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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 청년의 고백 (막 10: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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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병학 목사

오늘 본문에는 인생최대의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영생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요5:39 우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한다고 말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청년의 질문에 담겨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아니 온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질문은 다 해 봅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이 문제로 고민하지만 속 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덮어두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무도 분명하고 정확한 대답을 시원하고 명쾌하게 해 주십니다. 

우선 부자 청년의 질문을 살펴봅시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 속에는 우리들의 잘못된 인식이 드러납니다. 우리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영원히 사는 일이 우리들이 무슨 선한 일을 한 댓가로 얻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우리들이 노력하고 우리들의 지혜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이 무순 선한 일을 함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생각하고 행한 모든 일들이 다 악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직접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생은 반드시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자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 속에서 영생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아봅시다.

예수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찾아오면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본 것이 아니라 선한 선생님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 선한 선생님이 자기처럼 선한 사람을 알아보고 함께 자기를 높이고 동조해 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온 것입니다.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잘 배웠고 또  율법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고 배운대로 율법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대로 지키며 살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처럼 선한 일에 힘쓰는 사람을 만나서 자기의 삶에 대해서 인정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왔는데 그 분이라면 자기를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선한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선하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 청년도 결코 선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는 한 그 사람역시 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청년이 어려서부터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썼다 해도 그 청년은 그것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러한 모든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청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청년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사랑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의 n족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셨습니다.

그의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왜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십니까?

그의 부족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입니다. 율법은 그 조항 하나하나를 지켰다고 해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그 참된 의미는 결국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없이 그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다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했는지를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율법의 조문은 열심히 지키려고 하긴 했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보지만 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 청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의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죄의 심각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죄에 온전히 오렴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를 주라는 말씀에 이 부자 청년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역시 그 말씀 앞에서 자신 있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죄인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그 까닭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누구도 그 율법의 수준에 맞게 생화라고 그래서 참 잘했다고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왜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맑고 깨끗한 거울 앞에 서면 우리들의 더럽고 추한 모습이 환히 보이듯이 율법은 바로 우리에게 거울과 같아서 우리들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기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들의 죄 된 모습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율법은 율법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죄인을 향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진노하십니다 . 그리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인은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본 것처럼 선한 사람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선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세상에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 입니다. 죄인들이 자기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영생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에  거기에서 건저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고자 오신 것입니다. 이제 그 예수님을 따라 가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그 곳에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아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신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일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로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진정한 율법 준수는 결국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만이 율법의 모든 의를 이루신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따를 때 율법의 의를 이룬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의를 인정하고 그 의를 받아드려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도 예수님과 함께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반대로 인정받지도 못할 별것도 없고 문제 투성이인 자신의 의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와서 자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행한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사람에게서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람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철저하게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생의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나를 버리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시고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지만 부자 청년은 고민하다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죄인입니다. 좋은 길 옳은 길 바른 길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두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듯이 부자 청년은 자신이 가진 재물 때문에 영생의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부자 청년이 가진 재물이 아무리 많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후면 썩어지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것을 아무리 많이 가진다 해도 그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영원한 것과 썩어질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눈이 멀어있는 것입니다.
고민하고 슬퍼하고 근심하는 모습이 그렇듯 하고 근사해 보이지만 여전히 결단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모든 것이 쉽게 한순간에 다 주어지는 것인데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다.

그는 재물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제물로는 자신의 고민을 절대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재물 때문에 또 다른 근심과 걱정만 늘어갈 뿐입니다. 만일 그가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면 그가 그렇게 고민하면서 살아갔을까요?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예수님께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오히려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이 벗겨집니다. 예수님에게서 모든 사람은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습니다.

구원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선물을 주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실 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도 우리의 생명을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준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만찬가지로 영원한 생명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십시다. 예수님을 믿으면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값없이 주십니다. 나아가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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