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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더불어 사는 삶 (창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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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사람은 원래 혼자입니다. 처음부터 혼자 있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있게 그렇게 창조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짝을 만들어 주리라.” 그래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 혼자였습니다. 비록 한 몸에서 만들어졌지만, 아담과 하와는 각각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따로 따로 책임을 져야 하고, 하나님은 그 책임을 따로 따로 물으셨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주민등록증 새로 만들라 하면 새로 만들어야 하고 의료보험이 몇% 인상 되었다고 하면 그렇게 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내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것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 아내, 아이들, 그렇게 함께 웃고 떠들고 때로는 토닥거리다가도 어느 때 자신을 돌아다보면서 “난 뭐냐?”하고 혼자임을 느끼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23절,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홀로 계셨습니다. 성경은 하다못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혼자 있다.” “홀로 있다”는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권의 사람들은 <혼자 있음>을 Solitude라고 하고 <외로움>을 나타낼 때는 Loneliness라고 합니다.
여기 Solitude라는 혼자 있음은 혼자 있음에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있음을 괴롭게 느끼지 않고 기쁘게 느끼고, 혼자 있음을 쓸쓸하게 느끼지 않고 풍요롭게 느끼는 것입니다. 외로움을 혼자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고, 혼자 있음은 혼자 있기 때문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차이를 좀 더 말씀드린다면, 모두 함께 더불어 있는데도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면 외로움이고, 혼자 있음에도 모두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진정한 혼자 있음이 되는 겁니다.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임을 느낀다면 그것은 외로움 입니다. 그러나 모두들 다 직장가고, 학교가고, 그래서 덩그마니 집안에 혼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온 식구들과 함께 있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혼자 있음입니다.
영화배우 이은주라는 분이 자살 했습니다. 그 분에게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좋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혼자였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것은 외로움입니다. 아무에게도 자기 속내를 이야기 하지 못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혼자 산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있었고, 거기에는 제자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구원해야 할 군중이 있었습니다. 몸은 혼자이지만 결코 예수님은 혼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사건 역시 혼자 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보면 철저하게 예수님은 혼자이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 쳤습니다. 심지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도 당신을 버리셨다고 절규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으로서의 외로움이 아닙니다. 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바로 거기에 헤아릴 수 없는 인류의 구원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빨간색, 너는 파란색, 그래서 각각으로 나눈다면 거기에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빨간색, 너는 파란색, 그래서 함께 어우러짐을 느낀다면 그것이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인 것입니다.
혼자 있다고 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 아닙니다. 혼자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에 있고 누군가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제각각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 제각각입니다. 그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내가 누구와 같아야 할 까닭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아 똑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쌍둥이도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이 제각각은 서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이 어우러짐이 없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한들 아무리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로마를 방문했을 때 엄청나게 큰 벽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자이크 벽화입니다. 여러 가지 색깔의 타일로 구성된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얼룩거리기만 하고 전체 그림이 뭔지 알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아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한 폭의 미술품을 보게 됩니다.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슬픈 일과 기쁜 일, 눈물과 웃음, 순탄한 때와 힘겨울 때, 아픔과 건강, 성공과 실패 등이 어우러져 한 생애를 꾸민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서로의 어우러짐입니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이런 식으로 몰아서 붙였더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가복음 9장 2-8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셨습니다. 옷은 새 하얗고 눈부시게 빛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7절, “그러자 구름이 덮혔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 오셨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생각에 “올라간 산이니까 당연히 내려와야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을 지어서” 여기서 살자“는, 그러니까 세상과 동떨어짐에서부터 내려오신 것입니다.
신앙은 세상과 동떨어짐이 아닙니다. 그냥 모여 앉아 찬송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방언하고, 입신하고, 그러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산 위와 산 아래의 어우러짐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어우러짐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도움 받고 도와주는 어우러짐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는 늘 혼자이셨습니다.
모든 것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누가 더 높은 자리 차지 할 거냐로 서로 다투었고,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는 다 도망갔습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예수 앞에서 찬양하며 기뻐하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 했습니다. 십자가 위, 그 고통의 순간 하나님조차도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군중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산 아래서 고통당하며 끝내 죄로 죽어야 하는 인류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것이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인 겁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도 혼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온 인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때 온 인류도 함께 살아난 겁니다.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삶, 그것이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가 그겁니다.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면서도 혼자 삽니다. 내 것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들입니다. 거기다가 자기는 자기 밖에 모르면서 남들 보고는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심지어 교회조차 그런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함께 주님이라 고백하며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뭉쳐졌다고 말들은 하지만 실상은 철저하게 자기만을 고집하는 경우를 봅니다.
내 말 한마디가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되어야 하고, 내 행동 하나에 우리 모두의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합니다.

