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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효도 (눅 8: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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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중표 목사

예수님은 전 생애가 효자로서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효자로 세상에 태어났고, 효자로 사셨고, 효자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완전한 효자였습니다. 하나님께도 효자요, 또 육신의 몸을 입은 사람으로서 부모에게 효자였습니다. 그래서 날 때도 하나님께 효자요, 부모에게도 효자요, 또 살으실 때도 하나님께 효자요, 또 부모의 효자요, 그리고 죽을 때도 하나님께 효자요, 또 사람에게도 효자가 되어서 그의 생을 마감합니다.
저는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 위대한 예수님의 효도, 그 생애가 우리의 생애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불효자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특별한 사람은 하나님께 효자가 되기 위해서 부모에게 불효자가 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하나님의 효자, 부모의 효자, 이 두 입장에서 다 효자가 되어서 그의 생을 완성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에 일관된 목표가 일관된 그의 생애 흐름이 효자로서의 생애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세 가지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년시절에 효자가 있고 장년시절에 효자가 있고 죽은 이후에 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년시절에도 효자요, 장년시절에도 효자요,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효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 가지를 오늘 생각하는데 순종하는 효자, 공경하는 효자, 부모를 인도하는 효자, 이 세가지입니다. 소년시절에는 순종하는 효자요, 장년시절에는 공경하는 효자요, 죽은 이후에는 부모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효자, 이 효자가 될 때 그 효자는 완전한 효자요, 또 영원한 효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그는 효자로 태어나는데 그 효자가 무슨 효자냐 하면 부모에게 순종해서 하나님에게 순종해서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태어날 때 그는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습니다. 최초의 여인 하와는 마귀가 그 가정을 심방합니다. 그런데 이 성모 마리아에게는 가브리엘 천사가 심방합니다. 첫사람 여인 하와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죄인이 되었고 또 죄인을 탄생하고 이 성모 마리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로운 아들을 세상에 났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와같이 철저한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아들을 낳고 또 아들 예수가 태어날 때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태어납니다.

천사가 방문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마리아가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마리아가 무서워서 떨 때 천사가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다" 그때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모 마리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아들을 낳고 또 그 아들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런 계시를 받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자기 자신이 아들을 잉태하면서 '만세에 내가 복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 태중에 들어갈 때부터 효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 어머니 입으로 '만세에 내가 복이 있다.'

사실 그런 아들을 낳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이미 그런 아들을 낳는 복을 받은 마리아에게는 그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는 이미 자기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정혼한 여인, 약혼한 여인이 임신하게 되면 이 간음했다는 유대인의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나는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그런 고백으로 순종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요, 그 아들에 그 어머니의 이 위대한 사건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어린시절의 효도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순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효자가 되려면 어렸을 때부터 효자로서의 그의 싹이 나야 됩니다. 될성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것처럼 장차 효자가 될 사람은 어렸을 때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년이 되어서 효자가 되는 것 아닙니다. 어렸을 때 효자가 되어야 되는데 어렸을 때 어떻게 효자가 되느냐?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고는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반항하는 아이는 안됩니다. 그래 성경은 말합니다.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3절에 보면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그리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순종은 결혼 전에 순종이고 결혼 후에는 공경하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12살 때 자기 어머니와 함께 또 아버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올라갔습니다. 명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하룻길이 지난후에 아들을 찾아보니 보이지 않는거죠. 그래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근심이 되어 사흘을 찾아 헤맸습니다. 사흘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성전에 가서 예수님이 율법사들과 함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것이 너무 기이한 것을 본거에요. 그래서 그 어머니가 말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이랬느냐 네 어머니와 네 아버지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도다." 그때 예수님이 한마디를 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어찌 알지 못하였나이까" 이 말을 왜 예수님이 그 어머니에게 해야 합니까 그 어머니는 명절에 와서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는데도 마음이 온전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절기를 지키는 정신이, 또 신앙적 고백이 빈약한 것을 예수님이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소년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전에 가니까 너무 즐거웠어요. 그런데 그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것 같애 그리고 자기 집에 돌아갈 일만 생각하는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그 성전에 머무는 것입니다. 왜 머무느냐? 어머니로 하여금 돌아오도록 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도록 그래 결국 그 어머니는 하룻길을 가다가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아들이 있는 곳에서 무엇을 봅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어찌 알지 못하였나이까" 이 말은 예수님이 내가 내 아버지 집이란 말도 되지만 어머니 자신도 "어머니는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어찌 알지 못합니까?" 그 말도 되는 겁니다. 왜? 어머니는 왜 여기 와서 내 아버지 집에 그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입니다. 무언의 책망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는 비록 소년기의 나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그 마음을 담고 그 성전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시간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여기 온전히 있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어찌 알지 못하였나이까? 이것은 지금 하늘의 우렛소리처럼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이 여기 아버지께 있어야 한다는거에요. 몸만 와서는 안되요. 내 생각이 와요, 마음이 와요, 뜻이 와요, 정성이 와야 되요. 이것이 바로 신앙고백이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나사렛에 내려가 순종하며 받들더라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볼 때 부족한 면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년기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받들었어요. 이 소년기에 순종했어요. 무슨 순종했습니까? 그 아버지는 목수였어요. 그래서 요셉은 목수의 일로서 날마다 수고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따라서 예수님이 순종합니다.

