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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월을 아끼라 (엡 5:15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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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구원 목사

미국의 시인이자 목사였던 에머슨(Emerson Ralphwaldo, 1803-82)은 말하기를 "오늘을 붙들어라 되도록이면 내일을 의지하지 말라 그 날 그 날이 일년 중에서 최선의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쟁과 평화」,「부활」의 작가로 알려진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Lev. N. Tolstoi, 1828-1910)는 말하기를 "시간은 돈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일년이 있는가 하면 수만금을 쌓아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반시간이 있다 시간에도 여러 가지 시간이 있는 법이다."라고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Montaigne, Michelde 1533-92)는 말하기를 "누가 당신에게 돈을 꾸어 달라면 당신은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써야할 테니까 그런데 어디로 놀러 가자면 당신은 대개 응할 것이다 말하자면 돈보다 시간을 빌려주는 편에는 아주 관대해진다 만일 사람들이 돈을 아끼듯 시간을 아낄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남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월은 엄청난 자원과도 같은 것입니다. 세월은 이 세상을 소리 없이 변하게 합니다. 세월은 무생물 세계나 유생물 세계를 막론하고 영향력 있는 절대입니다. 시간은 이 땅의 자연계의 산하를 변하게 하는가 하면 이 땅의 온갖 피조물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세월은 요람을 무덤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세월은 이 땅에 있는 영웅과 호걸과 가인들의 명성을 마감하는 절대 군주입니다. 세월은 이 땅에 있는 인생들의 희노애락과 수요장단을 소리 없이 통재하는 능력입니다.
시간은 학문세계의 자원입니다. 시간은 노동세계의 자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만 호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의 주인은 결코 인간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쉬운 결론을 얻게 됩니다.

퍼리클스는 "하나님에게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시간이 그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시간을 제한한다는 말이다."라고 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들리지 않고 음성도 없는 오! 시간의 발자국 소리여!"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만사를 허물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영국 속담에 "시간과 조수의 간만은 누구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달리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행 17:21).
그렇습니다. 이렇게 세월의 가치에 무게를 두는 것은 인간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은

Ⅰ. 시간을 지혜롭게 매수하라는 말입니다.

본문 5장 15-16절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고 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여기서 『세월』(카이론, )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특별한 기회'를 말합니다. 『아끼라』(엑사고라조메노이, )는 말은 '도로 사다', '속량하다'는 의미로 구속사적인 용어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마귀의 손에서 시간을 사내라!"고 했습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우리가 시간을 매수하는 방법은 세상적인 모든 방해와 향락을 내어주고 사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마치 부잣집에 강도가 들어 왔을 때 자신을 보존키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고 생명을 사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불하라"고 했습니다.
탈무드에 기록하기를 "때는 흘러간다 하고 당신은 이따금 무의식중에도 곧잘 뇌까릴 것이다 물론 때는 우두커니 서 있지 않는다 그러나 흘러가는 것은 때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도 흘러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주고라도 시간을 사라는 것입니다.
세월을 지혜롭게 매수하라는 말은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으라는 말입니다(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어떠한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Ⅱ.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9절에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세대』(아이온, )는 현재와 미래의 시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대』는 다가오는 축복의 세대와는 대조를 이루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오심을 기준으로 세대를 나누었습니다. 즉 메시야 도래이전 세대를 이 세대라고 했고 메시야가 도래한 이후의 세대를 올 세대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 세대를 악하다고 했습니다. 당시 메시야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악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요구하는 자체가 악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방언의 절제를 강조할 때 사용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를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만을 좋아하고 그것을 자랑하려는 어린 아이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개인의 자랑과 이기심만을 추구하는 속성을 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여 구원 받으려고 하는 행위를 악이라고 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세월이 짧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때가 악하기 때문에 악을 대항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라는 말입니다. 세월을 값을 주고 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시간을 사서 소유하지 아니하면 시간은 언제든지 악에게 악용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18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0-13절에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악한 세대를 대적하려면 일차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주를 위해 선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귀가 점령하고 있지 않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Ⅲ.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방법을 활용 하라는 말입니다.

1)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17절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해하라』(쉬니엔테스, )는 말은 '어떤 일에 마음을 집중시켜 파악하고 노력을 쏟는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뜻』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사명완수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위함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잃어버린 택자, 즉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를 채우는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 충만은 성령의 인침이나 성령 세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 세례나 성령의 인침은 단회적인 것이지만 성령 충만은 반복적이고 불규칙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내주하신 성령께서 성도를 온전히 지배하고 인도하는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는다'는 말은 마치 술과 그 술에 취한사람에 비유됩니다. 사도행전 2장 13절에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술은 취한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통제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성령이 그 사람을 친히 주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절대 따릅니다. 그것은 바로 ① 성경을 믿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② 사죄의 은총으로 충만합니다. ③ 증인의 삶을 삽니다. ④ 충성스러운 보은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여기 충성은 바른 관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① 대신관계는 신전인격으로 나타납니다. ② 대인관계는 인화 협동적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③ 대물관계는 문화적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즉 선지자적 사명, 왕적 사명, 제사장적인 사명을 말합니다.

3) 신령한 문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 5장 19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시』는 시편뿐만 아니라 시편에 기록한 내용과 동질의 것인 찬양시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시편의 기록을 인용해서 기록한 신약 성경이 많이 있습니다. 『찬미』는 성도들이 성령의 감화로 지은 노래들입니다. 신령한 노래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노래』는 우리가 드리는 찬송입니다. 성령의 감화로 인해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고백은 성도들의 신령한 노래입니다.
성도들은 신앙고백으로 서로 화답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이 서로의 대화에 깊이 자리해야 합니다. 신앙이 만남을 주장하고 신앙이 헤어짐을 주장해야 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서로 도와주고 격려해야 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서로서로의 왕성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문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신령한 문화운동을 위하여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 일을 주관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성경입니다. 그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인하여 각자의 신앙 고백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신령한 문화를 펼칠 무대(stage)는 반드시 주님의 몸 된 교회이어야만 합니다.

4)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20절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했습니다.
『범사』라는 말은 '모든'(all)이라는 말입니다. 희노애락 간에 라고 보는 것이 통례입니다(Chrysostom, Jerome).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말하기를 "우리가 번영할 때만 감사하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환난 시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 환난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옥으로 인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심볼(mark)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뉴턴(Newton)은 노년에 건망증이 심해서 제자들도 분간치 못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러면 선생님이 기억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뉴턴은 대답하기를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가 구주라는 것만을 알고 있네."라고 했다고 합니다.

5) 주 안에서 피차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했습니다.
여기 『경외』는 존경을 넘어 '의무감' 내지는 '사명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성도들은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비록 교회 안에서 어린 신자라 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과 성도들이 주 앞에서 겸손과 복종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 누가 아무리 충성과 복종을 강조한다고 해도 각자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절대로 불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일로 인해서 주의 몸된 교회를 근심 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진 시간동안 주의 일에 힘쓰라는 말입니다. 즉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방법을 활용하라는 말입니다.
속된 곳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유명한 워나 메이커는 "낭비한 시간은 의미 없이 던져버린 그대 삶의 일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것에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거나 모자라면 그 어떤 중대한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보충하라는 말입니다. 그 어떤 고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신령한 일을 반드시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순결을 위해 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즉 이 시대에 교회가 받은 사명완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압권(壓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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