사도행전 2장 44-47절에,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하자는 것 아닙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런 정신,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 29장에, 야곱이 줄곧 길을 걸어서 드디어 동방 사람들이 사는 땅에 이르렀습니다. 거기, 들에 우물이 있는데 그 곁에 양떼 세 무리가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목자들이 양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어 놓았다가 양떼가 다 모이면 그들을 들어내고 함께 그 물을 나누어 먹였습니다. 야곱이 그들에게 라반에 대해 물었고, 그들은 라반의 딸이 양떼를 몰고 곧 올 것 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말 합니다. “아직 해가 한창인데, 아직은 양 때가 모일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다시 풀을 뜯기러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대부분 낮에는 풀을 뜯게하고 저녁때가 되어야 우물에 모여들어 물을 먹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말은 맞는 말 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말을 들은 목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양떼가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양떼가 다 모이면 우물 아귀의 돌을 굴러내고서 양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을 봅니다. 야곱과 목자입니다.
목자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곱과 다릅니다. 목자들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대한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먼저 양떼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 모였을 때 함께 물을 먹이는 것을 그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도 받았고, 벧엘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아직도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하나님의 곱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줄 몰랐습니다. 오로지 자기 삶을 위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어떻게 하든 내가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오해도 여기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예수 잘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잘 믿었더니”가 강조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공로가 됩니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잘 못 믿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복 주심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열왕기하 10장에, 앗수르의 산해립이 유다를 침략합니다. 그때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기도했고,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인 이사야에게 기도해 주길 요청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유다를 건져 주신다. 앗수르왕 산해립은 집으로 돌아가 죽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이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히스기야가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입니까? 이사야의 기도 때문입니까? 물론 기도 해야지요.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거기 34절에 보면, “나는 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고, 내 종 다윗을 보아서라도 그렇게 하겠다.”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나”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나의 종 다윗”은 다윗과 맺은 약속 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 자신과 당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시고 구원 하셨던 겁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 했더니”가 아닙니다. “주의 종이 열심히 기도 했더니”도 아닙니다. 누가 기도 하든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약속이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누가 기도하든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하나님의 약속도 아니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36-37절의, 갈멜산에서 하는 엘리야의 기도를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주 하나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주님의 종이며, 내가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만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응답하여 주십시오. 응답하여 주십시오. 이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주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진정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를 원하는 기도였습니다.
열심히는 누가 열심히 기도했습니까? 바알 선지자들 입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심지어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찌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응답이 없었습니까? 그들이 섬지는 신은 원래부터 없었던 겁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욕심을 채워주길 바라는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하나님의 복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 많고, 배운 것 많고, 권위가 높으면 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높임을 받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대학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복이고 대학 못가면 하나님의 저주입니까? 대학에 들어가든 못 가든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에 있음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직장도 사업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다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다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은 부자 청년을 보세요.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부자고 관직도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있는 것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그의 구원입니다. 그에게 영생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의 바램은 가진 것 다 가지고 그러면서 죽지 않고 오래 그 부요함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 졌다고 그것이 다 복이 아닙니다. 물질이나 사회적 지위나 그런 것 좋아졌다고 그것이 다 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네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네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여러분의 눈에는 뭐가 복일 것 같습니까? 땅 그리고 큰 민족, 크게 이름을 떨치는 것,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것, 그겁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지금 이 말씀은 누가 하신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뭐가 복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복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복입니다.
보세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멋지게 고백한 베드로.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말씀하실 때, “그리하면 안 된다”고 나섰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히 안 된다고 그래야 해요. 그래, 스승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당연히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 소리를 듣습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꺾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가로 막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것이 때문입니다.
“우는 아이 젖 한 번 더 물린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울 때마다 젖 물립니까? 오줌 싸고 그래서 우는데 젖 물리면 됩니까? 열이 나고 몸이 아파 우는데 젖만 물리면 됩니까? 소화가 안 되어서 배 아파 우는데도 젖 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 달랜다고 하나님께서 주십니까? 철야해도, 금식해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면 오히려 안 주시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복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믿으니까 구원 받은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저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겠다.”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겁니다.

열왕기하 20장에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주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가 죽게 되었으니 내 집안의 모든 일을 정리하여라. 네가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 식으로 표현하면 예언기도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그의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기도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사야가 궁전 안 뜰을 막 벗어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히스기야가 살아 날 것이라고, 십오 년 더 살게 해 주겠다고.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신 줄 아십니까? 히스기야가 기도했기 때문에? 물론, 그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6절에 보면,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를 더 연장시키고,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여서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 종 다윗을 보아서라도 내가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살려 주셨습니까? “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내 종 다윗을 보아서라도”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복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심을 알게 하시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에게 나누어지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되어야 아브라함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할 때,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복을 모든 민족에게 나누어 줄 때, 그럴 때 아브라함은 땅을 얻을 것이며,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그의 이름이 크게 떨치게 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요즈음 많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내세요. 복과 은혜와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이 되십시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텅 비도록 사랑을 베푸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채워집니다. 텅 비도록 복을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이 넘치도록 채워집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그렇다고 오해 마십시오. 하나님은 저주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저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축복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종이라 하더라도 누구를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저주 권은 없습니다. 축복 권만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복하십시오. 원수까지라도 복을 비십시오.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주신 복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과 구원과 기쁨과 감사와 평안과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함께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혼자 스스로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함께 더불어 사는 삶.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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