지난 날 우리 조상들은 거의 부모의 직업이 자녀의 직업이고 부모의 생업이 가계를 유지하고 그래서 부모의 뜻에 따라주는 것이 효자에요. 부모 하는 일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농사 지으면 농사를 같이 해주고 목수 일이면 목수 일을 해주고 장인 일이면 장인 일을 같이 해주는 것이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그 부모를 돕는 것이에요. 이것이 효자에요. 예수님은 철저하게 목수로서 나무를 끊고 대패질하고, 톱질하고,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서 가구를 만들어 시중에 내놓고 또 이웃들의 가구를 고쳐서 수리해서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 일을 아버지의 하는 일을 받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시절에 나무껍질을 벗깁니다. 가지를 자릅니다. 모난 것을 자릅니다. 그리고 아름답게 만들어서 가구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쓰기에 편리한 도구를 만들어주는 일을 그 아버지와 함께 30년을 그 가정에서 순종하며 하고 있습니다. 그 동생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에 있어서 형으로서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신비한 비밀을 담아 그는 그의 생애를 위대하게 만들어갑니다. 어떻게요? 그는 위대한 목수로 등장을 합니다. 나무 깎는 목수가 아니요, 대패질하고 끌질하는 목수의 세계에서 사람을 다듬는 목수로서 드디어 주님의 생애가 등장이 됩니다. 이제 열두 제자를 골라서 그들을 세워 이 사회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고기잡는 어부, 사회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그러한 어떤 의미에서 공부도 하지 못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깎고, 다듬고, 저들에게 만들어서 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수신데 무슨 목수냐? 사람 만드는 목수야 위대한 목수 가운데 사람 만드는 목수야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가 그렇게 찬란하게 빛난 것은 30년 그 아버지에게서 목수를 배우면서 그 목수가 하늘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목수가 아니에요.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식은 땅에서 잘된다는 말은 땅에서 무슨 부요하고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를 통해서 하늘로 통한다는거에요. 왜? 그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니까요. 결국 예수님은 위대한 생애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든지 부모가 상처를 주어도 그 상처까지도 순종하면서 받아 부모가 무지하면 무지한대로 받아 부모가 병을 주면 병까지도 겸손하게 받아드릴 때 이것이 훗날 하늘로 통하는 신비한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부모를 원망하면 안된다는거에요. 잘났든 못났든 부모가 부족하든간에 그 부모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그 자식은 그때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효자가 되는거에요. 땅의 효자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효자가 되요. 드디어 예수님은 하나님의 효자로서 사람을 만드는 목수인데 드디어 목수가 만든 나무에 달려 그는 못박혀 죽으면서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구주 예수가 되었던거에요.

어떻게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자녀들이 순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고집된 자식들, 말 안듣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자식을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어찌 알지 못하였나이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 있어야만 순종을 배우고 효자가 되기 시작합니다. 공부해라 공부해 그 소리는 천만번 해봤자 그 소리 그 소리에요. 저도 못한 공부 뭐 비슷하지 별것 있겠어요. 안되는 얘기에요. 또 공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되어야죠. 그래서 우리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한다. 이것을 가르쳐야 됩니다.

오늘도 자식들을 여기 데려오지 못하고 어느 골방에다 어느 구석에다 놓아두고 있는 부모들은 회개해야 되요. 회개해야 됩니다. 정말로 회개해야 됩니다. 그 마음이 없는 것을 회개해야 되요.

