자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마 다윗은 그런 마음을 가졌을 거예요. 믿을 놈은 하나도 없구나. 도와줘봐야, 은혜를 끼쳐봐야 소용 없구나. 아마 인간적으로는 그런 실망감이 가득 찼을 거예요.

그러나 역시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군급하였으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인 줄 믿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군급했을 때 정말 앞뒤가 꽉 막혔을 때, 인간적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제단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옵니까?

시편 기자는 분명히 대답합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볼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다윗은 제사장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블레셋 지경에 있기 때문에 성막에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의 종을 초청해서 그가 있는 성 에봇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초청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우리의 아내와 자녀들을 찾아와야 하는데 쫓아가면 감당하겠습니까? 도와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쫓아가라. 네가 미치고 정녕 찾으리라. 그들이 자기의 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을 쫓아가서 다 회복하리라고 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비상시에, 곤경시에 여호와께 묻는 신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이리저리 인간적인 연줄을 찾아다니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보다는 곤경시에 하나님의 사람을 초청하고, 하나님의 제단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 다윗을 바라보게 됩니다.

육백명이 출발합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 다윗의 공동체가 4백명이다. 늘어서 6백명이다라고 할 때 그 숫자는 장정들의 숫자를 의미합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예요. 적어도 두 배에서 세 배 정도의 다윗의 공동체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6백명이 찾으러 이제 출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을 했습니다. 시글락에서 부솔시내까지 이르렀을 때 2백명의 장정들이 피곤해서, 두려워해서 여러 가지 이런 저런 이유로 주저앉았습니다.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시글락에서 부솔시내까지 60리, 24Km입니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부솔시내에 도착해서는 2백명이 떨어졌습니다. 다윗은 그 2백명을 부솔시내에 남겨두고, 나머지 4백명으로 남방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여기서 하루 종일 성경 본문에 보면 새벽부터 이튿날 저녁 때까지 그들과 전투를 벌였고, 아내와 자녀들과 빼앗긴 모든 재산들을 다 찾아왔습니다.

그 아말렉이라고 하는 민족은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출애굽에서 신광야를 지나갈 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저지했던,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민족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민족은 군대라고 할 수 없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저 출애굽 했다고 하는 기쁨만으로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그리고 광야로 가던 민족들이었습니다. 훈련된 군대와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장정들을 뽑아서 일선에 나가고, 모세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그들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기도할 때에, 모세의 손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는 상황을 보면서 아론과 훌이 뛰어 올라와서 모세를 바위에 앉히고, 두 손을 하나씩 잡고서 모세의 손이 내려 가지 앉도록 도운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장면입니다.

결국 해가 지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승리해서 그들이 여호와 닛시라고 고백을 했던 곳이 바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아말렉 민족이 오랜 세월 후에 이스라엘을 또 고통스럽게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에 아말렉 손에 붙이셨고, 4백명
의 공동체는 승리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빼앗겼던 모든 재산들을 다시금 찾아서 돌아오고 있습니다. 부솔 시내에 돌아오니까 남았던 200명들이 환영을 했습니다. 개선하는 다윗의 일행들을 환영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기쁘고, 한 편으로는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이길 줄 알았으면 끝까지 갈 걸...승리할 줄 알았으면 나도 참여할 걸.... 아마 그런 후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다윗이 선포합니다. 모든 자녀와 아내들은 각각의 가족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다시 얻은 재산과 노획물들은 모든 사람에게 600명에게 모두에게 분배하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또 두 그룹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비류들, 하나는 마음이 악한 자들, 과거에 다윗을 돌로 치자고 주동했던 그런 그룹들입니다. 그들이 나서서 말합니다. 저 200명은 두려워서, 피곤해서, 연약해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그룹 아닙니까? 그 사람들에게 가족을 돌려주는 것은 몰라도, 재산과 노획물을 나눠 주는 것은 안 된다. 우리가 싸웠는데,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웠는데, 우리가 참여해야지.

2002년 코리아 재팬 월드컵 때 우리는 생각 밖에 4강이라고 하는 아마도 한국 축구가 그 이상의 업적을 이를 수 있을까 하는 기적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천만이 넘는 사람이 거리에서 응원을 했고, 월드컵이 끝났을 때 축구협회에서는 포상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후원한 기업에서, 축구협회 회장이, FIFA에서 전해주는 분배금을 다 모아보니까 한 사람이 몇 억씩 돈이 돌아갑니다. 축구협회에서 기준을 정했습니다. 출전한 선수와 후보를 구별을 하겠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축구협회 조중현 전무께서 실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런 기준을 가지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축구게시판에 네티즌들이 벌떼와 같이 글을 올렸습니다. 똑같이 대표로 뽑혀서 훈련하고 똑같이 수고했는데, 그것을 나누어야 되는데 홈페이지가 닫는 그런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여론이 워낙 빗발치자 결국 축구협회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후보선수들까지 똑같이 분배하기로 하고서야 축구협회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 오늘 본문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국민들이 힘을 보태주지 않았다면 후보들은 경기에 나오지 못하는 마음 고생도 컸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동국이라는 선수는 대표로 발탁이 되지 못해서 자기는 천만이 넘는 국민들이 열광할 때 한 번도 테레비나 경기를 본 적이 없대요. 아예 외면해 버렸어요. 그렇게 상처가 큰대, 더구나 그들에게 포상까지 차별화 한다면 얼마나 상처가 크냐는 것이지요.

다윗을 보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과연 그릇이 큰 사람인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장면에서 두려워서 남은 사람, 피곤해서 남은 사람, 이런 저런 이유로 남은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보면 얄미운 사람들일 거예요.

근데 다윗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23절,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 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그리고 24절에서 선포합니다.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이나 부솔시내에서 기다렸던 사람들이나 분배는 일반이었습니다. 똑같이 분배할 것이다. 그것이 규례가 되어서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성경기자는 이미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그리고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써 모든 사람들, 더구나 연약한 자와 약자까지도 보호하는 다윗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윗의 약자를 위한 보호법이라고 부릅니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사회입니다. 강한 자는 이기고, 약한 자는 죽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건강하려면 약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다윗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말씀을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아말렉으로 인해서 크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시글락은 불타고 아내와 자녀들은 빼앗겼습니다. 실패의 상황입니다. 고통의 상황입니다. 위기의 상황입니다. 그 때의 사람들은 인간적인 상황으로, 배은망덕하면서조차도 그들은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겼습니다. 형통했습니다. 실패했을 때보다 더 두려운 시기는 승리했을 때입니다. 이겼을 때입니다. 고난보다도 더 위험한 시기는 형통할 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강한 자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승리의 뒤안길에 슬퍼하고, 미안해하고, 연약해 하는 이들을 위해 다윗은 챙길 줄 알았습니다.

이 사회가 강한 사회가 되고, 이 사회가 하나로 통합이 되려면 약자가 보호되는 시스템을 잘 가동해야 합니다. 다윗은 승리했을 때, 형통했을 때 연약한 자와 부족한 자를 배려하는 정말 진정한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이기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용감하고, 우리가 지혜로와서가 아니라 우리를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승리했을 때, 그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의 실패 속에서, 우리의 삶의 승리 속에서, 우리의 위기나 우리가 형통할 때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고백을, 그 삶의 태도를 변치 않았던 다윗을 보면서 오늘 이 시대에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21세기의 다윗으로서 여러분들의 삶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크게 군급할 때에도, 크게 승리하였을 때 사람으로 인하여 실망하지 않고, 사람으로 인하여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용기를 얻으며 하나님을 높이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증명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을 보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승리의 기회도 주시고, 때때로 실패의 기회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느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높이는 성도의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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