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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를 지극히 높여 (빌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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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상훈 목사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어느 주일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은 부활주일을 맞아 자기 반 어린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달걀 모양으로 생긴 플라스틱 상자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상자였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방금 너희들에게 설명한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러니 부활은 곧 생명을 뜻하는 것이란다. 이제 선생님이 너희에게 15분의 시간을 줄테니까 그 상자 속에 생명을 상징하는 것을 하나씩 담아오도록 해라. 알겠지?"
그러면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즐겁게 뛰어다니면서 각자가 그 나름대로 생명을 뜻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씩 빈 상자 속에 담았습니다. 이제 시간이 되어 아이들은 다시 선생님 앞에 모였습니다.
아이들은 차례대로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모두에게 내어 보이면서 설명했습니다. 첫째 아이의 상자 속에는 예쁜 꽃이 들어있었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꽃이 이렇게 아름답게 피어있다는 것은 이 꽃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 꽃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선생님과 아이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둘째 아이가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속에는 노란 색깔의 나비가 들어있었습니다. 상자를 열자 노란 나비는 날개를 펄럭거리면서 날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와!"하면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차례차례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을 보이면서 설명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파릇한 풀 잎사귀를 넣어오기도 했고, 또 어떤 아이는 개미를 산 채로 넣어오기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아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조금은 우둔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종종 다른 아이들에게서 바보라고 놀림을 받기도 하던 아이였습니다. 이제 모두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저 아이가 무엇을 담아서 왔을까?" 모두가 궁금한 생각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얼른 자기의 상자를 열지 못하고 주저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괜찮아,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네 손에 있는 상자를 한 번 열어봐."
그 아이는 마지못해서 자기 손에 있는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자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가 손가락질하면서 깔깔 웃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오겠어?"
그러자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의 무덤도 비었잖아요?"
그 소리에 모두가 일시적으로 숙연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뜻깊은 부활주일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아홉 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순서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의 주어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끝났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이제는 주어가 예수님에서 하나님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오늘 뜻깊은 부활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높이셨고, 왜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셨으며, 또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신 결과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어떻게 높이셨습니까?

9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시기 위해서 지극히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어떻게 높이셨습니까? 예수님은 단계적으로 자신을 차례차례 낮추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예수님을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높이신 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엡1:20∼21을 봅시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네 단계로 높이셨습니다. 첫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둘째 "하늘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셋째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입니다. 오른편은 존귀한 자리, 영광의 자리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넷째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셔서 만물을 그 앞에서 복종케 하셨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9절 하반부에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신 마지막 단계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이 버가모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 이기는 자에게는 새 이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새 이름을 주신 경우가 종종 등장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또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새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천사가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에게 나타나서 한 말을 잘 기억합니다. 마1:21의 말씀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 받은 새 이름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받으신 이름입니다. 또 거기다 역사적으로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에게만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도 예수라는 이름은 쓰여졌습니다. 예컨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 또는 호세아는 다 예수라는 이름과 똑같은 의미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주신 새 이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새 이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은 바로 "주"라는 이름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주라는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시8:9을 보십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바로 "주"라는 이름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것보다도 더 뛰어난 이름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이전에도 제자들로부터 "주"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공식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백성의 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든지 부르지 않든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든지 시인하지 않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만백성의 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행2:36에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백성의 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하나님의 전에 함께 모여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고서 기쁨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까?

10∼11절 상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경배와 찬양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신 목적입니다. 여기에 "예수의 이름"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라는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주신 새 이름 "주"라는 이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낮아지신 이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라는 이름은 만백성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서 높아지신 이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모든 무릎과 모든 입을 총망라해서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늘에 있는 자들"입니다. 누가 하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까? 천사들과 의인의 영들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간 성도들의 영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영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몸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과 의인의 영들은 하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둘째, "땅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있고, 안타깝게도 아직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함께 모여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와 찬양을 기쁘게 드리고 있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우리는 계속해서 변함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의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안타깝게도 아직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시고 영광 가운데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굴복하고야 말 것입니다.

셋째, "땅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시 지옥은 마귀와 사자들 곧 귀신들을 위해서 예비된 곳입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자들의 영혼도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던지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오시는 날에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끓고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자발적으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의 무릎을 꿇고 기쁨의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믿음이 깊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종종 궁궐을 빠져나가서 서민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빅토리아 여왕이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과부도 믿음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면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여왕은 과부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의 생애에서 당신을 찾아와 주신 손님 가운데 가장 고귀한 분은 누구였습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과부의 입에서 "그야 물론 예수님이시지요!"라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과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야 물론 여왕님이시지요! 제 삶에 있어서 여왕님이 저를 찾아와 주신 것은 절말 너무나도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빅토리아 여왕은 실망한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와 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자 과부는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왕님, 예수님은 제 삶의 있어서 저의 손님이 아니라 저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언제나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 삶의 목적이랍니다. 저는 지금도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빅토리아 여왕은 감격한 듯이 과부의 손을 꼭 쥐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과연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 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이따금씩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손님 정도로 여기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까? 우리의 주가 되게 하시려고 지극히 높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롬14:8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손님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 자체가 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신 결과는 무엇입니까?

11절 하반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너무나도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말씀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심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이 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신들은 없다고 했습니다. 또 예컨대 사45:5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밖에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우리가 하나님으로서 경배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놀라운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하나이시기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사이에는 절대로 그 어떤 경쟁관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면 그것이 곧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9:5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직접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하나이십니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교리의 놀라운 신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 그 분에게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화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곧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는 것은 곧 성부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높아지심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빌2:2을 보십시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마음이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3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교회가 하나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길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겸손의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여주신 것을 설명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약4:10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사도 바울의 의도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서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높이려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내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어버리고 마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저 교리적인 것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실천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도 낮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품고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낮아지고 또 낮아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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