두 번째로 이제 예수님은 두 번째 효자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30세 되던 해에 예수님이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 유대 땅을 거니시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기 시작했어요.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 말씀에 보면 그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으러 왔어요. 왜? 예수님을 미쳤다고 그랬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이 날마다 나가서 그렇게 가정에서 순종하면서 부모를 받들던 그 자식이, 그 아들이 갑자기 30세 되던 해 밖으로 나가서 부모님에게 소식도 없고 부모님에게 떠나버리고 그리고 나가 살 때 '저 미쳤다.' 그래서 성경이 마가복음에는 미쳤다고 그랬습니다. 누가 그 말을 하느냐? 집안 식구들이 그랬어요. 드디어 예수님을 찾으러 왔는데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옹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제 예수님 곁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래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에게 그 무리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여기 찾으러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무리를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자매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어머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제2단계 효도를 선언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를 육신적으로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완전히 결별하는게 아닙니다. 뭘 얘기합니까? "어머니, 이제는 내가 어머니 아들로서의 살아야 될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나는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내 어머니처럼 모셔야 하며 내 형제로 모셔야 하옵니다. 또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나의 어머니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찌 성모 마리아만 내 어머니가 되겠습니까 모든 여인들이 다 그런 훌륭한 어머니가 되기를 기대하오며 여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 형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단계는 부모를 떠나는 단계입니다. 진짜 효자는 부모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떠난다고 하는 말은 부모를 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자식은 부모를 버립니다. 부모를 외면해버립니다. 이것은 불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모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떠납니다. 어떻게 떠납니까? 보다 높은 세계 일을 위해서, 또 어머니를 돌볼 동생들이 있습니다. 30년 어머니를 받들어 섬겼습니다. 왜? 그동안 동생들이 어리니까 돌봐주었습니다. 이제는 동생들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예수님은 이제 해야 할 넓은 세계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효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머니 마음에서 자식이 떠나주는 그런 자식이 효자입니다. 어떻게 떠납니까? 육신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떠나주어야 되는데 어떻게 떠납니까? 부모에게 근심으로 못떠나게 하는 자식 불효입니다. 자식을 못잊어 늘 마음에 맺혀있는 부모를 만드는 것도 불효자입니다. 늘 부모가 자식을 못잊어하도록 하도록 만들어놓고 있는 그 자식, 희망이 없습니다. 자식이 든든히 서서 내가 걱정 안해도 그 자식은 잘될거야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겁니다. 병들어서 일생동안 부모의 마음에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그 자식 불효입니다. 인간됨으로 바르게 살지 못해서 평생 부모에게 한맺혀 마음을 매이게 만드는 것 불효입니다. 부모를 괴롭혀 '저럴 수 있나 이 자식' 하면서 마음에 멍들게 한 것 불효입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염려와 그런 멍든 상처를 남기지 아니하고 어머니 곁을 떠나는 자식, 이게 높은 단계의 효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 부모의 도움이나 받고 부모에게 근심을 심어주고 부모에게 아픈 마음을 멍들게 하고 담아주고 이것은 불효 아닙니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무런 상처를 남기지 않은 채 어머니, 누가 내 어머니입니까? 이제 인류 모두가 다 내 어머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세계를 넘어가는데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공경의 단계는 결혼 이후의 단계입니다. 결혼 전에는 순종하고 결혼했으면 이제 부모를 공경해야지 순종하는 단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류와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를 공경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이제 어머니를 십자가 곁으로 모셔서 마지막 그의 죽음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천국으로 향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아들로 천국으로 가기 전에 그 어머니에게 마지막 보여야 할 최후의 순간이 십자가에 피흘림의 순간이었습니다. 보통 자식은 자식이 임종을 부모가 보게 하면 불효입니다. 자식 죽는 것을 부모가 보면 불효입니다. 부모의 돌아가심을 자식이 보는 것이 효자라고 그러죠.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예수의 죽음을 그 어머니에게 보게 합니다. 머리에 가시관 쓰셔 피흘리는 그 아들의 안타까운 모습, 그리고 손과 발에 못박혀 형틀에 매인 채 피흘리는 그 아들 그러면서 "아버지여, 이 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아지 못하여 그러하니이다." 그 피맺힌 기도소리 다 듣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달려 참으로 고통 가운데서 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은 자기 어머니를 향해서 최고의 여자로서 귀나이, 존칭, 귀부인, 그 칭호를 부르면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은 "여기 요한이 아들입니다. 저는 아들이 아닙니다." 그 뜻입니다. "요한아, 네 어머니다." 그래서 요한이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높은 칭호를 붙인다 한들 어머니보다 더 높은 칭호는 없습니다. 아들이 부를 수 있는 최고의 높은 칭호는 어머니라고 불러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성모 마리아에게 어머니라는 말을 붙이지 아니하고 "여자여" 그랬습니다. "귀나이, 귀부인이여 이제 어머니는 나를 낳은 어머니로서의 생애가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시옵소서. 내 피흘리는 모습을 보시옵소서. 이제 나는 하나님께로 갑니다. 나를 통하여 이 피흘린 아들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으시고 천국으로 오소서." 그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이제 예수님은 저 천국으로 가시면서 그 어머니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부모에게 대하여 효도하는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처럼 효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순종하는 아들, 공경하는 아들, 천국으로 인도하는 아들, 그러나 우리가 지나온 날을 회상할 때 부모에게 불순종했습니다. 어떻게 이제 돌아가신 부모에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닲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이제는 고쳐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부모에게 불순종한 사람들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므로 그 불효를 하나님의 효자로 바꾸어놓아야 됩니다. 그때 우리의 부모도 천국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두 번째, 우리는 참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다. 어떻게? 부모를 자유롭게 해야 됩니다. 아들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만들어드려야 됩니다. 불편하게 하면 안됩니다. 마음에 염려를 드리면 안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도 못하고 돌아가게 하셨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제는 내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세 번째로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살아계신 부모님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인도해야 됩니다. 이것이 최상의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좋은 집을 드린다한들 얼마나 사시겠습니까 잠시 지나가는 장막집에 불과합니다. 부모님들에게 진수성찬을 드린다한들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되겠습니까 그 밥을 먹고도 돌아가셔야 됩니다. 부모님에게 좋은 옷, 능라주단으로 그를 입혀드린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죄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천국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해드리는 것, 이것은 최고의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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